▲2002년 구속 당시 굳게 입을 다문 김홍걸씨의 모습.오마이뉴스 권우성
김홍걸군, 참 오랜만일세. 내 기억으로는 10여년 전 교통사고로 운명한 자네 동창 남성우군 빈소에서 자네를 만난 이후 처음 같네. 사실은 자네를 한번 만나 여러가지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만 매번 때를 놓치고 말았네.
자네 아버님이 현직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 내가 만나자고 하면 무슨 이권 청탁의 오해도 받을 것 같아서 주저하다가 끝내 단념했네. 그 후 자네가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릴 때는 나를 만날 경황도 없었겠지만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처럼 가만히 있는 게 도와 주는 것 같기도 했고, 불난 집에 부채질로 오인 받을 것 같아서 참았네.
어려운 시기를 잘 감내했던 과묵한 학생
나는 자네를 떠올리면 언제나 수업 시간에 말없이 바라보던 그 모습과 1980년 여름 설악산으로 간 수학여행의 세계민속제 때, 자네가 인도 여인으로 분장했던 그 요염한 모습이 생각나네. 그때 그 인도 여인은 젖가슴도 엄청 풍만했고 키도 훤칠한 미인이었지. 그때 난 자네를 보고 여성보다 남성이 더 아름답다는 걸 느꼈다네.
나는 자네를 2년 동안 국어를 가르쳤을 뿐 담임은 하지 않았네. 자네가 1학년 2반일 때는 나는 1학년 3반을 담임했고, 자네가 2학년 1반일 때 나는 2학년 2반을 담임했지. 하지만 단위 수가 많은 국어 교과라서 주당 4시간에다가 보충 수업 시간까지 더하면 거의 매일 자네를 만났을 걸세.
지나간 일화 한토막하겠네. 그때 자네 동기생 가운데 '김대중'이란 친구가 있었지. 자네 아버님의 함자와 똑같았지. 한자로도. 1981학년도 신학기 준비를 위한 직원회 뒤 반 편성 명단을 받은 자네의 담임 고용우 선생님이 자네와 김대중 학생이 한 반이 되면 자네에게 부담이 될 거라고 하면서 나에게 개학 전 미리 반을 바꾸자고 부탁하였다네. 그래서 김대중 학생을 내 반에 받고, 대신 내 반 한 학생을 자네 반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네.
그 김대중 학생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대학병원에 있다가 지금은 천안에서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개업하고 있다네. 자네 때문에 나와 돈독한 인연이 되어 여태껏 연락하면서 지내네.
자네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9년에서 1982년은 가장 힘들었을 때라고 생각되네. 유신 정국의 마지막이요, '서울의 봄'이라 하여 잠깐 민주화의 희망이 보이다가 된통 서리가 내렸던, 그래서 자네 아버님도 연금 상태에서 유력한 대권 주자로, 다시 사형수로 곤두박질쳤던 격동의 시기였으니까.
그때 자네의 담임 선생님이었던 임무정(고1) 선생님, 고용우(고2) 선생님은 매우 생각이 깊으시고 훌륭하신 교육자로 자네를 음으로 양으로 무척 감쌌다네. 지금 임무정 선생님은 정년 퇴직 후 천안 근교에서 은거 생활을 하시고, 고용우 선생님은 1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가신 뒤 현재 보스턴 근교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네.
참 그때는 힘든 때였지. 멀쩡한 사람도 하루 아침에 용공이나 무능 부패자로 몰아서 직장에서 쫓아냈을 때로, 보통 사람들도 힘들었는데 자네 집안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런데도 자네는 겉으로 조금도 내색치 않고 그 힘든 시절을 잘 이겨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