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서리 내린 날 거둔 일곱 덩이의 애호박박도
모든 산업 중에서 농사는 기후적인 요인에 가장 민감하므로 농사꾼들은 유독 날씨에 관심이 많다. 얼치기 농사꾼도 안흥 산골에 살면서 날씨에 더욱 관심이 많아졌다. 이곳 강원 산간지역은 겨울이 다른 곳보다 빠르며 길다고 한다. 10월 초순이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얼치기 농사꾼도 일찌감치 텃밭의 남은 작물을 하나씩 거둬들였다.
옥수수는 이미 8월 하순에 모두 거둬들였고, 고구마도 추석 무렵에 다 캐서 갈무리하고 있다. 고춧대도 모두 다 뽑아서 붉은 고추, 푸른 고추, 고춧잎 등으로 나눠 이미 손질을 끝냈다. 그러나 팥과 콩이 다 여물지 않은 것 같아서 된서리가 내릴 때까지 며칠 더 두었다. 마침내 지난 13일, 된서리가 내렸다.
텃밭에 나가 보았더니 '된서리 맞다'라는 속담처럼, 농작물들이 초록빛을 모두 잃고 시들어 버렸다. ‘몹시 심한 꼴을 당하거나 모진 타격을 받다’라는 뜻의 '된서리 맞다'는 일년생 채소류나 곡식에게는 사형선고를 받는 일과 다름 없다.
일단 서리가 내리면 비닐하우스와 같은 인공적인 재배가 아닌 다음에야, 천연의 노지 작물 농사는 대부분 그걸로 끝이다(추위에 강한 시금치나 배추 등 일부 예외 작물도 있다).
늦둥이 수세미는 나의 바람과는 달리 끝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고, 호박들은 '서리 맞은 호박잎 같다'라는 속담처럼 하룻밤 새 아주 처절하게 시들어 버렸다. 그래도 그 호박그루터기에서 일곱 덩이의 끝물 애호박을 땄다. 아내는 끝물 애호박은 유난히 더 맛이 있다며, 그 중 세 덩이는 썰어서 말리고 두 덩이는 서울 아이들 몫, 두 덩이는 우리 몫으로 나눠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