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27회

등록 2004.09.29 09:07수정 2004.09.29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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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초혼령(招魂令)

[천고문(天鼓文)


죄인 양만화는 사십육년을 살아 오면서 인간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대죄를 저질렀는 바, 중형에 처할 죄를 열거하고 그를 치죄(治罪)하고자 한다.

첫째, 그의 나이 열여섯에 혼인한 하녀를 강간하였고, 결국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내쫒아 죽게 만들었다.
둘째, 그는 흉작이 든 해에 소작인들의 고혈을 짜내고, 그들이 살고 있는 농가에 불을 질러 수백여명의 소작인들을 쫒아내어 천여명에 이르는 식솔들이 타지를 떠돌다 죽게 만들었다.
셋째, 그는 경쟁관계에 있는 동료를 살인청부하여 살해하고 산서상인연합회의 수장 자리를 차지했다.

..............(중략)................

이상 그의 죄는 육시(六屍)하고 그의 구족을 멸해야 할 죄로, 양만화의 혈족은 물론 그의 장원에 남아있는 자들은 모두 처형될 것이다. 다만 죄인 양만화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갱생의 길을 택한다면 양만화는 오체복지하여 본주를 맞으라.

영락 육년 초혼령주(招魂令主).]


열거된 그의 죄는 열네가지였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일반인이었다면 관가에서 벌써 포승줄에 꿰어가 수십번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돈과 권력을 가진 자다. 돈과 권력이 있다면 그의 목적에 합리적인 이유를 붙이고 농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피치못할 일이라고 둘러댈 수 있는 것이 세상이다. 설사 그의 죄가 명백하더라도 관가는 듣거나 보지 않을 것이다.


"와지직."

천고문이 양만화의 손에서 구겨져 내렸다. 초저녁이 못되어 걸린 천고문을 발견하고 찢어 온 것은 이미 초혼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항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이미 소문이 난 관계로 천고문을 본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보던 말든 상관없지만 다섯 번째의 죄라는 것 만큼은 그의 아내가 모르길 바랬다.

[다섯째, 그는 여자를 얻기 위해 소가(蘇家)를 고의로 망하게 하여 가주인 소정(蘇晸)을 비롯, 소가의 식솔들이 자살케 하였다. 연적인 소윤(蘇允)은 사람을 시켜 오른팔을 짜르고 개돼지 패듯 때려 장독이 들게 하여 고향을 떠나게 하였다.]

그랬다. 그가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아내와 정혼이 되어 있던 소윤의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그만 포목점을 운영하던 소가는 빚만 늘어가게 되었고 결국 소가는 풍비박산 난 상태로 사라져 버렸다.

망한 이유는 단지 소가가 양만화가 마음에 들어한 감교련(甘嬌蓮)의 정혼처였다는 점뿐이었다. 감교련과 소윤의 정혼은 당연히 파혼되었고 그는 감교련을 아내로 맞이했다. 벌써 이십오년이 지난 일이었다.

“장관사!”
“예. 장주님.“

장준(張俊)은 오십대 중반의 문사풍 인물이었다. 양만화의 부친 시절부터 양만화 가문의 두뇌 역할을 해온 양만화가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양만화는 이 정도로 빨리 부를 축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장관사의 도움으로 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왔지.”
“장주님의 능력이지 저야 일푼의 도움도 드리지 못했지요.”
“아니야. 장관사가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가업(家業)이 풍비박산 날 위기에서도 우리는 오히려 기회로 삼아 더 크게 발전시켰어.”

양만화는 식은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차를 즐기는 양만화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답변은 모두 왔는가?”
“예. 소림(少林)은 장로회의(長老會議)를 소집해 결정을 한다고 하였고, 화산(華山)과 종남파(終南派)에는 현재 장문인이 출타 중이라 차후 연락을 한다 하였답니다.”
“화산과 종남에 장문인이 출타 중이라… 공교롭군.”

그 말은 도와 주기 어려우니 거절할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양만화의 말뜻을 모를 장준이 아니다. 그는 양만화의 표정만 보고도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 두곳의 장문인들이 삼일전 외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무당(武當)에도 사람을 보내 보았는데 무당의 장문인도 사흘전 출타했다고 합니다.”

대개 장문인들은 문파를 떠나지 않는다. 중요한 일이라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제들이나 장로 중에서 선발하는 게 보통이다. 소림의 호법원주(護法院主)나 지객당주(知客堂主), 무당의 집법전주(執法殿主)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구파일방의 수뇌부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근래 보기 힘든 심상치 않은 일이다.

“그 분들이 어디를 가고 있다던가?”
“행선지는 각 문파마다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냉 작은마님 말씀으로는 한결같이 소림사 쪽 같다고 합니다.”
“약빙이 그랬단 말인가?”

그의 세 번째 첩인 냉약빙의 말이라면 맞을 것이다. 그녀는 무섭도록 냉정하고 치밀한 여자다. 그리고 그가 믿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일이 꼬이는군.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양만화는 아무리 공포의 초혼령이지만 믿고 있었다. 최소한 소림과 화산, 종남파가 도와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구파일방의 도움을 받게되면 그 외의 많은 무림인들을 끌어 모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아무리 초혼령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쉽게 달성될 수가 없을 것이다.

양만화는 지금까지의 관계로 보아 최소한의 선발대라도 보내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세곳에서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불길하다.

“그렇게 무서운 상대인가? 초혼령이…”

초혼령의 위명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라진지 십오년이나 흘렀는데도 초혼령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다른 곳들은?”
“몇 군데서 출발했다고 전해 왔습니다만… 크게 도움은 바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숫자를 채우는 거에 불과해…. 너무 걱정말게.”
“저야 언제나 장주님 마음과 같습니다.”
“나가서 일 보고 약빙을 불러 주게.”

장준은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물러났다.

“차라도 새로 나오게 할까요?”
“그래 주게.”

그는 푹신한 의자에 목까지 파묻고 드러눕듯 기대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중요한 생각을 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상관없다. 소림이나 화산이 도와주면 큰 힘이 되겠지. 하지만 나 혼자라도 할 수 있어.)

여우는 절대 하나의 구멍만 만들지 않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두개 혹은 세개 이상도 파놓는 것이다. 양만화의 저돌적인 약진은 단지 상술만 뛰어나서 이룬 것이 아니다.

(아버님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측했던 것일까? 유언(遺言)에 따라 만든 사영천(死影天)을 이런 때 사용할 수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야….)

그의 부친은 살아 생전 무림의 고수를 항상 집에 초빙했고, 사병을 길렀다. 무림문파에 지원하는 돈도 다른 부호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죽는 그 순간까지 그에게 무림문파를 능가하는 힘을 갖추라고 유언(遺言)했다.

양만화는 그의 부친의 유언을 지켰다. 사병(私兵)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살수집단이었다. 그가 우연히 전설적인 살수(殺手) 한명을 알게된 것도 계기가 되었고 그가 조직한 사영천은 부친의 유언대로 한 문파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사영천(死影天)은 단시간에 전설이 된 화북을 대표하는 자객집단이며 살인청부조직이다. 강남에 살천문(殺天門)이 있다면 강북에는 사영천이 있다. 십이년전 갑자기 나타나 지금까지 한번도 청부를 실패한 적이 없다는 죽음의 그림자가 바로 사영천이다.

(그들이라면 아마 내 집 담을 넘어오기 전에 은밀하게 모두 없앨 수 있다. 오히려 나와 그들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하겠지.)

아마 그가 사영천을 조직한 인물이라고 밝혀진다면 그는 이 중원에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그가 염려하는 일은 그것이었다. 그의 상념은 방안으로 들어서는 냉약빙에 의해 깨졌다.

“부르셨나요?”
“어서 오게나.”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이 들려 있었다. 그는 찻잔을 받아 들고 한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들께서 외출 중이라고?”
“행선지로 보아 소림 쪽을 향하고 있는데 소림이라고는 단정지을 수 없지요. 다만 청해에 있는 곤륜파(崑崙波)의 장문인이 십여일 전에 하남 쪽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에요.”

곤륜파는 중원과 꽤 떨어진 청해성(靑海省) 곤륜산맥(崑崙山脈)에 위치해 있다. 구파일방의 일원이기는 해도 변방에 위치한 곤륜파는 좀처럼 중원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곤륜파에서 장문인이 소림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뜻밖이다.

“무림에 무슨 변고(變故)라도 있나?”
“아직은 파악된 게 없어요. 조사는 시키고 있지만 특별히 주시할 만한 사안도 없구요.”
“하필 이 때에 왜 그들이…”

무림에 중대한 변고가 생겼다면 자신은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냉약빙은 그 마음을 안다는 듯이 미소를 띠었다. 그녀의 차가운 얼굴은 웃음마저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차갑고 깨끗한 웃음도 매력적이 될 수 있다.

“걱정 마세요. 어르신. 이미 준비는 끝났어요. 사업을 위하여 나가있던 십육명만 도착되면 이곳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사영천의 열쇠는 냉약빙이 쥐고 있었다. 그녀 역시 사영천의 살수(殺手)였다. 그런 그녀를 본 양만화는 그녀를 사년 전 첩으로 맞아 들였다. 그리고 그가 믿는 사영천주(死影天主)는 그들의 본업에 전력케 하고 그 관리는 냉약빙에게 맡겨 놓았다.

사실 냉약빙의 차갑고 독특한 미모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육체란 마음의 끈을 연결하기에 더 없이 좋은 도구였다. 여자에게 있어 육체란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남자가 그 문을 열게 되면 마음도 묶이게 되기 때문이다. 양만화는 웃었다.

“이리 오너라. 네 몸을 본 지도 오래 되었구나.”

그 말에 냉약빙은 스스럼없이 옷을 벗었다. 그는 그녀를 대할 때 먼저 안기보다는 우선 벗겨 놓고 감상하길 좋아하는 버릇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요녀가 아니라 완벽한 몸매를 가진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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