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회

등록 2004.08.28 08:26수정 2004.08.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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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가훈(家訓)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들이 숨어 있는 동굴 입구에 가장 적합한 기진(奇陣)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바로 코앞에 와서도 동굴이 있다 던가 숨어 있을만한 장소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은 물론 동물들이라도 갑자기 뛰어들면 위험했다.

어쩌면 그나 그녀가 예상한 이틀을 훌쩍 넘겨야 할 것이므로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녀는 샘을 찾아 물주머니를 채우고 속치마를 찢어 물을 적셨다.

그는 언제나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그 일은 꿈이 아니라 실제 그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은 가끔 그의 꿈속에서 생생하게 다시 일어나 그를 고통 속으로 몰고갔다.

“청(晴)아. 지금부터 내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아버지가 그리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적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가문의 무공을 가르칠 때도, 그가 아무리 말썽을 피워도 부친은 언제나 담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부친은 누구에게나 그랬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부친에게 공손했다.
가끔 구렛나루를 덮고 있는 빳빳한 수염으로 자신을 안고 비벼댈 때가 가장 싫었다.

“지금부터 너는 소혜(小慧)를 데리고 숨어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작은 방 한 귀퉁이를 들어내며 턱으로 여동생과 함께 들어가라는 표시를 했다.

“아버지. 왜?”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누가 부르던 절대 나오면 안된다.”

아버지는 그에게 향(香)을 한 묶음 주었다.

“네가 더 이상 참기 힘들다고 생각할 때 이 향을 피워라. 그리고 또 참기 힘들면 또 한대를 피우고, 향이 다 떨어지거든 동생을 데리고 나와도 좋다.”

어쩌면 놀이인지도 몰랐다.

그의 부친이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거나 아니면 인내심을 가르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까지 데리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만약.....네가 밖으로 나와 아버지나 엄마가 없더라도 당황하지 말아라. 너는 사내다. 너는 담가(曇家)를 이어갈 사내로서 아버지와 약속하겠느냐?“
“약속 할께요.”
“그래 좋다. 너는 앞으로도 사내가 해야 할일을 피하지 말아라.”

아버지가 그 말을 끝으로 방바닥의 뚜껑을 닫았을 때 그는 단 하나의 촛불에 의지한 어둠이 무서워 떨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손은 어린 여동생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 동생은 울먹이고 있었다.

“소혜야 울지마…. 오빠가 과자 줄게”

그의 부친이 챙겨주었던 보따리를 풀어 과자를 꺼내 동생에게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향을 한 대 피우고 또 피우고…. 그러다 잠이 들었고, 또 향 한대를 피웠다. 소혜는 계속해서 칭얼댔고, 그는 그 여동생을 달래느라 오히려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사내로서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했다. 향이 서너개 남았을 때 방바닥이 열리고 빛이 들어왔다.
]
낮이었던지 방안의 빛이었지만 눈이 부셔서 뜰 수가 없었다. 우선 그의 코로 자극하는 것은 피냄새였다.

“천의(天義)야. 어서 나오거라.”

누군가가 앞에 서 있었다. 눈이 빛에 익숙할 즈음 그는 방안에 남자 네명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한사람은 어제 저녁, 아니 그가 방바닥으로 들어오기 전날 저녁에 보았던 금의(錦衣)를 입은 삼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아버지가 황급히 마중 나가 공손하게 대하던 인물. 자신을 보며 네가 천의냐 하면서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과자를 건네 준 사람이었다.

그는 여동생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여동생은 놀라 울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중년인 뒤로 석상 같이 표정이 없는 세사람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병기가 들려 있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님은요?”

그는 불길한 예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사람 모두 죽었다.”

뇌리가 온통 캄캄해졌다. 사내는 사내로서 할 일을 피하지 않는다는 담가의 가훈이 아니라면 그는 울거나 혼절했을 것이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당신이 죽였나요?”

아마 그 때가 중년인 뒤에 서 있던 석상 같은 세명의 인물들 얼굴에 유일하게 화난 표정이 떠오른 순간이었을 것이다. 중년인은 한참 후에야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당신은 부모님의 원수이군요. 무공을 배워 반드시 이 복수를 할 거예요.”

중년인은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는지 허허 웃었다.

“좋은 생각이구나. 하지만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일만한 무공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그러한 무공을 가르쳐 줄 스승도 찾지 못할 것이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사내는 사내가 해야 할 일을 피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복수는 사내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예요.”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능력이 없는 사내는 사내로서 가치가 없다.”
“나는 사내에요.”
“좋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 너는 나에게 나를 죽일만한 무공을 배워라. 내가 익힌 한가지 외에 나를 죽일 수 있는 무공 두가지를 더 알고 있다. 네가 그 세 개의 무공 중 두가지만 완벽히 익힌다면 나를 죽일 수 있다.”

아홉 살 자리의 꼬마가 결정할 일은 많지 않다. 더구나 다섯 살짜리 여동생을 데리고 있는 꼬마라면 더더욱 결정하기 어렵다. 중년인은 다짐을 하듯 다시 제안을 했다.

“공짜는 아니다. 그 무공을 주는 대신 너는 내가 시키는 세가지 일을 해 주어야 한다. 그 후에 너는 네가 생각한 것을 해도 좋다.”

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좋아요. 나는 당신에게 그 무공을 모두 배우겠어요.”

중년인은 대답 대신 용이 음각된 동그란 피묻은 철패(鐵佩)를 하나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 것이다.”

피...피....피....!

담가의 식솔은 하인 하녀들을 비롯하여 기껏해야 스무명 남짓했다.
그들 모두가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사지가 짤린 채 죽어 있었다.

그들의 부릅 뜬 두눈이 담가의 어린 가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속에는 그를 사랑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屍身)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전혀 보지 못한 자들의 시체도 이십여구가 넘을 정도로 참담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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