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연
이 걸 시라고 불러야할지 산문이라 해야할지 곤혹스럽다. 1930년대 최고의 서정시인 백석의 '나와 지렁이'.
'내 지렁이는 커서 구렁이가 되었습니다. 천 년 동안만 밤마다 흙에 물을 주면 그 흙이 지렁이가 되었습니다. 장마 지면 비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뒤에 붕어와 농다리의 미끼가 되었습니다. 내 이과책에는 암컷과 수컷이 있어서 새끼를 낳았습니다. 지렁이의 눈이 보고 싶습니다. 지렁이의 밥과 집이 부럽습니다.'
이처럼 향기로운 문장 수백 개가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모던 수필>(방민호 엮음. 향연)은 한국 현대문학의 태동기를 살았던 문인들이 1920년대부터 해방 직후까지 발표한 산문 91편을 묶어 독자들에게 수필문학의 새로운 맛을 선사한다.
카프 출신의 임화와 김남천, 최서해에서부터, 이상과 김유정 등 요절한 천재, 월북작가 이기영과 친일문제로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광수 등 <모던 수필>에 등장하는 작가 51명은 그 문학적 지향과 삶의 태도가 각각 달랐다.
그럼에도 이들이 같은 책에 묶인 이유는 뭘까?
편저자인 국민대 방민호 교수는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우리 문학인이 남긴 산문 가운데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중심으로 엮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이념'보다는 '문학적 가치'를 게재여부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에 다름 아닌 듯.
김광섭의 '꽃을 먹는 쥐'와 채만식의 '애저찜' 등이 실린 1부는 계절과 자연, 음식 등을 소재로 한 글을 배치했고, 2부에 실린 이상의 '약수'와 정지용의 '꾀꼬리와 국화' 등에서는 문인들이 생활자로서 느끼는 번민을 엿볼 수 있다. 3부와 4부에는 작가들이 바라본 당대의 문화와 요절문인의 예술관이 각각 담겨있다.
책을 접한 평론가 최동호(고려대 교수)는 "우리 글과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한번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며 "글의 묘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도록 정성을 기울인 편자의 노력에 한국문학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서 찬탄을 표한다"고 덧붙였다.
역사의 뒷골목을 걸어가는 기쁨
-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숨겨진 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