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나무
'사실의 나열과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 기사'라는 공식은 김훈의 문학기사 앞에 무력했다. 현역 문학기자 시절 김훈이 보여준 글들은 단순한 기사를 넘어서는 '또 다른 하나의 문학작품'이었다.
저자와 평론가를 일체 인용하지 않고, 도식화된 객관보다는 자유로운 주관에 의지하는 김훈의 기사. 그것은 분명 한국 언론사에 찍힌 뚜렷하고도 이채로운 방점이었다.
이제는 조직 내에서의 글쓰기를 접고, 보다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는 김훈이 최근 산문집을 냈다.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나무). 지천명을 훌쩍 넘긴 노(老)기자는 2003년 오늘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을까? 그의 이전 산문집 <자전거 여행> <풍경과 상처> 등과는 또 어떻게 다를까?
누가 뭐래도 <밥벌이의 지겨움>을 관통하는 가장 큰 힘은 '거침없음'이다. 김훈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어떤 잣대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십 년 일군 정신의 텃밭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거침없는 그의 붓끝이 닿는 곳마다 세상과 인간은 새롭게 해석되고, 전혀 색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디지털과 인터넷이 지배하는 21세기의 속도를 거부하며, 천천히 느리게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들려주는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과 탑골공원에 앉은 노인의 처연한 눈빛에서 삶을 체득한 자의 지혜를 읽어내는 '늙기란 힘든 사업이다', 무분별한 외모지상주의에 만신창이가 돼버린 한국여자들의 젖가슴을 통탄하는 '가슴의 미학' 등은 특별히 재미있게 읽히여 그 의미 또한 만만치 않다.
아직도 연필로 글을 쓰고, 자동차는커녕 오토바이 운전도 하지 못하며, 제 손으로 셔터를 눌러 사진 한 장 찍어 본 적 없다는 기계치 김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기계들이 인간의 정신마저 지배하려드는 메마른 시대, 새벽녘 고샅길의 이슬을 닮은 김훈의 글은 우리의 가슴을 밑 모를 서러움으로 적신다. 그래서 아래 서술하는 그의 문장은 웃음 같지만 실상은 눈물이다.
'친구들아 우리들의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 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가난했다고 꿈마저 없었을까?
- 강병호의 <자장면과 바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