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5 07:08최종 업데이트 24.06.25 07:08
  • 본문듣기

지난 5월 21일 채널A가 보도한 [현장영상] "루즈벨트는 635번 거부권" '채상병특검법' 거부권 엄호 ⓒ 채널A


"635번의 거부권 행사!" 이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일부 언론이 대통령의 잦은 거부권 행사를 정당화하며 인용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기록이다.

미국 대통령들은 실제로 많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상원 웹사이트에 따르면 1789년 이후 2024년 5월까지 46명 중 39명이 총 2596번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한국의 경우 이승만 대통령이 45건, 민주화 이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각각 4번, 1번, 2번 행사했다. 김영삼, 김대중,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중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역사와 제도적 맥락을 무시한 오류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12년 넘는 장기 집권, 뉴딜 정책 등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후 미국 대통령들의 거부권 행사는 총법률안의 1.7%에 불과하며, 그 비율도 계속 감소하고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맥락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주요 원인은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 상황이다. 분점정부란 대통령이 속한 정당과 상원 또는 하원의 다수당이 다른 경우를 의미한다. 한국으로 치면 여소야대 상황에 해당한다.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루스벨트의 경우도 분점정부 때문에 635회나 되는 거부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측하기 쉽다. 국민의힘에서 루스벨트 사례를 인용한 이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여소야대 정국은 없었다. 루스벨트는 민주당 소속이었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압도적 다수당이었다.

루스벨트의 거부권 행사 횟수가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재임 기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는 1933년 3월부터 1945년 4월까지 12년 넘게 재임했으며, 이는 역대 최장이다. 당시에는 대통령 연임 제한에 대한 헌법적 규정이 없어 총 4번이나 연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대공황으로 인한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와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었다.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당시 미국 경제는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산업 생산은 1929년에 비해 약 45% 감소했고, 국민소득은 30% 이상 줄어들었다. 실업률은 25%에 달해 약 13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농산물 가격은 60% 이상 하락하여 농민들의 어려움도 커졌다.

이런 미증유의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루스벨트는 공공사업 확대, 실업자 구제 프로그램, 농업 및 산업 지원, 사회보장제도 도입 등을 포함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 지출과 적자 재정을 감수하면서 적극적인 재정부양책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서도 뉴딜정책에 반대하는 그룹이 있었다.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 정치인들은 지역주의적 이해관계를 강조하며 연방 정부의 과도한 개입을 반대하고, 주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으며, 인종 차별적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다. 루스벨트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회보장제도 도입과 노동자 권리 강화 법안들을 추진하며 거부권을 자주 사용했다.
 

[표 1] 루스벨트 대통령 거부권 행사 법안(1933-45). 자료 출처_미국 상원 ⓒ 강명구

  
특히 대공황 시기에는 구제 법안이 경제 회복의 핵심 요소였다. 루스벨트는 일자리 창출과 경제 부양을 위해 구제 프로그램을 추진했지만, 비효율적이거나 특정 개인에게만 혜택을 주는 법안은 거부했다. '표1'에서 보듯, 실제 그가 거부한 구제 법안들 대부분은 특정 개인에게 긴급 구호를 제공하는 내용의 법안들이었다. 

그는 뉴딜 정책의 일관성을 위해 노동자 권리를 약화시키거나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는 법안도 거부했다. 공공사업 및 인프라 법안 중 비효율적이거나 불필요한 사업, 과도한 군사 예산 확대나 특정 참전 용사들에 대한 과도한 혜택 제공 법안도 거부 대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루스벨트의 정책은 전시 경제로 전환되었다. 그는 전쟁 준비와 군사 관련 법안을 주요 이슈로 삼아 총 297개의 법안을 거부했으며, 비효율적 구제 프로그램과 과도한 군사 관련 보상 청구도 제한했다.

또한, 당시 미 의회의 불안정한 법안 심사 체계도 거부권 행사에 영향을 미쳤다. 상임위원회 체계가 미흡하고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법안들이 충분한 심사 없이 빠르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한국의 22대 국회와 같은 여소야대, '분점정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 속에서 경제 회복, 사회 복지 확대, 전시 경제 운영을 위해 효율적인 정책 추진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635회라는 숫자만으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정당화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왜곡이다.

그렇다면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최근에도 미국 대통령들이 수백 건의 거부권을 행사해 왔을까?

레이건 정부 이후의 거부권 행사 경향
 

[표 2]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1981-2024). 자료 출처_미 의회 ⓒ 강명구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부터 현 조 바이든 행정부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총 205개의 법안을 거부했다. 거부권은 '분점정부' 시기에만 사용되었다. '표2'에서 보듯, 1981년부터 2024년까지 총 22번의 의회 회기 중 15개가 분점정부 회기였다.

주목할 점은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빈도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거부권 행사는 전체 법률안의 1.7%에 불과했으며, 이는 대통령과 의회 간 협력이 강화되었음을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레이건 대통령(78건)과 조지 H.W. 부시 대통령(44건)은 주로 분점정부 하에서 예산 문제와 세금 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많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37건)은 후반 분점정부에서 예산 삭감 법안 등과 관련해 갈등을 겪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마지막 2년간 환경 규제 관련 법안들을 중심으로 12건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버락 오바마(12건), 도널드 트럼프(10건), 조 바이든(12건) 대통령도 초기 '단일정부'에서는 거부권 사용이 적었으나, 후반 분점정부에서는 증가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의료 개혁과 환경 보호,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 규제, 바이든 대통령은 세금 정책과 기후 변화 대응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 대통령들이 경제 정책, 세금 문제, 환경 규제, 의료 개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이를 자신의 국정철학 실현과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주로 사용해 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전체 법률안 중 거부된 비율이 1.7%에 불과하다는 점은 대통령들이 거부권을 남발하지 않고 헌법적 원칙과 협치를 중시하며 신중하게 사용해 왔음을 의미한다. 

한국과 미국의 제도적 차이
 

윤석열 대통령이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개회 선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과 미국에서의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단순히 횟수만 비교하는 것은 역사적 및 제도적 맥락을 무시한 왜곡이다. 한국에서는 미국에 비해 여소야대 정국이 드물었고, 독재 유산으로 인해 행정부가 국회보다 늘 우위에 있었다.

미국에선 분점정부가 보다 일반적이었지만, 1987년 민주화 이전 한국에서는 여소야대 정국이 없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에서는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하기까지하며 국회를 통제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행정부 우위의 제도적 유산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제도적 차이는 정부의 예산편성권이다. 한국 헌법 제57조에 따르면 정부가 예산 편성권을 가지며,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예산을 증액하거나 새로운 항목을 추가할 수 없다. 이는 국회의 예산 심사 권한을 제한하는 구조다.

반면, 미국에서는 의회, 특히 하원이 예산 편성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 미국 의회는 행정부가 제안한 예산안을 자유롭게 수정, 증액, 삭감할 수 있으며, 새로운 예산 항목도 추가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대통령의 주요 거부권 행사는 예산 관련 문제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루스벨트의 예가 그렇고, 최근의 거부권 행사 사례도 직간접적으로 예산 문제와 관련이 깊다.

입법과정에서도 한미 간 차이가 크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국회에 직접 법안을 제출하고 통과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미국 정부는 의회에 직접 법안을 제출할 권한이 없으며, 법안 제출 권한은 오직 의원들에게만 있다. 행정부는 단지 제안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전 글(미국이었다면, 민주당이 모든 상임위원장 독점 https://omn.kr/291sx)에서 살펴봤듯, 미국 의회 운영 방식도 한국 국회와 다르다. 여야 간 원 구성 협상 없이 다수당이 상임위원장직을 독점하는 승자독식 방식으로 운영된다. 미국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은 이러한 의회 운영에서의 다수당 우위 체제를 기본 전제로 한 권한이다.

이러한 제도적 차이를 무시한 채 단순히 거부권 행사 횟수의 많고 적음을 근거로 윤 대통령의 거부권을 정당화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 무지이며 왜곡이다. 

많은 국민들이 이미 눈치채고 있듯,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강조하는 속내는 대통령과 가족이 관련된 특검 조사를 거부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진짜 속내를 숨긴 채, 협치라는 명목으로 여당과 합의되지 않은 모든 법안에 대해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며, 미국 사례를 끌어와 미국에선 거부권 행사가 일상인 것처럼 여론전을 펴는 것이다. 

정치 리더십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로 결코 쌓아 올릴 수 없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