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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농민이 널어놓은 벼를 미군탱크가 짓뭉개고 간 경기 파주시 장마루촌. 그 길을 소달구지가 지나간다. 10월 28일 아침 풍경이다. 간간이 지붕이 납작하고 폭이 넓적한 미군차가 곁눈질하며 지나가는 것 외에는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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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나는 다큐사진가다. 이번 미군탱크 횡포를 사진에 담았던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런데 최근 보도와 관련 '사진이 조작됐다'와 '벼를 도로에 왜 널었는가'를 놓고 약간의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진을 보면 탱크자국이 아니라 자동차라는 것이다.

미군 탱크가 또한번 볍씨를 밟고 지나가자 농민 윤병욱 씨가 탱크를 가로막았다. ⓒ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맞다. 자동차 바퀴 자국이다. 탱크가 밟고 그 위를 또 유조차, 트럭 등이 밟고 갔으니 그 속에 숨겨진 탱크자국을 알 길이 없을 법도 하다. 그래서 사진 조작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논외로 접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도로인가, 농로인가

미군은 물론 일부 한국사람까지도 벼를 왜 도로에 널었는가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다른 반론을 제기한다. 도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도로는 옛부터 농로였으며 지금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달라진 거라면 미군이 농로를 강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장마루 주민들은 이 길을 통해 지금은 미군훈련장이 되어 버린 '고랑포'로 농사를 지으러 다녔다. 그리고 해마다 이 길에 벼, 고추, 참깨 등을 널었다. 그런 길을 미군이 훈련장 진입로로 사용하고 있는 것 뿐이다.

96년 1월 미군탱크가 농로에서 훈련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 10월 24일 미군탱크가 벼를 밟고 지나간 바로 그 자리다. 96년 당시 "도로에서 왜 훈련을 하느냐"는 농민들의 항의에 미군은 "도로가 아니라 농로"라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로"라고 주장하고 있다. ⓒ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특히 이 길은 1km 정도 가면 더 이상 갈 수 없다. 미군훈련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사용하지 못하는 길을, 그리고 되돌아 나와야 하는 길을 어떻게 도로라는 개념으로 농민들의 벼 말리기 불법 여부를 말할 수 있겠는가.

96년 1월 미군탱크가 훈련을 하면서 농로를 짓뭉갰다. 경운기는커녕 걸어다닐 수도 없었다. 바로 그 짓뭉갠 농로가 이번에 농민들이 벼를 널었던 곳이다. 이제 그 농로에 아스팔트를 깔았다. 만약 비포장이었다면 도로라고 했을까. 의문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 조상들이 농로로 사용해왔고 후손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을 미군이 침범한 것이다.

미군탱크는 왜 마을길로 왔는가

10월 24일 오전 미2사단 민사과에서 피해조사를 나왔다. 민사관에게 "작전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왜 마을길로 왔느냐"고 물었다. 전차대대장이 답변했다. "그쪽(자장리)으로 갔다가 한국군이 통과를 시키지 않아 할 수 없이 이쪽(마을길)으로 왔다"고 말했다. 미군 측이 주장한 한국군부대를 찾아갔다. 중대장 민아무개 대위는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대위는 "이 도로에 방어벽을 두 곳 통과해야 하는 데 장갑차는 쉽게 갈 수 있지만 전차는 폭이 넓어 조심하지 않으면 석벽에 부딪친다"고 설명했다.

미군탱크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을길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은 탱크 파손만 생각했다는 얘기다. 방어벽을 넓혀 사용하는 문제는 고려하지 않은 채 수 년 동안 그 새벽에 고막 찢는 소리를 내며 일년 농사를 망쳐 놓은 것이다.

장마루는 어떤 곳인가

장마루촌에는 아직도 미군클럽이 남아있다. ⓒ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한국전쟁 이후 장마루는 파주의 대표적 기지촌이었다. 임진강 건너에 연대급 미군부대가 있었다. 미군클럽이 30여개, 여종업원이 1,000여 명이나 됐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사꾼들로 성황을 이뤘다. 가설극장이 유행일 당시 장마루는 극장과 중학교가 들어섰다. 특히 현재도 남아 있는 미군클럽 '라스트 챤스'는 여종업원이 300명이 넘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인기가수 조용필 씨가 고등학교 때 가출하여 이곳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다. 이 당시의 미군클럽이 거의 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70년대 초 미2사단이 동두천으로 옮겨가면서 장마루는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다. 전국에서 몰려와 돈을 번 사람들은 미군을 쫓아갔다. 원주민들은 하늘만 쳐다봤다. 농사를 짓다가 바로 2차 산업을 건너 3차 산업인 서비스를 업으로 했기 때문이다. 농경지는 이미 미군공여지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가버린 미군들이 이제는 탱크를 몰고 와 가까스로 일으켜 세운 일년 농사를 무자비로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스토리사격장 농경지에 대한 미군의 무례함은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사유지를 이제껏 공짜로 사용하더니 이제 헐값에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10월 28일 오후 스토리사격장. 김기세(63) 씨가 미군이 설치해 놓은 철조망과 차단기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있어요? 이제까지 우리는 미군이 시키는대로 다했어요. 사격한다고 하면 농사를 짓다 말고 자리를 비켜 주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차단기까지 만들어 출입을 막고 있으니 추수를 어떻게 합니까"라며 사격장 관리 직원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스토리사격장 앞에서 농민 김기세 씨가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 현장사진연구소 이용남
사유지를 한국정부로부터 공여 받았다며 추수도 못하게 내쫓는 미군. 그나마 가까스로 추수해 널어놓은 벼를 짓밟아 버리는 미군탱크. 그럼에도 우리는 기껏해야 도로교통법 위반을 말하고 있다.

누렁소는 주인이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간다. 그리고 걷다가 곡식과 채소를 뛰어 넘을 줄도 안다. '소'만도 못한 미군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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