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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은 음력으로 정월 그믐날이었습니다. 예부터 정월 한 달은 인사를 다니는 달이라고 했지요. 해서 4년 전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자살, 가족과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고(故) 이은주(영화배우 겸 탤런트)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뵙고 왔습니다. 

작년 10월25일 아내와 함께 인사를 갔을 때, 고 이은주 할머니가 갈비를 사주시더군요. 부모에게 돈 보다는 몸으로 효도하는 게 실용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 10월25일 아내와 함께 인사를 갔을 때, 고 이은주 할머니가 갈비를 사주시더군요. 부모에게 돈 보다는 몸으로 효도하는 게 실용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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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의 할아버지·할머니는 결혼식 날을 잡아놓고 아내와 함께 찾아가 인사를 드렸으며, 결혼 후에는 전화로 안부를 여쭙기도 하고, 딸과 함께 인사를 가는 등 40년 가까이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찾아뵙는 어른들입니다. 

작년 12월 문병을 갔을 때 설날에 오겠다고 약속하고 왔는데 찾아뵙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뤄오다 음력 정월은 넘기지 말아야 하겠기에 혼자서 다녀왔는데요. 올해 87세인 할아버지는 손녀(이은주) 자살 충격으로 병상에 누워계시고, 83세인 할머니는 건강한 편인데 옆에서 병시중을 들고 계십니다.

이양이 사망하기 전 시사회장에서 기자에게, "저에게 맡겨진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이 삶의 원칙"이라고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요. 부자(富者)로 소문났으면서도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부지런하고 근면했던 할아버지를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이은주 사망 4주기를 맞아 2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이 양이 출연했던 '번지점프를 하다'를 무료로 상영하고, 고인의 생전 작품 활동을 기렸다고 합니다.

인터넷 팬카페 '이은주 사랑 팬클럽' 회원들은 이양 소속사였던 '나무엑터스'와 가족 동료와 21일에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청아공원에서 23일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고인을 기억하는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하는데요. 할아버지·할머니가 가슴 아파하실 것 같아서 추모행사 관련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이은주양이 신인 시절로 기억하는데요. 여고 입학을 앞두고 있던 딸과 아내와 인사를 갔더니 "안나가 벌써 고등학교에 들어가는구나!"라고 반기면서, 손녀 사진이 인쇄된 예쁜 카드를 내주며 "은주는 네 언니니까 친하게 지내야 한다. 친구들에게 홍보도 많이 하고···"라며 웃던 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고 이은주 양 집안과의 인연

이은주 할머니는 1973년 4월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광천 독배 잔칫집에까지 가서 형제들과 즐겁게 놀다 오셨는데요. 저와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장항선 철길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입니다.
 이은주 할머니는 1973년 4월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광천 독배 잔칫집에까지 가서 형제들과 즐겁게 놀다 오셨는데요. 저와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장항선 철길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입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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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양 할아버지·할머니는 제가 평소 존경해오던 분들입니다. 70년대 초 할아버지 댁 상가(商家)를 월세로 얻어 가게를 운영했던 게 인연이 되어, 성업 중이던 할머니 보석상을 인수해서 운영하기도 했는데요. 몇 년이 지나도록 아들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상당할 정도로 두 어른도 저를 자식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동경에서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할아버지는 해방 후 어업조합 이사를 지냈는데요. 염전, 양조장(술도가), 운수업, 시멘트 대리점 등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는 일이 없었으며 할머니는 큰 보석상을 경영하다 50대를 앞두고 저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상가건물이 2층이고 넓어 가게 뒤편에 방을 만들어 어머니와 함께 지내도록 배려해주셔서 몇 년 동안 한 집에서 가족처럼 살기도 했는데요. 제가 열 살 때 환갑잔치를 했던 아버지가 그나마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연로하셔서 더욱 정이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분은 제 어머니에게 깍듯이 대하셨는데요. 경제적으로도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품성도 본보기가 되었지만, 어머니를 집안 어른처럼 대하는 모습에 감동해서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노후를 군산의 모 아파트에서 조용히 지내는 이은주양 할아버지·할머니는 지금도 투정을 부리고 싶을 정도로 정이 가는 분들인데요. 두 분과의 인연은 저와 어머니에서 그치지 않고 형제들에게도 이어졌습니다. 집안에 잔치가 있으면 참석해서 함께 즐기고 했으니까요. 

제가 이은주 사망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또 애석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첫째가 주위에서 반대하는 이양의 부모 결혼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양 할아버지·할머니와의 특별한 인연. 셋째는 저를 친형처럼 따랐던 이양 아버지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과 돈독했던 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조그만 일도 저와 상의했던 이양 할머니가 하루는 "나는 결혼을 반대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기에 이양 어머니 될 분을 만나고 와서 "제가 보기엔 결혼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 장래를 위해 결혼을 허락해주세요!"라며 적극적으로 찬성했거든요.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연이 많습니다.

결국, 혼인은 성사되었고 저는 누구보다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제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잊히기 시작했는데요. 부모처럼 생각했던 이 양의 할아버지·할머니는 계속 인사를 다녔고,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도 만족해하셨습니다. 

인간사 '새옹지마'

이제는 이은주양 할아버지 상가건물에서 이사한 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하던 해부터 두 분을 꿈에 뵙는데요. 이상한 것은 꿈을 꾼 날은 재수도 있고 최소한 기분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꿈 얘기를 듣더니 "너허고 흥보당 아줌니허고 인연은 보통 인연이 아닌 개비다"라며 웃던 어머니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아쉬워하는 이 양 할아버지에게 날이 풀리면 또 오겠다고 약속하고 오려는데, 할머니가 함께 식사라도 해야겠다며 다음에는 꼭 아내와 함께 오라고 하십니다. 시간이 나면 그렇게 하겠다며 인사를 하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서는데 문득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르더군요.

제 주위에는 고 이은주양 할아버지 말고도, 치매로 입원해있는 큰 누님과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둘째 누님, 혈압으로 쓰러져 10년째 고생하는 셋째 매형, 유방암 수술에 이어 자궁암 수술까지 한 막내 누님이 있는데요.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니까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트였습니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전날 위독했던 셋째 매형 경과가 궁금해 중간에서 내려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빵을 3천원어치 사서 가지고 갔더니 문이 굳게 잠겼더군요. 불안한 마음에 누님에게 전화했더니 익산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다고 해서 찐빵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일은 아내가 쉬는 날이니 셋째 매형 병문안을 다녀오고, 주말에는 동생과 상의해서 막내 누님에게 다녀와야 할 모양입니다. '잊을 줄 아는 것도 큰 행복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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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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