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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에 비친 진달래.
ⓒ 서성.

청명이 막 지난 북한산에는 진달래꽃이 한창이다. 삼월 하순부터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사월 첫 주가 되니 꽃망울 가운데 거의 반이 피었다. 4월 8일에 가보니 햇빛을 받은 선연한 꽃들이 한참 산을 타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 삼월 중순 매화와 산수유가 피어난 다음에는, 하순부터 진달래, 개나리, 목련, 살구꽃 등이 같이 피어난다. 이들 봄꽃 가운데서도 진달래가 가장 크고 붉은 편이어서 선명한 인상을 남긴다. 산성 토양이라면 어디서든 쉽게 자라나고 비교적 오래 피어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봄의 시작에 여기저기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 이제 정말 봄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가운데서도 진달래는 마치 습자지에 분홍물을 들인 듯 곱다. 여기저기 피어있는 연지색을 보면 그 붉음으로 남아있는 겨울의 한기를 몰아내는 듯하다. 붉은 색은 태양의 색이고 불의 몸이고 피의 빛깔이다.

▲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 더욱 화사하다.
ⓒ 서성.

진달래의 이름은 고려 시대에 ‘외’에서 유래하여 ‘달래’가 되었다는데, 달래꽃 가운데서도 참꽃이라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이러한 진달래는 중국에도 많다. 진달래과에 해당하는 두견화과는 전 세계에 900여종 있는데 중국에 500여종, 한국에 6종, 일본에 20종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철쭉이나 영산홍도 여기에 속한다. 중국에서 이 꽃을 재배한 역사도 천 년 이상 되고, 일부 품종은 현재 수출하고 있다.

중국의 진달래는 종류가 많은 만큼 이름도 다양하다. 두견화(杜鵑花) 이외에 산척촉, 양척촉, 산석류, 산비파 등으로 불리어왔다. 고대에는 지역에 따라 같은 꽃도 명칭이 다르거나, 비슷한 꽃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학명을 붙이기 시작하고 부터이다.

결국 고대에는 진달래와 철쭉을 섞여 불렀던 것이다. 이름 가운데 양척촉(羊躑躅)이란 말의 유래가 재미있다. 척촉이란 비틀거린다는 뜻으로 양들이 독성이 있는 이 철쭉 잎을 먹으면 비틀거린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졌다. 우리말의 ‘산철쭉’은 ‘산척촉’에서 유래된 듯하다.

▲ 설엽(楔葉)두견. 중국의 두견화로 운남성과 사천성에 핀다.
ⓒ <중국야생화훼도보>

중국의 두견화는 주로 양자강 이남의 산지에서 자라는데 특히 운남성과 사천성이 유명하다. 중국의 서남부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 두견화 가운데는 한국의 진달래와 비슷한 종류도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에는 진달래를 두견화라 불렀기에 진달래꽃을 술에 재어 만든 술을 ‘두견주’라 불렀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북한의 국화가 지금의 목란(함박꽃)으로 바뀌기 전에는 진달래였는데, 중국에선 이를 ‘금달래’(金達來)라고 불렀다. 중국어로 ‘진다라이’라고 발음되는데, ‘금덩이가 쉬임 없이 들어온다’는 길상의 뜻이 들어가 있다. 네팔의 국화도 철쭉꽃이다.

중국의 고대 문인들은 두견화를 어떻게 보았을까. 백거이는 '산석류화를 보고 원진에게 부치다'(山石榴寄元九)에서 두견화를 “꽃 중의 서시(西施)”(花中此物似西施)라고 하였다. 그는 또 '산비파'(山枇杷)에서 “돌아보니 복사꽃과 오얏꽃이 무색하고, 견주어보니 연꽃은 꽃이 아니어라”(回看桃李都无色, 映得芙蓉不是花)고 그 아름다움을 과장하였다. 산석류화와 산비파는 모두 두견화를 가리킨다.

▲ 양모(亮毛)두견. 중국의 두견화로 운남성 등지에서 자란다.
ⓒ <중국야생화훼도보>

두견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진달래는 두견새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두견화를 보고 으레 두견새 울음을 연상하고, 두견새 울음을 듣고 으레 두견화를 연상하였다. 두견화가 필 때 두견새가 울기 때문에 이 두 이미지는 자연적으로 결합되었을 것이다. 화관 안에 참깨 같은 반점들을 ‘두견루’(杜鵑淚)라 했다.

온정균(溫庭筠)은 '금성곡'(錦城曲)에서 “가지 위의 꽃들은 두견새의 피”(花上千枝杜鵑血)라고 노래했다. 잘 알려진 시로는 두목(杜牧)의 「두견」(杜鵑)이란 시가 있다.

杜宇竟何冤, 두우는 대체 무슨 원망이 그리 많길래
年年叫蜀門. 해마다 사천 지방에서 울어쌌는가
至今銜積恨, 지금도 쌓인 한을 가득 물고서
終古吊殘魂. 쓰러진 혼백을 언제까지나 애통해하네
芳草迷腸結, 향기로운 꽃에는 애간장이 닳았고
紅花染血痕. 붉은 꽃에는 핏자국이 물들었구나
山川盡春色, 산과 강은 온통 봄빛으로 가득한데
嗚咽復誰論. 저리도 흐느낌을 그 누가 알아줄텐가


중국의 전설에서는 두견새가 밤새 울다 토한 피가 물들어 진달래가 되었다고 한다. 먼저 두견새에 관한 전설을 알아보자.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촉(사천) 지방에 “어부(魚鳧) 왕이 죽은 후 두우(杜宇)라는 왕이 있었는데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고, 별호를 망제(望帝)라 하였다”고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또 <성도기>(成都記)에도 “망제가 죽은 후 그 혼이 새가 되었는데 이름을 두견 혹은 자규라 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두견(杜鵑)의 ‘두’자가 두우(杜宇)에서 나왔음을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양웅(揚雄)의 <촉왕본기>(蜀王本紀) 혹은 <십삼주지>(十三州志) 등에 좀 더 자세하다. 춘추시대 촉나라의 망제는 홍수가 범람하였어도 이를 다스리지 못하였는데, 재상 별령(鼈靈)이 무산(巫山)을 굴착하여 물길을 빼내어 해결하였다. 이에 망제는 자신의 공덕이 별령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왕위를 별령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그가 죽을 때는 마침 음력 2월이었는데 두견새가 울자 사람들은 망제의 혼이 두견새로 변했다고 믿었다. 이야기로만 보면 망제는 현명한 군주였고, 백성들은 그를 그리워 두견새 이야기를 만들어 낸 듯하다.

그런데 왜 두견새의 울음에서 두목은 “지금도 쌓인 한을 가득 물고” 있다고 한 것일까. 사랑하는 백성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였다고 할 수도 있다. 혹은 일부 사람들은 망제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가 별도로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그러나 고대 문헌의 기록은 지나치게 간략하여 별도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다.

▲ 봉오리들이 모둠발을 딛는 듯하다. 3월 27일 북한산에서 촬영.
ⓒ 서성.

▲ 같은 장소에서 4월 3일 촬영.
ⓒ 서성.

▲ 같은 장소에서 4월 8일 촬영.
ⓒ 서성.

봄날에 듣는 두견새 울음은 정말로 그렇게 슬펐던 것일까. 내가 듣기로는 두견새의 울음은 다섯 음절로 “쪽 쪽 쪽 쪽 쪽”으로 이어졌는데 세 번째와 네 번째 음절이 높고 날카롭다. 고음으로 이어지는 울음은 독특한 리듬을 가지고 있어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쪽박바꿔줘” 혹은 “홀딱자빠졌네”라고 들었다. 중국에서는 “부루궤이취”(不如歸去, 돌아감만 못하다)라 들었던 모양인지 ‘불여귀’(不如歸)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서양의 어느 조류학자는 이를 “that's your choky pepper”라고 기록하였다.

두견새에 관한 우리나라의 설화는 중국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옛날에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작은 바가지에 보리를 퍼주면서 밥을 지으라 했다. 그리고선 가져온 밥을 보고는 지은 밥을 다 어떻게 했느냐고 구박하였다고 한다. 끼니를 걸러 쇠약해진 며느리는 마침내 죽었고 그 혼이 새가 되어 “쪽박바꿔줘”라고 울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진달래가 피고 두견새가 울 때는 춘궁기로 먹거리가 적을 때였고, 민중의 정한이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이야기에는 군주의 슬픔이 어려 있지만, 한국의 이야기에는 며느리의 서러움이 배어 있다.

두견새는 잘 우는 새이다. 밤새 울기도 한다. 조용한 봄밤에 사위가 조용한데 밤새 우는 새 울음을 듣다보면 정말이지 무슨 의지가 있어 그러는 것만 같다. 어떤 아쉬움과 한이 없다면 어찌 저럴 수 있으랴. 차마 말 못할 원망이나 서러움이 있는 것인가… 사람들은 그 울음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었다. 위의 시에서 두목도 자신의 재능이나 진정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뜻을 기탁한 듯하다.

▲ 아파트 입구에 놓여진 진달래.
ⓒ 서성.

이처럼 중국의 시인들은 두견새 울음에서 대부분 비극적인 정조를 느꼈다. 두보는 '두견행'(杜鵑行)에서 “그 소리는 애통도 하여라 입에선 피가 흐르고, 무슨 일을 호소하기에 언제나 그리도 구구한가”(其聲哀痛口流血, 所訴何事常區區)라 하였다.

백거이도 '강에서 나그네를 보내며'(江上送客)에서 “두견새 울음은 곡하는 듯하고”(杜鵑聲似哭)라고 하였다. 당대 말기의 나업(羅鄴)의 '자규 울음을 들으며'(聞子規)를 보자.

蜀魄千年尙怨誰? 촉백(蜀魄)은 천 년 동안 누굴 원망하나?
聲聲啼血向花枝. 소리마다 꽃가지에 피를 토하네
滿山明月東風夜, 산에 보름달 떠오르고 봄바람 부는 밤
正是愁人不寐時. 시름 깊은 사람이 잠 못 이룰 때


참고로 두견새와 혼동되기 쉬운 새로 소쩍새가 있다. 소쩍새도 밤에 큰 소리로 잘 운다. 그러나 그 울음은 “쏙 쏙 쏙” 혹은 “쏙 쏙”으로 세 음절이나 두 음절로 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쏱쩍다”로 들었고, 서양 사람은 “toik toik tatoink”로 기록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고대 문학 작품에서는 두견새와 소쩍새를 종종 혼동하였지만, 오늘날에는 명확히 다른 새로 구분하고 있다. 이밖에 접동새가 있는데, 잘 알려진 김소월의 '접동새'는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라고 우는 것으로 보아 소쩍새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접동새를 소쩍새의 방언으로 같은 새로 친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접동새를 두견새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 꽃 옆에는 역시 새가 가장 잘 어울린다.
ⓒ 서성.

두견새와 진달래는 우리 문학의 소재로도 익숙하다. 특히 현대에 들어서 진달래는 한국 문화를 나타내는 기호의 하나가 될 정도로 내면화되었고 우리 정서의 반영물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깊은 색채와 높은 울림에서 이별의 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기탁하기도 하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이러한 배경과 관련 있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일도 견디기 어렵도록 슬픈 일이다.

기록을 뒤져보면 두견새는 청명 전후에 울기 시작한다. 봄밤에 밤새 우는 새의 울음은 안타깝고 절절하다. 그것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진달래꽃 색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꽃은 색깔로 울고 새는 소리로 그린다.

▲ 휴일이라 아이들이 산길을 나왔다.
ⓒ 서성.

그처럼 붉은 빛깔과 끊임없는 울음은 무엇일까. 동식물학자라면 번식하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짝을 찾고 자신을 보호하는데 왜 다른 많은 새들은 그렇게 울지 않는 것일까.

이에 비해 문학적인 해석은 훨씬 풍부하고 다채롭다. 예컨대 인류가 원시시대에 엄혹한 자연 조건을 이겨냈던 것은 신화적인 상상력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자연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없었더라면 물리적인 환경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화에는 인류의 생존을 받쳐준 강렬한 기억이 있고, 전설에는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깃들어 있다. 꽃과 새에게 우리는 더 풍부한 이야기와 의미를 주어도 좋을 것이다.

▲ 북한산 진달래길.
ⓒ 서성.

오늘날 두견새 울음을 듣기는 어려워졌지만 진달래꽃은 도처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북한산에는 사월 둘째 주가 되면서 진달래가 가장 붉어졌다. 왜 그토록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피는 걸까.

오늘날 진달래꽃에서 두우의 슬픔을 연상하거나 며느리의 한을 되새기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두견새와 연관 짓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북한산 길을 걸으며 나는 고대의 이야기를 진달래꽃의 배경에 놓아두고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통해서 진달래꽃은 더욱 붉어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서성 기자는 열린사이버대학교 실용외국어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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