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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겟집(한생곤 2006년작)
ⓒ 한생곤
지난해 12월 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인사동 길을 걷고 있던 나를 붙잡는 낮은 음성이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서서히 내 시선을 모으는 동안 그는 마치 먼 기억의 풍경에서 갑자기 걸어 나오듯이 나에게 다가왔다.

기억과 현실이 교차하며 잠시 혼선을 빚도록 만든 것은 단지 달라진 그의 묶은 머리와 약간 부은 듯한 얼굴이었을 뿐, 무덤덤한 얼굴 표정과 음성은 그대로였다. 10여년 만에 그와 나는 그렇게 길 위에서 다시 마주친 것이다.

소란스러운 목소리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반가운 안색으로 연락처를 주고 받을 수 있었으련만 나 역시 그저 무덤덤한 몇 마디 대화 끝에 때마침 가지고 있던 내 개인전 엽서를 그에게 건네주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헤매이고 있던 내 소식을 몰랐겠지만 난 이미 그가 '길을 떠난 사람'임을 풍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한생곤 개인전-갤러리 쌈지
ⓒ 한생곤
1990년대 중반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에도 그의 화두는 분명히 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화가 한생곤은 1991년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후 1999년 미술대학원에서 '깨달음의 회화적 수렴에 관한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삶과 예술이 진실하게 만나는 소실점을 찾으려 고뇌했고 2002년 이후 현재까지도 화실겸 숙소인 중고버스 하나에 의지해 전국을 떠돌며 유랑화가로서의 삶을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다.

얼마전 그의 개인전 소식을 인터넷에서 접했다. 토요일 오후, 인파로 가득찬 인사동 거리를 지나 작은 그림들이 걸려있는 '갤러리 쌈지'에 들어서니 화가 한생곤은 한 방문객에게 '그림사인'을 해주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에게 인사를 하기보다 난 그의 그림들 앞으로 먼저 다가갔다.

▲ 가겟집(한생곤 2006년작)
ⓒ 한생곤
장바닥에서의 성화(聖化)

간결하고 투박한 선으로 이루어진 편평한 형태들과 그 형태 안팎의 분별을 거부하는 단순한 색조가 깔려있는 그림들이 전시장 벽면에 지층의 단면처럼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들은 대체로 세부묘사는 생략되었지만 무엇을 파는지 짐작이 가는 작은 가게이거나 소박한 노점상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동네에서 여전히 볼 수 있으면서도 이제는 영악하고 세련된 대형자본의 물결 속에 서서히 쇠락해가는 그렇고 그런 허름한 가게와 노점상들인 것이다.

이런 가게에서 주인들은 그냥 어수룩하게 앉아있거나 행인들을 바라보며 느린 일상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어쩌다 손님들이라도 찾아오면 가게 앞은 잠시 활기를 띠기도 한다. 그러나 가게와 사람이 있는 이 일상적 풍경들은 대체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묵직한 오후같은 고요함을 머금고 있다.

이 단순한 풍경 속에서 우러나오는 묵직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퇴적되고 형성된 곰삭은 아름다움을 가겟집의 일상적 풍경이 발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화면을 좀 더 깊이 응시하다 보면 그 곰삭은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재료의 특성이 적절히 받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란버스를 타고 지구별을 유랑하는 화가 한생곤은 길을 가다 만난 연탄재, 슬레이트, 기와, 숯, 조개껍질, 술병과 같이 하찮은 것들을 보살행이라도 하듯 거두어들여 불로 태운 다음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든다고 한다. 그 가루들이 바로 캔버스 위에 진득한 지층을 형성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수행같은 여로에서 인연을 맺은 자연과 문명으로부터 온 작은 부유물들을 소멸의 제의를 통해 무형화(無形化) 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심미적으로 윤회시키는 불교적 유목주의를 치열하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한생곤은 값 나가는 캠핑카로 이리저리 놀러다니기 좋아하는 '낭만파 고급백수'이거나 요즘 전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초국적, 자본주의적 노마디즘의 흐름을 타고 한 번쯤 튀어보려는 '쇼맨십 강한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먼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 가겟집(한생곤 2006년작)
ⓒ 한생곤
더우기 내 마음에 가득 들어오는 한 그림으로 인해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진다.

시골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부데데한 중년의 아낙네같은 사람이 화면 위쪽에 자리잡고 있고 앞으로는 크고 작은 둥근 용기들이 놓여있는 그림이다. 그 안에는 자신의 텃밭에서 영근 과일과 채소들 또는 먹음직스러운 떡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이들을 쓰다듬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이제 곧 오가는 사람들이 그가 내놓은 양식들을 가져가게 된다.

이 순간 그는 너무나 풍요롭고 평화롭다. 그래서인지 후광을 하고 가부좌를 튼 그 모습이 언듯 화순 운주사의 투박한 돌부처처럼 고즈넉하게 보인다. '장바닥에서의 성화(聖化)!' 바로 그 순간이며 화가 한생곤이 행하는 유목이 '지구별 성지순례'로 도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 가겟집(한생곤 2006년작)
ⓒ 한생곤
진실하게 움직이자!

작품들을 둘러보고나니 화가 한생곤이 나에게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제목이 '길위의 화가 한생곤의 노란버스'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그가 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화가 한생곤이 지은 글과 그림들로 엮어진 이 책속에서 지난 10여년간 그가 고민했던 삶과 예술의 문제들, 그리고 2002년부터 노란버스를 타고 다니며 시작된 쉽지 않은 유랑생활의 절절한 내력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특히 책 속에서 그가 자신의 버스유랑을 '인생의 분갈이인 셈'이라고 표현한 것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그로부터 그간의 넋두리라도 들은 듯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어느덧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되어버렸다. 언젠가 유목의 거처인 그의 노란버스 화실에서 술이라도 한 잔하며 독후감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피곤한 눈을 감았다.

갤러리를 나서는 내 어깨에 그가 슬며시 얹어준 말이 떠올랐다.

"진실하게 움직이자!"

덧붙이는 글 | 한생곤은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1991년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1999년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6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하였으며 현재 화실로 개조한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그리기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여행단상집 '길위의 화가 한생곤의 노란버스'가 있다.

갤러리 쌈지 기획초대/ 한생곤-가겟집
장소/ 갤러리 쌈지(인사동 쌈지길내) 
기간/ 2006년 3월1일 - 20일 
개관/ 오전 11시 - 오후 9시
전화 / 02-736-0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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