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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교사인 저는 이번 여름방학 과제로 "부모님 자서전 대필하기"를 아이들에게 내 주었습니다.

우선 자서전을 대필하려면 어떻게든 부모님과 얘기를 해야 하고, 하다보면 지금의 모습과 다른, 혹은 몰랐던 부모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겠지요.

어떻게 부모님이 자라왔는지, 그 고비와 역경, 좌절과 꿈도 알게 되고요. 그러다 부모님의 사랑도 듣게 되고, 그 당시 모습과 사람들도 알게 될 겁니다. 이 기회에 부모님과 갈등이 있었던 녀석들은 좀 나아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하는 욕심도 생기더군요.

사실 어려운 숙제죠. 제가 해도 어려운 숙제일 겁니다. 내자마자 쏟아지는 아이들의 아우성과 부모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며 떼쓰는 녀석들의 불만을 일거에 수행평가라는 족쇄로 일단 묶어놓고, 하는 방법을 요약해서 인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녀석이 일어나 그러는 거예요.
"선생님, 선생님도 숙제 하세요."

녀석의 당돌한 요구에 제가 벙벙해서 쳐다보니까 녀석이 제 글이 읽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부모님에 대해 썼는지 궁금하다나요. 엉겁결에 저도 방학 숙제를 하나 떠 안고, 개학 전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약속을 지키려고 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숙제보다야 형편없습니다. 사진도 못 붙이고, 내용도 적지만 녀석 덕에 이 과제나마 하게 되어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 또한 부모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다음 이야기를 '어머니의 자서전'을 대필할 생각으로 제가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엄마는 고향이 전남 곡성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 엄마가 서른을 넘기기 전에 돌아가셔서 내게 외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엄마 나이 19살 때 청혼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혼하기 싫은 엄마는 서울로 무작정 도망쳐 왔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어린 처녀가 올라와 처음 비빌만한 언덕이 미리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한 형제들뿐인데 엄마가 서울 상경은 6남매들 중 처음이었다.

결국 찾아낸 친척이 엄마의 사촌언니뻘 되는 점례라는 분이셨다. 그러나 딱한 것은 점례이모와 이모부는 방 하나 딸린 판자집에 살림을 차린 것이어서 엄마가 편히 머물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한 방에서 엄마, 점례 이모, 이모부 셋이 한 방에 잔다고 생각해 보라. 엄마가 얼마나 눈치와 구박을 받았을 것이며, 이모와 이모부는 또 얼마나 불편했을까.

엄마는 첫 직장을 동신제약(?)이라는 제약 및 비누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이모부의 부부관계에 불편을 끼칠까 걱정한 엄마는 회사가 끝나고 12시가 될 때까지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 자정이 되기 바로 전에야 집에 들어갔다.

왜냐면 이모부가 밤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자정이라 그 때부터는 이모부가 집에 없기 때문이다. 방에 마음 편히 다리를 뻗어 보았을까. 방 한 칸 마련할 돈도 없고, 기거할 친한 형제도 없이 서울에 홀로 떨어진 엄마의 심정은 말 안해도 상상이 가는 일이다.

하루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그 날도 엄마는 회사가 끝나고 저녁도 굶은 채 집이라 할 수 없는 그 공간에 들어가기를 피하고 있었다. 너무 늦어 문 열어 달라고 하기에도 미안해진 엄마는 밖에서 밤을 새기 일쑤였다고 한다.

비가 오는 날 거리를 온종일 헤매고 다니다 발견한 것이 벽돌 공장이었다. 쌓아둔 벽돌의 틈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우산으로 비를 가리고 쪼그려 앉아 그 날 밤을 지새웠다. 얼마나 몸과 마음이 고단했을까.

지친 몸 하나 편히 누일 곳 없는 엄마의 젊은 시절이,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얼마나 암담하고 비참한지... 길고 긴 밤이 가고 동이 트면, 그 차림 그대로 엄마는 새벽의 찬 기운을 맞으며 공장으로 향했고, 늙은 수위는 가난한 엄마의 비참한 하루를 아는지 모르는지 늘 가장 일찍 오는 공원이라고 엄마 얼굴을 볼 때마다 말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공장에 딸린 방에서 규칙을 어기고, 몰래 숨어 잠자고 다음날 그대로 공장에 나와 일하는 날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점심을 꼭 싸오도록 했다. 가난한 공원들이 점심마저 굶으면 자기 회사 생산량이 떨어질까 염려해서 수위가 도시락 검사를 매번 했다고 한다. 도시락이 없으면 회사에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말하는 중에도 엄마는 도시락을 싸게 했던 회사가 지금도 원망스러운지 목소리가 높아진다. 집에 제대로 들어가질 못하는 도시락이 엄마에게는 또 얼마나 부담스런 짐이었을 것인가.

당시 점례이모는 엄마에게 아침만 차려 주었다고 했다. 반찬도 없이 그저 매일 콩나물 국에 밥 한 그릇이었다. 도시락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엄만 할 수 없이, 아침을 굶고 국에 있던 콩나물을 건져 고춧가루와 소금만 버믈버믈 부쳐 밥과 함께 달랑 들고 나오곤 했다.

"참기름도 안 뿌리고?"
"얘 좀 봐. 참기름이 어디 있어. 파, 마늘 이런 거 하나 없이 그냥......무쳤지."
"생활비 좀 안 줬어?"
내가 묻자 엄마는 정색을 하며,
"미안해서 월급 통째로 갔다 줬지, 왜. 밤 늦게 가면 저녁 먹었냐고 묻지도 않아. 내가 그 비싼 가루 비누도 갖다주고 했는데. 가루비누가 그 때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바로 나오기 시작해서 얼마나 귀한건데."(엄마는 가루비누 훔쳐다 준 사실은 글로 쓰지 말라고 부탁했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엄마, 사실 이모부나 이모도 무슨 죄야. 친형제도 아니고, 사촌 동생이랑 한 방에서...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엄마도 할머니가 아빠랑 잘 때 같이 주무시게 되는 날은 미워 어쩔 줄 몰랐다고 해 놓고는..."

왜 지난 시절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토록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내야 했는지... 가난이란 말로 변명하기에는 잃은 것이 너무나 많은 세대다.

그런 생활이 1년 가까이 계속된 후에야 엄마는 방을 하나 구해 독립할 수 있었다. 월급 통째로 주는데 돈이 어디 있었냐고 묻자 엄마는 도저히 안되겠어서 월급에서 조금씩 떼고 아껴서 마련한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월급을 떼어 저축하더라도 하루 빨리 나가주는 것이 점례이모측에서도 절실하게 바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방을 얻어 세들어 산 곳이 아빠 집이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만남은 시작되었고 결혼이란(지금은 남들 다하는 것이지만) 절차 하나 갖추지 못하고 엄마, 아빠는 살게 되었다. 엄마, 아빠가 결혼이라는 형식을 가진 것이 40대 어느 쯤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난 그것이 결혼식이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가 학교에 간 평일날을 부모님이 택하셨기 때문이다. 사진 속에서 본, 절에서 몇 몇 친척만 모여 간소하게 올린 의식이 결혼이었다는 사실을 난 나중에서야 알았다. 가난하면 결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 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릴 적 친구집에 놀러 갈 때마다 보였던 웨딩드레스 차림의 친구 부모님 사진이나, 전통 혼례복의 모습이 담긴 결혼식의 증거가 우리 부모님에게는 없었다. 내가 궁금해 물어볼 때마다 어린 내게 엄마는 다 잃어버렸다는 말뿐이었다.

엄마 얘기를 들으면서 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행인 것은 엄마와 나 나란히 불을 끄고 누워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기에 우린 서로의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을 때마다 눈물 때문에 목이 메고 코가 맹맹해졌다.

"엄마, 나 감기 걸렸나 봐."
"여름이라도 바닥이 차서 그렇지. 얇은 이불 하나 깔고 자라."
엄마는 어둠 속에서 이불을 꺼내어 깔아 주었다.
"엄마, 이리 와."
난 엄마를 살며시 당겨서 끌어 안았다.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는데 엄마도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둘 다 소리없이.......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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