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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요새 하는 일은 잘 하냐? 느그 아부지한테 아무리 바쁘더라도 전화 좀 해사 안 쓰겄냐? 아부지 지금은 머실 갔은께 저녁에 꼭 좀 해라이. 시상에 느그 아부지 같은 사람도 없다."

"나사 괜찮하제, 니들이 고생 이제. 이득금은 나오냐? 니들 새끼들 갈치고 할라믄 많이 들 것인디. 그랑께 이사스럽게 해사 된다. 물갠도 너무 많이 갖다 놓지 말고 심 맞게 해사 돼."

어머니의 전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식이 지혜롭지 못할까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새기게 한다.

어머니는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딸 일곱명 중 둘째로 태어났다. 10살 때 외할아버지의 포목 가게가 불이나 재산을 잃고 오사카 인근의 농촌마을에서 12살때까지 살다가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왔다. 한국말도 할 줄 모르는 일본의 이방인 '조센진'이었다. 12살에 한국으로 나와 20살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 셋에 딸 셋을 두고 억세게 살다 지난 2003년 12월 24일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오랜만에 만난 큰 이모에게서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목에 생긴 흉터 자국이 떡 장사하는 외할머니를 따라 옆에서 놀다가 뜨거운 물에 데어 생긴 거라는 것도 알았다. 큰이모의 음색과 어감에서 어머니를 느낄 수 있었다. 형제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동질성이랄까. 가슴이 미어졌다.

음력 1942년 12월 25일 일본에서 한국으로 7일간의 지루한 항해 끝에 외가댁 식구들이 내린 곳은 목포 항구였다. 낮에는 폭격이 있어 밤에만 오다보니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외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함께 지내다 먼저 귀국한 일가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일본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한국에 온 어머니는 큰이모와 학교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일본의 지배하에 있어 한국말을 몰라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해방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우리 말과 우리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한국 말과 글을 몰라 더 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야학에 다니면서 일본말로 토를 달고 한글과 우리말을 배웠다. 3개월만에 우리 글을 배우고 말도 어느 정도 따라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에 야학 3개월이다.

외할아버지는 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외할머니는 아들을 갖기 위해 임신을 했으나 또 딸을 낳았다. 외할머니의 끊임없는 아들에 대한 애착은 결국 막내를 낳고 불과 2개월만에 병을 얻어 특별한 치료도 없이 세상을 뜨게 되었다. 어머니 나이 19살때의 일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외가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5월에 큰이모를 시집보내고 셋째이모를 남의 집 수양딸로 보내며 막내이모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다. 12월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를 만나 시집을 가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새로 외할머니를 맞기 위해 과년한 딸들의 눈총도 피하기 위함도 있었다. 한 해에 네 명의 식구가 외가집을 빠져나왔다.

▲ 이모들과 함께(오른쪽 첫 번째가 어머니)
ⓒ 박인선
어머니의 결혼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15살 때 양부모를 여의고 증조할머니와 두 명의 고모 그리고 말 못하는 벙어리 삼촌까지 모두 다섯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잘 살던 종가의 재산을 침탈 당하자 할아버지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같은 해 할머니까지 세상을 뜨셨다.

증조할머니는 옛날 종가집 종부로서 위엄이 배어 있고 연년생인 두 고모는 매일 같이 아옹다옹거리며 싸움질을 했다. 벙어리 삼촌은 맘에 안 들면 고래고래 두 눈을 부릅뜨고 괴성을 질러댔다. 벙어리 삼촌은 소아마비로 오른팔이 심하게 뒤틀려 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던 탓이다. 아버지는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급한 성미를 감추지 못하고 화를 곧 잘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군대에 입대하였다. 변변치 않은 집안의 새댁인 어머니는 졸지에 가장이 되었다. 동네 너머에 밭 다섯 마지기와 동네우물가의 논 두 마지기. 이것이 다섯 식구의 끼니를 해결할 전답이었다.

어머니는 언덕배기에도 호박과 완두콩을 심었다. 많지 않은 전답에서 얻을 식량이 뻔하기 때문이다. 한 해 쌀 농사를 지으면 이웃에게 꿔주었다. 새댁의 결정치곤 통큰 짓이었다. 그리고 한 끼 한 끼를 품과 노력으로 해결해 나갔다. 쌀 한 가마를 꿔주면 다음 해에 두 가마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5·16혁명이 일어나 사회 개혁 일소 차원에서 고리채 정리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두 집에 쌀을 주었는데, 그 중 한 집이 신고를 해서 한 집에서만 쌀을 받아냈다. 그나마도 어머니의 딱한 사정을 배려한 것이었다.

▲ 손자를 안고 있는 어머니
ⓒ 박인선
이렇게 하기를 삼 년, 아버지는 만기 제대를 하였다. 어머니의 짐이 조금 거두어질 것 같았다. 제대를 하고 나온 아버지는 어머니가 불려놓은 쌀로 저수지 건너 텃논 네 마지기를 사들였다. 고모들도 시집을 보내고 살림도 조금씩 조금씩 불어갔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아이들은 네 살 터울로 여섯을 낳았다.

아버지는 동네 일을 한다는 이유로 바깥 출입이 잦았으며 어머니의 일은 더불어 태산 같았다. 아버지는 어떤 일로 화를 잘 내셨다. 육 남매의 잘못도 모두 어머니에게 화살이 돌아가 속상할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저수지가의 소나무 밑에 앉아 아픈 마음을 달랬는데, 차가운 밤을 지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어떻게 될까봐 따라나서기를 얼마나 했는지. 저수지는 물놀이 사고도 많았지만 삶에 지친 사람들의 도피로 인한 주검들이 발견되곤 했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농사일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증조할머니를 모시는 일에 극진했다. 온 동네가 인정하는 효부였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증조할머니는 세상을 떴다. 어머니의 슬픔이 너무 커 보였다. 초막에 신당을 꾸리고 3년간 매일 정성을 드려 재를 올렸다.

그런 대로 집안살림도 조금씩 불어가고 하면서 모아놓은 돈으로 읍내에다 집을 샀다. 큰 길가에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먼 안목으로 사들인 것이었다. 이렇게 사들인 벽돌공장은 매월 세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처음 외지에 집을 사들인 셈이었다. 내색은 없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뿌듯한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삼촌 걱정을 하였다. 삼촌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에 소아마비로 손까지 구부러져 있으니 누가 짝이라도 맺어주려고 백방으로 혼처를 찾았으나 헛수고 였다. 삼촌에 대한 어머니의 애처로운 마음은 한이 없었다.

"몽달미라도 시켜야 하겠는디. 큰일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면서도 어머니의 집념에 찬 노력은 또 다른 결단이었다. 그날은 읍내 장날이었다. 어머니는 오후 늦은 시간에 동구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 뒤에는 낯선 여자 한 사람이 보따리를 들고 뒤따라 오고 있었다. 늘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어머니의 계획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낯선 여자는 우리 집까지 어머니를 따라 절름거리면서 들어섰다. 삼촌도 낯선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밤이 으슥해질 무렵 아버지는 밖에서 들어왔다. 집안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모르고 밖에서 들어온 아버지는 어머니의 결정에 아연실색이었다.

"이 애팬네, 미쳤구만. 병신을 하나도 부족해 둘이나…."

아버지의 성화는 극에 달했다. 쥐 죽은 듯 적막 속에 아버지의 노여움 찬 목소리는 한참 동안 계속 됐다. 어머니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어머니의 그런 노력의 대가로 삼촌은 꿈에도 못 이룰 배필을 맞게 되었다. 아울러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아버지의 이해도 구해냈다. 어머니는 데리고 온 여자의 머리도 손수 자르고 목욕도 시킨 뒤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인자부터 느그들은 '작은엄매'라고 불러사 된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는 그때부터 삼촌의 혼사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동네에서는 이러고 저러고 말들이 많았다.

"느그 엄매 고생은 한다만 어떻게 살랑가 모르겄다. 모다 짐뎅이제. 몽달미도 좋지만…."
"시방은 메기고 살린다지만 언제까지 하겄소? 내 일은 아니제만 걱정이요."

결혼식은 전통혼례로 치러졌다. 사모관대를 쓴 삼촌은 어느 신랑이나 다름없었다. 동네에선 처음 치러지는 장애인의 결혼식이었다. 여자에게도 원삼 족두리에 연지곤지를 찍고 두 사람의 새로운 출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구경왔다.

동네에는 한 집 건너 한 명 꼴로 장애인이 많았다. 모두들 장애때문에 결혼을 생각지도 못하는 때에 동네에서 가장 심한 장애를 가진 삼촌이 결혼한다는 것은 큰 사건이자, 어머니의 끈질긴 집념의 결과였다.

삼촌의 결혼은 또 다른 숙제일 수 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어머니의 큰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골생활도 우리들의 성장과 함께 정리를 하고 읍내로 이사를 하였다. 어머니는 읍내로 이사오면서 기독교 신앙도 가졌다. 아버지의 반대도 많았다. 우리집은 기독교 신앙으로 많은 변화가 왔다. 형제들은 아버지와 나를 제외하고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또 다른 변화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직장을 마련하고 아래 두 명의 남동생은 목사로 또 한 명은 독일에서 유학중이며 여동생들은 모두 출가하였다. 어머니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이렇게 육남매를 키워냈다.

▲ 여행지에서의 어머니
ⓒ 박인선
어머니의 읍내상황도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틈만 나면 배추, 마늘 뽑는 품을 들면서 쉬지를 안 했다. 이렇게 마련한 밑반찬이며 쌈짓돈은 고스란히 자식들 위해 쓰여졌으며 그런 평생의 생활 때문인지 어머니 몸에 이상이 생겼다.

진찰결과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치료가 어렵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머니는 앞에 닥칠 일보다는 아버지 걱정을 많이 했다. 지난 세월의 응어리는 찾을 수 없었다. 늘 어머니는 그렇게 너그러웠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잘 간호했다. 지난 세월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은 셈이었다.

병원에서 어느 일요일이었다. 시골에서 같이 살던 할머니께서 문병을 왔다. 어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는다.

"목포로 새비젓(새우젓)장사를 갔다가 새비젓도 못 팔고 돈이 없어 배를 쫄딱 굶고 온 것이 엊그저께 같은디 먼 일이다냐?"

지나온 세월에 대한 설움이 복받쳐 온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내색도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기력도 많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 삶은 링거주사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3년 12월 24일 새벽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리는 병실에서 사랑스런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 어머니의 성경과 책갈피 '글'
ⓒ 박인선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항상 올곧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섭섭한 속내도 좀처럼 내보이질 않았다. 어머니의 삶은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의 표상이었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박스종이에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이 어머니의 삶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삶을 나의 어설픈 안목으로 표현하기가 부끄럽다. 화사하게 항상 웃으시던 어머니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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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에서 8년, 예술작업공간을 만들고, 버려진폐기물로 작업을하는 철조각가.별것아닌것에서 별것을 찾아보려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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