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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는 음력 1921년 3월 13일생으로 올해 85살입니다.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김수우남(金壽友男)입니다. 아버지께서 무남독녀인 저의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까닭은 제 밑으로 꼭 아들을 보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았던 까닭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저 이외의 다른 자식을 보지 못해 작은댁을 집에 들여 대를 이을 아들을 보려고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10살이 되기 전까지 아들처럼 키웠습니다. 딸인 저에게 남자 옷을 입게 하셨고, 집안의 크고 작은 대소사에도 참석케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추운 겨울 새벽에도 목욕재계하시고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바위 앞에서, 혹은 유명한 절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 큰아들의 군대 입대를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한명라
친정집 재산을 보고 혼인을 시키다뇨?

저는 학교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집안에서 독선생을 모시고 잠깐 공부를 한 게 전부였지요. 그래서 제 평생의 한은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못 배웠기 때문에 제 열 두 자식들을 비록 잘 입히고 잘 먹이진 못했어도 공부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시켰습니다.

저는 18살 나이에 저보다 한살 아래인 남자와 혼인했습니다. 남편은 전라북도 삼계면 봉현리가 고향으로 당시 남원에 있는 농업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남편은 학교에 다녀야했고, 졸업 후에는 농협에 취직해 정년퇴직할 때까지 근무했습니다.

4남 3녀 7남매 중에 셋째아들이었던 남편은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재주도 많았는데, 시어머니가 저를 며느리로 맞아들인 데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제가 무남독녀이기 때문에 훗날 우리 친정집 재산이 모두 남편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훗날 그런 뜻을 애써 숨기지 않는 시어머니에게 저는 망설이지 않고 대들었습니다. "제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셨습니까? 남보다 다리가 하나 모자랍니까? 손이 하나 없습니까? 왜 우리 친정집 재산을 바라고 혼인을 시켰습니까?" 그렇게 항의하는 저에게 시어머니는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제가 시집살이 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자면 한 권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판단과 행동이 느렸던 게으른 큰동서는 시어머니에 쫓겨나 친정과 시댁을 수시로 오고 가야했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둘째동서, 욕심이 지나쳤던 아래동서. 그런 동서들 속에서 셋째며느리인 저는 날마다 새벽까지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야 했습니다.

또 시어머니께서 시동생 편에 지게로 지워 보낸 시집식구들의 온갖 옷들, 심지어 시집 간 시누이들의 옷까지도 친정에서 장만해 준 재봉틀로 몇 날 몇 밤을 꼬박 새워가며 바느질을 해 줘야 했습니다.

밥 때마다 고방에서 쌀과 보리쌀을 직접 내어 주었던 시어머니는 어쩌면 그렇게 적은 양을 주던지…, 시어른들 밥상을 안방에 들여 넣어 주고 우리 며느리들은 정재 바닥에 앉아서 항상 양에 차지도 않을 밥 한 숟가락을 물에 말아 먹고는 했습니다.

열두 명의 자식을 낳다

▲ 큰아들은 서독에 광부로, 작은 아들은 월남 파병으로, 큰딸은 출가하여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 한명라
저는 20살 나이에 첫딸을 낳았습니다. 딸 다음으로 아들, 딸, 아들, 아들, 아들, 딸, 딸, 딸, 아들, 딸, 딸 이렇게 12자식을 낳았습니다.

모두들 나에게 왜 그렇게 많은 자식을 낳았느냐고 묻고는 하는데, 그 시절에는 가족계획도 없었고, 또 생긴 아이를 억지로 낳지 않으려고 하다가 잘못하여 산모가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대로 낳다보니 5남 7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 12자식 모두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온전하게 잘 자라서 사회에 나가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살아 주는 그것만으로도 "이만하면…"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제 큰 딸이 올해 65살입니다. 저는 딸에게 약대에 진학하라고 했습니다. 행여 제가 그 많은 자식들을 다 거두지 못하고 잘못되어 이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큰딸이 저 대신 동생들을 엄마처럼 보살펴주고 뒷바라지 해 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큰딸은 저의 바람대로 약대에 입학을 했고, 지금도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이 큰아들입니다. 올해 62살인 큰아들은 저의 가장 아픈 손가락입니다. 그 아이는 서울대에 가겠다고 재수했다가 서울대는 아니지만 대학에 합격해 놓고도 끝내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농협에 다니고 있던 남편이 큰 아들의 대학입학금을 준비해 주겠지… 하고 마냥 믿었습니다. 하지만 등록마감이 하루 앞인데도 태평인 남편의 태도에 놀라 뒤늦게 등록금을 마련하여 다음날 아이를 들쳐 업고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면서 대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등록마감이 30분 지났다고 끝끝내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 또 다짐을 했지요. 이제부터 아이들 교육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로 남편을 믿지 않겠다고요. 또 아이들 학교 입학금만은 빚을 내어서라도 미리 미리 준비하겠다고요.

'아버지' 역할 포기한 남편

▲ 15년전, 칠순잔치때 12남매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 한명라
언젠가 봄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 남편과 그 많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던 때였습니다.

저는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화전놀이를 다녀와서는 한잔 술에 취했습니다. 그때 안방에 누워 저의 양쪽 팔에 열한째와 열두째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희 둘만 있다면 이렇게 양쪽 팔에 꼭 끼고 새처럼 날아가고 싶구나… 새처럼 훨훨…." 그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도 똘망똘망한 그 자식들이 이 어미 속을 썩이지 않고 공부도 곧잘 해서 저는 힘들어도 그 모진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고향에서 100여리 떨어진 전주까지 기차 통학을 하는 아들들을 위해서 저는 14년 동안 새벽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자식들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게 해 달라고 새벽이면 제일 먼저 부뚜막에 정안수를 떠 놓고 기도를 했고, 아무리 추운 겨울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도 새벽기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 벌써 8년이 흘렀습니다. 제 생일날 모처럼 12남매가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 한명라
그런 저와는 반대로 남편은 자식들 교육에 있어서는 아예 남보다도 못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자식을 둔 탓에 아예 아버지의 자리를 포기했는지, 시댁식구들과 한편이 되어 딸년 대학교에 보냈다고 어찌나 저를 구박하던지요. 남편은 "자식들 국민학교만 졸업시키고 딸들은 식모살이 보내고, 아들들은 머슴살이나 보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남편의 월급이 얼마였는지 모릅니다. 우리 집 대청마루에 커다란 뒤주가 2개 있었는데, 그 뒤주에 쌀이나 보리쌀을 단 한번도 가득 채워 보질 못하고 살았습니다. 외상 쌀을 갖다 먹다가 남편이 몇 푼 던져주는 돈으로 그 외상값을 갚고 나면 또 다시 외상 쌀을 가져다 먹어야하는 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친정집에 손을 벌려 친정의 전답을 팔아서라도, 아니면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아니면 빚을 내서라도 자식들 공부만은 때를 놓치지 않고 시켰습니다.

저는 딸들도 아들 못지않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여자도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테고, 남편만을 의지하고 이끌려 살아가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길 바랐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보니 12자식 중에서 8명은 대학을 다녔고, 4명은 고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개중에는 저희들 스스로 돈을 벌어서 야간대학을 나온 자식도 여럿 있습니다. 모두들 이 어미의 고생을 알아주었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들 스스로 결정을 했습니다.

손자 손녀만 스물아홉입니다

이제는 12자식 모두가 짝을 찾아 결혼을 하였고, 저에게는 손자, 손녀가 무려 29명이나 됩니다. 증손자, 증손녀도 2명이나 됩니다. 또 앞으로 시집, 장가를 가야 할 혼기가 꽉 찬 손자, 손녀도 여럿이나 있고요.

지난 4월 22일은 제 85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그때 9명의 자식들이 주말을 이용하여 먼 길을 찾아와 생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막내딸의 막내딸(외손녀)이 제가 다리가 아파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는 "외할머니한테 지팡이를 선물로 주자"고 하는데, 어찌나 그 마음이 예쁘고 기특하던지요.

▲ 시간 날 때마다 혼자서 한문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한명라
창원에서 온 열한째는 저에게 읽어보라고 조정래씨의 소설 <한강> 10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차근차근 읽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시간이 나는 대로 책들을 읽습니다. <남부군> <태백산맥> <혼불> 등…. 그리고 시간이 나는 대로 아이들이 쓰다버린 노트에다 한문공부를 한지도 8년이 넘었습니다. 제 나이가 비록 85살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나이에 연연해하지 않고, 평소에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전생을 믿고, 윤회도 믿습니다. 때문에 제가 죽고 나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이제까지 하고 싶어도 못해 본 공부를 원도 끝도 없이 마음껏 하고 싶습니다. 또한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 12자식들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때에도 이생에서처럼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고 싶습니다.

이제 제 나이는 결코 적지 않은 85살입니다. 이 나이에 제가 무슨 욕심을 더 부리겠습니까. 하지만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작은 소원 몇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취직시험을 준비하는 큰손자가 하루 빨리 원하는 대로 취직시험에 합격을 했으면 좋겠고, 12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딸만 둘인 막내아들이 아들 하나를 더 낳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한 바람도 있습니다. 30년 전 친정어머니께서 3년 동안 치매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나셨는데, 저는 제발 치매에 걸리지 않기를… 그래서 자식들에게 어떤 짐도, 고통도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67년을 넘게 살아 온 남편이 저보다 단 하루라도 먼저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어찌되었건 남편이나 제가 자식들에게 아무런 짐도 되지 않고 편안하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젊어서는 제 속을 무던히 썩였던 남편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옆에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요즘에는 자주 듭니다.

내 언젠가는 원도 한도 없이 세상을 훌훌 떠나게 되겠지만, 우리 자식들 가장 가까운 곳에 언제나 푸른 나무로 남고 싶은 것이 저의 또 다른 소원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한명라 기자는 김수우남 여사의 5남 7녀 중 11번째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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