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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영정사진이라며 시아버님께서 손수 준비하신 사진.
ⓒ 김정혜
나는 청주한씨 문정공파 30대손으로, 1935년 3월 2일. 충청남도 서산군 음암면 수석리 1구 343번지에서 3남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 당시, 큰 부유층은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그리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집안일을 돕는 남자 일꾼이 두 명 그리고 여자 일꾼이 두 명 있었고, 위로 두 형과 내게 독선생(가정교사)을 따로 두어 한문공부를 시켰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조금은 넉넉한 형편이었던 것 같다.

공을 차고 놀 정도로 넓은 앞마당엔 커다란 우물이 있었고, 개나리며 측백나무가 긴 울타리를 만들어 사시사철 아름다운 우리 집 뒤론 어른 둘이 팔을 벌리고서야 다 껴안을 수 있을 만큼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버티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집 앞으로는 논과 밭이 광활한 벌판을 이루며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낫으로도 찍어 잡을 정도의 큰 잉어가 살고 있던 100여평의 아주 큰 연못도 끄트머리쯤에 있었다.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아무 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출생신고가 늦어지는 바람에 1944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2학년이 되던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왕매를 잡는다고 용국이네 감나무에 올라갔다 그만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던 일, 부엉굴 산 근처에 사시던 곰섬 할머니 집 뒤에 있는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서 밑으로 던졌는데, 밑에 있던 상기가 따가운 밤송이를 놓쳐 눈을 맞추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실명을 하였던 일, 재연이와 사소한 시비가 붙어 서로 치고받는 도중에 재연이의 머리가 소뿔에 부딪혀 피가 났고, 그 일로 혹시 재연이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 혼을 낼까 겁이 나서 밤새도록 짚더미 속에 숨었던 일,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인 것처럼 기억이 새롭고, 가슴이 떨릴 만큼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더욱이 그때 그 친구들 중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이도 있으니 인생무상함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 부족함 없는 풍요로움 속에서 천진하게 뛰어 놀던 그때 그 시간 속에도 아픔도 있었다. 언제나 자리에 누워 계시던 내 어머니였다.

다리 습진을 심하게 앓으신 어머니는 백지장보다도 더 하얀 얼굴로 언제나 자리에 누워 계셔야 했기에, 늘 안방 문을 활짝 열어 놓고선 우리 형제들이 마당에서 뛰어 노는 걸 쓸쓸하게 바라보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위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무당을 불러다 경을 읽으며 앞마당에서 굿을 했던 기억도 난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어머니가 가여워 보였던 건, 아마도 내가 철이 들고 있다는 증거였는지도 모르겠다.

1950년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이 동네로 쳐들어오고, 마을사람들은 이곳저곳 몸을 숨기고 보따리를 싸서 피난가기에 바빴다. 우리 집도 6·25의 총칼은 겨누어졌다. 나는 소년단에 의무적으로 가입을 할 수밖에 없었고, 작은 형은 반동이라는 명목 하에 북한군에 끌려가 죽을 만큼 매를 맞고 거의 반죽음이 되기도 하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큰 형은 운산면에 사시는 고모님 댁으로 피신을 하였다가 다시 개심사로 몸을 숨기셨다. 6·25전쟁은 당시 국방군 소위였던 내 매형을 앗아갔다. 공산군 자위대에 끌려간 매형은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여 바다에 버려졌고, 썰물에 떠내려갔다 다시 밀물에 의해 밀려와 그나마 시체를 찾을 수 있었다. 기적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잠잠해지고 우리 집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1953년 나는 뒤늦게 서산중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그해 가을 서울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그건, 집안에 공무원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꿈 때문이었다. 그즈음 어머니의 병은 많이 악화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용하다는 의사가 있다면 그곳으로, 귀신 같이 잘 듣는 약이 있다면 그곳으로, 낮밤을 구별 않고 육지와 바다를 구별 않고 헤매고 다니셨다. 그로 인해 꽤 많던 가산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여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엔 이미 재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결국 나는 대학을 포기하였고, 1959년 공군에 자원입대를 하여 곧바로 군대를 가게 되었다. 간식으로 받은 단팥빵을 취침나팔이 불고도 한참이 지난 뒤에 나는 이불 속에서 먹곤 했다. 둥그런 단팥빵 속으로 내 고향마을이 보였고 내 부모님의 얼굴도 보였고 내 형제들의 얼굴도 보였다. 그것을 우걱우걱 씹으며 내 고향, 내 부모 형제에 대한 가슴 절절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가 가까워질 무렵. 홍수가 져서 갈산과 홍성사이 쌍 다리가 침수되는 일이 생겼다. 혹시 나는 미귀(늦게 귀대하는 것)를 할까봐 하루 먼저 집을 떠났는데 비록 우비는 입었지만 억수 같이 쏟아지는 장맛비는 어느새 나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장밧비 속을 뚫고 해미를 거쳐 고북까지 묵묵히 걸었던 일이 기억난다.

그 후 나는 영등포구 대방동 성남고등학교 앞에 위치한 제2훈련 시설전대로 배속이 되어 1개월간 전기기술을 습득하여 김포 11전투비행단 시설대대에서 전기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때 우리 조 반장이던 강 하사와 내가 3300볼트 고압선에 올라가서 전기공사를 하다 감전이 되는 사고가 생겼다. 오후에 휴가를 나가려고 무척 들떠 있던 강 하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나는 부상을 입었다. 지금도 내 귀 뒤에는 그때 그 사고의 상처인 커다란 흉터가 남아 있다. 그 흉터를 볼 때마다 불행하게 죽어야 했던 강 하사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한 나는 곧바로 서산군 원북면 양산리가 고향인 아내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곧바로 현 삼성생명의 모체인 동방생명에 입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2년간 근무를 하던 나는 '집안에 공무원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늘 말씀 하시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경찰전문학교에 시험을 보게 되었고, 운 좋게도 10대1이라는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하였다.

경찰교육을 마친 나는 1963년 10월 4일 마포경찰서 공덕파출소에 첫 배정을 받았다. 그 후 아현파출소, 마포파출소를 거쳐 시경 기동대, 동대문 경찰서 형사과 남대문 경찰서 수사과 서부경찰서 수사과 등 여러 기관을 거치며 경찰생활을 하였다.

내가 이 시절을 돌이킬 때마다 아내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어려운 사람을 그냥 스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내 월급봉투는 언제나 아내의 손에 건네지지 못하였다. 범인을 잡고 보면 구구절절한 그 삶의 애환이 가슴 아파 그 식구들에게 쌀을 사다줘야 했고, 연탄을 사다주어야 했고, 자식들 공납금을 납부해 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내가 그렇게 정의의 만용을 부리고 있을 때. 내 아내는 봉투에 풀을 붙였고, 옷에다 수를 놓아야 했고, 식당에 가서 설거지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그런 어려운 생활을 감내하면서도 아내는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어 그 불평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내가 내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을 한 일이 있었으니….

바로 김신조 사건이 터졌을 때였다. 종로서장 최규식이 자하문에서 김신조 일당을 불심검문하던 차에 교전이 발생하였다. 그때 나는 서울 경찰청 기동대에 적을 두고 있었기에 당연히 비상사태에 봉착해 있었다. 그 시간 아내는 맏자식인 기범이가 폐렴으로 죽음을 맞고 있는 불행을 혼자 감당하고 있어야 했다.

병원이라도 제대로 다녔더라면 결코 자식을 가슴에 묻는 일은 없었을 거라며 아내는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결국 나는 정의에 불타는 내 소명의식으로 인해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아내의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후에 나는 2남 1녀의 자식을 두면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간 맏자식에 대한 아픈 기억을 지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건만 결국 지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2남1녀의 자식들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먼저 보낸 자식에 대한 애끓는 부정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 점점 더 큰 자리를 만드는 시퍼런 멍 자국을 만들게 했다.

그 후 나는 복막염과 늑막염으로 인한 큰 수술을 몇 차례 받으면서 10여년 몸 담았던 경찰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찰직에서 물러나기 몇 해 전인 1971년, 임종을 맞으신 아버님은 생전에 당신의 원을 풀어줘서 고맙다며 이 막내 자식의 손을 꼭 잡아주시곤 눈을 감으셨다.

몇 년 동안 큰 수술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나에게 건강을 찾아준 사람은 역시나 아내였다. 사방팔방 다 헤매고 다니며 내게 좋다는 약은 다 구해다 먹여준 아내 덕분에 새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 후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나는 일선 경찰에서 몸담았던 경험들을 되살려 '일반 행정사. 한상우 사무실'이란 간판을 걸고 소위 말하는 대서소를 개업하여 지금껏 해오고 있다.

처음 내가 대서소를 개업하였을 때는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거의 매일 점심 먹을 사이도 없이 손가락에 진물이 날 정도로 타자를 쳐야 했다.

그러던 중 1987년. 평생을 지병으로 늘 자리에 누워만 계시던 어머니께서 기어이 운명을 하셨다. 임종을 맞으신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이 막내자식이 다시 살아나 밥벌이라도 하는 걸 보고 눈을 감으신다며 아주 편안하고 온화한 얼굴로 자는 듯이 편안한 임종을 맞으셨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대서소의 한때 문전성시는 아련한 추억 속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지금은 겨우내 용돈벌이나 하고 있으니 그나마 이 나이에도 어딘가에 적을 두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 내 나이 70. 2남1녀의 자식들도 다 분가를 시켜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지만 다들 그런 대로 다복한 가정을 꾸리며 열심히들 살고 있는 모습에 나는 또한 감사한다.

얼마 전 4월 2일 나는 칠순잔치를 하였다. 요즘 자식들이 다들 어려운 눈치여서 잔치는 필요 없고, 그저 식구끼리 모여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하였지만 내 자식들은 일가친척 그리고 내 평생지기 친구들을 불러 모아 고맙게도 잔치를 해주었다.

그날 나는 아내와 나란히 앉아 내 두 아들과 두 며느리. 그리고 딸과 사위의 절을 받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두 손녀에게도 절을 받았다. 그 순간에 내 70평생이 그래도 나름으로는 참 행복하였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의 뜻이기는 하나 그래도 젊음의 피가 한창 용솟음칠 때. 투철한 사명감으로 경찰생활을 하였었고, 그때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미력하나마 도움 될 일을 하면서 내 노후를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또 요즘처럼 이렇게 화창한 봄엔 인천 앞바다를 찾아 새우 꽃게 돌게 설게 망둥이들을 잡아 가까운 친척들이나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또 일상의 행복을 맛보고 있다. 내 70인생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70이란 숫자를 거부하고 싶다. 왜, 아직도 내 마음은 뜨거운 피가 펄펄 끓는 20대 청춘이니까.

70이란 숫자를 거부하고 싶다는 마지막 말씀을 끝으로 아버님은 당신의 70평생 이야기를 마무리 하셨다. 보름여 나는 결혼 후 처음으로 아버님께 참으로 오랫동안 그리고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순간은 웃으며 어느 순간은 눈물을 흘리며 나는 그렇게 아버님의 긴 인생이야기를 들었다.

경찰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은 부분에서는 평소 그렇게 무뚝뚝하시던 아버님께서 어머님의 손을 가만히 잡고 "당신 고생했어"하시며 뒤늦은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하셨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말씀 하시는 대목에선 기어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고, 큰며느리 작은 며느리를 맞는 대목에선 기쁨에 들뜬 흥분이 고스란히 묻어났었고,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 또 외손녀가 태어났을 때는 당신 자식들을 낳았을 때보다 더 기뻤다고도 하셨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나는 아버님께 꾸중 아닌 꾸중을 들어야 했다. 아직까지 아들 손자를 안겨 드리지 못한 며느리의 못다한 본분으로 인해서였다. 아버님께서는 긴 이야기를 마치면서 소원 두 가지를 말씀 하셨다.

하나는 나나 동서가 어서 빨리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당신에게 안겨 주는 일이라 하셨고, 또 하나는 어머님과 한 날 한 시에 눈을 감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여 아마도 내게 글 쓰는 재주가 있나본데 그 뒷받침을 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우리 시아버님. 당신 말씀처럼 70이란 숫자를 거부하고 싶으실 만큼 젊게 사시는 분이시다. 아직도 빨간색이나 노란색을 좋아 하셔서 그런 옷들로 또 모자로 멋을 내는 분이시다.

결혼한 지 7년째. 해마다 며느리의 생일날엔 화장품 선물을 잊지 않으시고 결혼기념일은 오히려 우리 부부보다 더 챙기신다. 왜냐하면 그날은 우리 부부에겐 결혼기념일이지만 당신에겐 자식이 하나 더 생긴 날이니 당신께도 소중한 날이라며 꼭 기억을 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라며 잊지 않고 전화를 해주신다.

바라건대 아직도 젊은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사시는 시아버님의 일상이 내내 즐겁고 행복하셨으면 하는 소원을 가져보며, 끝으로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부모님 자서전 대필'을 준비하면서 시아버님과 함께한 그 시간들이 내겐 결코 잊을 수 없는 시아버님과의 좋은 추억이 되었음에 감사한다.

덧붙이는 글 | - 부모님 자서전 대필 응모 원고입니다.

- 오늘도 변함없이 남루한 대서소 사무실을 지키고 계실 시아버님을 생각하며 결코 부끄럽지 않은 우리 아버님의 맏며느리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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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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