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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쥐 두 마리가 담장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은 달개비꽃
ⓒ <야생초 편지>
가끔 사람들로부터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듣는다. 읽었던 책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읽을 사람과 연결지어 본다. 선뜻 떠오르는 책이 없어 머뭇거리고 만다. 책을 가까이 하려 노력한 지도 20년이 넘어섰는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변명을 하자면 좋은 책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지만 읽고 난 뒤 추천하여 주고 싶은 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읽을 만한 책이네'하고 그칠 때가 많았다.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책은 어떤 책일까? 대학 다닐 때는 리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로 사회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하여, 송건호 선생님 외에 여러분이 쓰신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으면서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국어국문학 공부를 하면서 이오덕 선생님의 <시정신과 유희정신>, 조동일 선생님의 <한국문학통사>, 려증동 선생님의 <한국어문교육>, 김수업 선생님의 <국어교육의 길>과 <배달말꽃> 등이 나를 이끌어 왔다.

이러한 것을 밑바탕으로 하여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한지 17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읽었던 많은 책들이 앎을 더해주고 깊이를 채워 준 것이라면,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는 바로 지금 내가 교사로서 어떤 태도로 아이들 앞에 서야 하는지 일깨워준 책이다.

<야생초 편지>는 지은이가 교도소 생활하면서 야생초들을 관찰한 기록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야생초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가치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자연의 이치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는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가 관찰한 야생초들을 직접 그려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야생초에 대한 인상을 독자들에게 뚜렷이 심어 주고 있다. 또한 교도소에서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글쓴이는 화려한 아름다운 꽃들을 다 버려두고 왜 하필 야생초에 관심을 가졌을까?

▲ 만을 다스리는데 교훈이 되는 딱지꽃
ⓒ <야생초 편지>
"내가 야생초에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 속의 만(慢 : 자신이 남보다 훌륭하다고 망상하여 남에게 뽐내려 드는 방자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도 숨어 있다. 인간의 손때가 묻은 관상용 화초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이나 교만이 야생초에는 없기 때문이지. 아무리 화사한 꽃을 피우는 야생초라 할지라도 가만히 십 분만 들여다보면 그렇게 소박해 보일 수가 없다. 자연 속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있을지언정 남을 우습게 보는 교만은 없거든."(102쪽에서)

언젠가 나에게도 만이 있다는 걸 알고 놀랜 적이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이 '만'은 가장 경계 대상의 하나이다. 가르치기 위해 배워야 한다. 흔히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는데 만을 가지고서는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칠 수 없다. 나 또한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만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깨달음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감명을 준 것이 책의 마무리 부분에 있는 잡풀의 뜻매김이다. 에머슨이라는 학자가 '그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로서 반성과 아울러 많은 깨우침을 준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눈에 드러나는 현상으로 아이들의 가치를 매겼던 것을 반성한다. 점수가 조금 낮았던 아이들에게 관심을 적게 가졌던 것을 반성한다. 점수의 가치가 바로 아이들의 가치였다. 아직 아이들이 지닌 가치를 내가 찾아내지 못해서 그렇지 분명히 아이는 자기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을 반성한다.

아이들의 숨어 있는 가치를 찾아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을 17년이 지난 이제야 깨닫는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우리 반 아이들이 피구를 하고 있었다. 교실에서 늘 짓눌려 있는 아이들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뛰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그 모습을 잠깐 동안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몸도 조그마한 아이가 공을 잡고 던지는데 힘이 넘쳐 난다. 몸도 재빠르게 움직인다. 저 아이에게도 저런 점이 있었나 하고 넘어갔다.

몇 달 뒤 수능 시험을 치르고 난 뒤 그 아이에게 수능 점수를 물어 보니 그렇게 좋은 점수가 나오질 않았다. 아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너 체육학과에 갈 생각이 있느냐?"
"지금 해도 늦지 않겠습니까?"
"조금 늦었지만 한 달 동안 별 할 것도 마땅히 없으니 몸을 튼튼하게 한다는 생각으로 체육 한 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

체육 선생님에게 데려가 물어보니 한 번 해보자며 아이를 데리고 운동장으로 간다. 그 날부터 아이는 자기가 늦게 출발하였음을 알고 조금도 쉬지 않고 정말 죽어라 연습을 한다. 이 아이는 모 대학 체육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 우리나라의 가장 민중적인 야생초 가운데 하나인 쇠비름
ⓒ <야생초 편지>
17년의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이랬던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 대한 가치 판단을 너무 쉽게 하였다. 그리고 그 잣대가 너무 고정되어 있었다. 숨어 있는 아이들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지금보다 조금 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가치가 드러날 때까지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잡초는 원치 않는 장소에 난 풀들, 잘못된 자리에 난 잘못된 풀이 아니라 아직 그 가치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

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황대권 글.그림, 도솔(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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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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