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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두 황실

중국을 말할 때 곧잘 거대하다는 수식어가 붙는다. 홀로 거대할 수는 없기에 거대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여러 것들이 모여 하나가 되었을 때 거대함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다른 여럿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 둘 수 있을까?

중국은 한족을 비롯한 56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그런데 56개의 민족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까? 하나로 묶기 위해 중국은 어떠한 정책을 펼쳤을까?

북경의 자금성과 승덕의 피서산장 두 곳을 둘러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이러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자금성에서는 중화의 힘을 상징하는 웅장함을 맛볼 수 있는데 비해, 피서산장에서는 소수 민족을 달래어 중화로 안길 수 있도록 하는 넉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거대한 중국을 만들지 않았을까?

중화의 강한 힘을 과시하여 중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모습과, 또 한편으로는 각 민족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여 주며 끌어안는 모습이 두 황실의 모습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러한 정책은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중국은 이 두 정책으로 거대한 중국을 오늘까지 이끌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웅장한 자금성

자금성은 하늘의 천제가 거주한다는 ‘자미단(紫微壇)’에서 ‘자(紫)’를 따고, 역대 제왕의 궁성은 일반인들은 들고 날 수 없다는 ‘금지(禁地)’에서 ‘금(禁)’을 가져와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름에서부터 황제의 위엄이 묻어 있다.

자금성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게 된다. 자금성은 전체 면적이 72만㎡의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남북 길이 960m, 동서 길이 750m에 방이 8886칸이나 되고, 거대한 궁전을 높이 9m나 되는 성벽이 둘러싸고 있어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마지막 황제>라는 영화에서 황제가 된 부의가 바깥 세계와 단절되어 자기 나라가 망한 것을 모른 채 갇혀 살아갔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이러한 자금성을 하루에 다 둘러보기는 힘들다. 몸도 못 따라갈 뿐만 아니라 앎도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자금성에 처음 왔을 때 그저 멋모르고 그 규모에만 감탄한 나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번에 다시 오면서 자금성의 상징인 태화전, 내정의 중심지인 건청궁 그리고 황후가 머물렀던 교태전 이 세 곳에 눈길을 주었다.

태화전은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답게 그야말로 웅장하다. 황제의 즉위식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황제가 주관하는 국가의 모든 중요한 행사는 이곳에서 열렸다. 태화전 앞마당은 말 그대로 운동장보다 더 큰 하나의 광장이다. 그 큰 광장에서 황제 앞에 머리 조아린 신하들의 거대한 대열을 상상하여 보니 황제의 힘이 그대로 와 닿는다.

그 광장에 들어서는 외국 사신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낯선 땅이라 조심스러울 진데, 그 광활하고 웅장한 규모에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흥선대원군도 자금성의 웅장함을 보고 우리 왕실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에 무리하여 경복궁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 태화전 안의 화려한 모습
ⓒ 정호갑
건물의 크기도 크기지만 건물 안의 모습 또한 화려하고 웅장하며 장엄하다. 천장에는 거대한 금빛 용이 여의주를 물고 용상을 호위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아홉 마리 용으로 장식한 화려한 금빛 보좌와 그 보좌 앞으로 금을 입힌 거대한 6개 기둥, 그 기둥에 새겨진 용들의 모습은 실로 황제의 위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태화전이 자금성을 상징하고 중화의 힘을 밖으로 과시하는 것이라면 건청궁은 황제의 기본 생활이 이루어지며 정무를 처리하는 내정의 중심이다. 옥좌 뒤에 있는 '정대광명(正大光明)'이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바른 것을 밝힌다.' 통치의 기본은 바른 데서 출발한다. 윗물이 맑아야 하고, 그 맑음으로 통치하여야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들이 편안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건청궁은 현 내정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는 곳이기도 하다. 치열한 황위 다툼을 방지하고 황자들의 기량을 더 높이기 위해 다음 보위를 이어갈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청궁 보좌 뒤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 건청궁에 걸려 있는 정대광명(正大光明)
ⓒ 정호갑
황제는 평소에 황자들의 능력과 품성을 살핀 후 대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해 그 이름을 적어 옥좌 뒤에 있는 상자에 보관하고 또 한 장은 자신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황제가 서거하면 두 쪽지를 대조한 후 대통을 이을 새 천자의 이름을 공포하였다.

교태전은 건청궁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 강희제가 직접 '무위(無爲)'라고 쓴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무위는 도가에서 나온 말인데 <두산세계대백과>에서 무위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 유가(儒家)는 목적 추구의 의식적 행위인 유위(有爲)를 제창하였으나, 도가는 이를 인간의 후천적인 위선(僞善)·미망(迷妄)이라 하여 이를 부정하는 무위를 제창하였다. 또 역설적으로 ‘무위에서야말로 완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곧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나,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위의 위(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무엇을 이루는 것이다)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담긴 무위를 왜 교태전에 걸어 놓았을까?

▲ 교태전에 걸려 있는 무위(無爲)
ⓒ 정호갑
피서산장의 포근함

승덕의 옛 지명은 열하(熱河)였다고 한다. 열하라는 말은 뜨거운 물이 흘러나와 겨울에도 얼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온천이 솟아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열하라는 표지만 자연석에 남아 있을 뿐 그곳에서 뜨거운 물은 솟아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열하라는 지명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로 많이 알려져 있어 친근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름에서 느끼는 가까움도 있겠지만 사실 이곳은 황량하고 광활한 북경과는 달리 한국 지형과도 매우 비슷하다. 승덕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포근함이 느껴진다.

북경의 무더위를 피해 황제들이 4월에서 9월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여기서 쉬면서 자연을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6개월 동안은 이곳에서 직접 정치를 하였다. 어쩌면 더위를 피해 왔다기보다는 소수 민족을 견제하고 달래주기 위해 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곳은 북경 다음 가는 제2의 정치 중심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는 정치는 북경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것을 궁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정치는 힘으로 굴복시키기보다는 달래주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 담박경성전 안의 모습
ⓒ 정호갑
피서산장은 청나라 강희제 때 세운 궁으로 1703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792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니 90년에 걸쳐 이룩한 거대한 공사였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를 하였다는 것 자체가 단순히 더위를 피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자금성의 8배나 되지만 자금성처럼 웅장하거나 장엄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 꾸밈이 전혀 없는 담박경성전
ⓒ 정호갑
피서산장은 궁전구(宮殿區)와 원경구(苑景區)로 나누어진다. 먼저 궁전구의 정궁인 담박경성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황제가 정무를 보며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였던 곳이다.

최고의 건축용 목재인 남목(楠木)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300여년 세월이 흘렀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맑은 향기가 아직 가득하며, 바닥은 중국 남부의 대리에서 운반해 온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화려한 꾸밈은 전혀 없다. 그저 단아하고 고졸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느껴진다.

경원구는 호수와 평원 산림으로 나누어지는데 인공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자연미가 그대로 느껴진다. 경원구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경치를 조성하여 황제가 연회를 베풀거나 자연을 감상하고 때로는 수렵을 할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지금도 이곳에는 사슴이 뛰어 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뱃놀이를 하며 자연을 즐기고 있다.

▲ 피서산장 호수의 모습
ⓒ 정호갑
피서산장 밖으로 여덟 개의 사찰이 있는데 이를 외팔묘라 한다. 이 외팔묘에서 북경 자금성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정책을 느낄 수 있다. 외팔묘는 소수 민족 사원이다. 소수 민족의 종교와 예술을 그대로 인정하여 주며 그들을 달랬다.

특히 북으로 몽고를 견제하고, 서로 티베트 독립을 막기 위해 티베트의 법사들을 존중하여 주는 정책으로 그들의 사원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보령사나 소포탈라궁에 가면 마치 티베트에 온 착각이 들 정도로 티베트의 사원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 보령사에서 복을 비는 많은 사람들
ⓒ 정호갑
중국 황실의 두 얼굴

자금성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중화의 힘으로 소수 민족을 다스렸다면, 피서산장은 소박 단아함으로 그들의 무위이치(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린다)를 엿본다.

자금성의 웅장함과 피서산장의 포근함 바로 이것이 중화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아닐까? 중국 곳곳에 다니다보면 엄격집법(嚴格執法)이라는 낱말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법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척 감싸 안아주어야 한다. 자치구를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여 주며 껴안고 있다. 이러한 조절이 통치자의 몫이리라.

이 두 곳을 둘러보면서 중국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흔히들 중국에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는 표현을 곧잘 쓴다. 될 것처럼 쉬워 보이는 것도 잘 되지 않으며 되지 않을 것도 뜻밖에 쉽게 풀리어질 때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하나의 잣대가 아니라 그 잣대와 모순되어 보이는 또 하나의 잣대가 더 있는 것 같다. 상황에 따라 그 잣대를 잘 살리는 길이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두 황실을 둘러보면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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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행복에서 물러나 시골 살이하면서 자연에서 느끼고 배우며 그리고 깨닫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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