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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 오신 뒤 근 반년 만에 아저씨가 집에 오셨다. 여든셋의 나이에도 다른 노인분에 비해 정정하셨는데 "올해는 집 밖을 나서는 것이 두렵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몸과 마음 모두 많이 약해지신 듯했다.

아저씨가 오시자 엄마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해졌다. 아저씨는 일주일 가량 우리집에 머무시며 엄마의 말동무도 되고 식사와 약도 챙기시며 엄마를 돌봐 주실 것이다.

무도장에서 처음 만난 두 노인

천원에 국수까지 줘서 노인들이 주로 다닌다는 청계천의 어느 '무도장'에서 두 분이 처음 만난 게 아저씨가 74세, 엄마가 69세였을 9년 전이라고 한다. 엄마에게 춤을 가르쳐 주는 춤선생으로 아저씨와의 만남이 시작된 이후, 때로는 벗으로 또 때로는 연인으로 춤도 추러 다니고 놀이 공원이나 꽃 축제에 함께 놀러 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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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칠순 잔치에서 아저씨와 우리 가족들의 첫 대면이 있었다. 그 후, 아저씨는 집으로 놀러와 엄마와 고스톱도 치고, 내가 당시 근무하던 회사로 엄마와 함께 오셔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외부에 있던 어느 날은 사무실로 찾아와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당시 내게 연락한 직원이 "어머님, 아버님이 지금 기다리고 계신다"고 해 졸지에 아버지가 생겼다며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도 난다.

언니들은 평생 곁눈질 안하고 자식들만 챙기던 엄마의 외도(?)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집으로 놀러 오기까지 하자 엄마에게 드러내 놓고 "그 많은 취미 중 왜 하필이면 춤을 추러 다니느냐"며 춤 때문에 만난 아저씨에 대한 싫은 감정을 돌려 말하기까지 했다.

매일 천원짜리 무도장으로의 출근이 일상화되어 이미 아저씨와의 만남이 생활의 일부가 된 엄마에게 언니들의 투덜거림이 들릴 리 없었다.

젊은 날 술 좋아하고 다소 독선적이기까지 한 아버지가 자상할 리 없어 맘 고생 많았던 엄마는 늘 "나 죽으면 니 아버지랑 한데 묻지 마라"며 농담 반으로 당부하기까지 했었다.

먹고 사는 것이 삶의 목표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 현장을 떠돌며 목수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돈 벌러 월남으로 떠나 십여년 만에 돌아온 뒤 병으로 돌아가시까지, 남편의 사랑은커녕 애틋한 정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던 엄마의 결혼 생활은 지금 내 잣대로 본다면 '불행' 그 차제로만 느껴진다.

차분한 성격에 당신이 앉은 자리엔 먼지 하나 남겨 놓지 않는 깨끗한 성격하며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 아저씨가 어쩌면 청상 과부의 삶을 산 엄마에게는 첫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저씨는 유부남이었다?

엄마와 아저씨가 만남을 계속하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엄마가 누군가와의 전화 통화하는 내용을 통해 아저씨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언니들은 두 분의 관계를 더욱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보았고 아저씨의 우리집 방문도 더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늙었다 하더라도 아저씨가 엄마랑 바람을 피우는 건데 아저씨 부인 입장에서 보면 좋을 리 있겠느냐"며 같은 여자 입장에서 아저씨의 부인인 아주머니의 역성을 들기까지 했다.

처음엔 나 역시 엄마와 아저씨의 관계가 소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되어 아저씨를 마주치기가 조금은 어색했다. 그러나 소위 '불륜'이라는 젊은 사람들의 잣대를 이미 한 생을 거의 다 사신 두 노인에게 들이대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두 분은 이미 좋은 벗이 되어 있었다.

특히 아저씨가 엄마와 가까워진 이유가 엄마가 순진하고 귀가 어두운 것을 이용하여 돈을 쓰게 하는, 어떤 '품성 좋지 않은 엄마의 친구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에 난 아저씨를 더욱 신뢰하게 됐다.

귀가 어두워 사람들과 도무지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 엄마에게 아저씨는 통역사 노릇이며 가족의 문제를 상담하는 상담자였다. 또 나이 들어 겁 많은 엄마에게 세상 구경도 시켜주는 아저씨의 인간적인 마음을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언니들에게 '자식들보다 훨씬 낫다'며 아저씨 역성을 들었고 언니들과 언쟁을 하면서까지 가족 소풍이나 여행 때 아저씨를 초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와 아저씨의 만남은 같은 일상을 되풀이 하며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엄마가 2000년에 쓰러지고 치매가 온 후 5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아저씨는 변치 않고 엄마의 보호자다. 소위 '정신나간 노인네'가 된 엄마를 지금도 변치 않고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매일 집으로 오셔서 횡설수설하는 엄마의 얘기를 들어 주기도 하고 예전처럼 고스톱도 치며 엄마를 돌보아 주던 아저씨를 생각하니 용인으로 이사를 올 때 참으로 고민이 많았다. 서울의 신내동과 용인이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기에 아저씨가 자주 오실 수 없다는 점이 제일 먼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서울집에서는 이십년 이상을 살아 웬만한 동네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 용인에서 엄마가 더욱 심심해질 것을 생각하니 선뜻 결정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낮에 엄마를 돌보기 위해 집으로 오는 수지에 살던 큰언니의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또 다른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이사를 하기는 했지만 아저씨를 자주 만나지 못할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난 결국 이사를 했고 얼마 뒤 아저씨를 초대했다. 그로부터 아저씨는 한번 오시어 5~6일 가량을 머물며 엄마와의 만남을 계속하게 됐다. 한번 오가는 길이 어려우니 아예 체류하게 된 것인데 염려했던 아저씨와 엄마가 이별하는 사태는 다행히 발생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며칠씩 혼자 집에 계실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죄송하기 짝이 없어 아저씨가 돌아가실 때마다 작은 무엇인가를 보내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며칠씩 혼자 집에 계실 아주머니에게 너무 죄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아저씨가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아 서둘러 도착한 병원에서 아주머니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아주머니를 만나면 어찌 해야 할지 걱정의 마음으로 병실로 들어서자 초췌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아저씨가 반색을 했다.

아저씨의 건강에 대한 안부를 묻고는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어찌 말을 해야할지 쭈뼛거리고 있자 아저씨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 휘경동 집 딸이야"라며 나를 소개했다.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인사를 드리니 오히려 아주머니가 웃음으로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바쁠 텐데 왜 왔어요? 근무 중일 텐데"라며 고마워 하셔서 난 오히려 몸둘 바를 몰랐다.

그간 길에서 수차례 쓰러지셨던 아저씨가 또 입원하게 되자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며 병실을 나오니 아주머니가 뒤따라 나오며 배웅을 한다. 준비한 얼마간의 돈을 넣은 봉투를 내미니 아주머니는 펄쩍 뛰며 이를 사양한다. 실랑이 끝에 던지듯 드리고 병원을 나왔다.

우리네의 젊은 잣대로 혹은 사회적 잣대라면 엄연히 부인이 있는 아저씨가 엄마를 만나는 것을 '불륜'이라고 표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엄마가 싼 오줌과 똥을 치우는 아저씨와 가끔은 자식도 헷갈려 알아 보지 못하는 엄마가 '불륜'이라는 부적절한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두 분의 사랑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2년 전이던가, 아저씨는 누군가와 엄마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끝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될 수 가 있어. 그 빠릿빠릿하고 똑똑하던 사람이, 불쌍해, 인간적으로 너무나 불쌍해…"라며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팔순의 노인이 꺼억꺼억 우는 울음소리에 내 가슴 속에도 슬픔이 가득차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난 아저씨의 진심을 믿는다. 엄마와 아저씨, 그들은 아주 오래된 벗으로, 노년의 외로운 마음을 나누었던 연인으로 인간적인 사랑의 힘이 깊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주머니에게는 참으로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저씨가 우리집에 오시면 아주머니 혼자 계셔야 할 시간들은 또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않다. 난 아저씨가 오실 때마다 걱정되어 묻는다. "아주머니, 뭐라 안하세요?"

얼마 전 아저씨는 아주머니와 우리집을 함께 놀러 오시겠다고 벼르면서 엄마와 함께 당신이 사는 집으로 놀러 오라는 말씀도 하셨다. 나 역시 이제는 아저씨의 그런 제안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 분 노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듯하다.

내가 직장을 다니며 엄마를 돌보던 정말 힘든 시기에 아저씨는 너무나 든든한 엄마의 보호자로 많은 시간을 대신해 주셨다. 어쩌면 아저씨는 나에게는 '은인'과 같은 분이다.

너무나, 너무나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아저씨가 앞으로도 건강하셔서 엄마의 진정한 벗으로, 그리고 엄마의 첫사랑으로 오래오래 남아 계시길 바란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보여준 중년의 사랑도 아름다웠지만 남녀의 사랑을 넘어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마저 담고 있는 두 노인의 모습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인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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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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