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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부뚜막에서 놀다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나서 실컷 울음을 터트린 후 어머니의 "어이구 내 강아지" 소리에 아픈 상처를 씻어낸 날 꿈을 꾸었다. 아침에 베개가 흥건히 젖도록 설운 울음을 울 수밖에 없었던 그 꿈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만으로도 우울했던 시절

어린시절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 시절은 단지 어머니의 부재만으로도 얼마든지 우울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계모임이라도 가시는 날은 온종일 동네에서 누런 코를 흘리며 뛰어 놀다 저 멀리서 어렴풋이 어머니의 실루엣이 비치는 순간부터는 먹먹했던 가슴이 활짝 열리곤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존재가 절대적이었을 무렵에는 오직 어머니로 인해 살고 어머니로 인해 기쁘고 슬펐다. 그 시절의 악몽은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청소년이 되었을 때 일년이면 몇 번을 치르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험에 대한 부담은 지겹도록 끔찍했다. 시험을 치른다는 자체도 공포려니와 그 뒤에 닥칠 물리적인 보복은 학교를 선도부나 교련선생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포의 대상으로 삼을 만했다. 그 땐 이미 어머니의 품을 조금은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므로 악몽의 주인공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베개를 흥건하게 적시진 않았지만 꿈결에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는 경험을 종종 시켜준 장본인은 다름 아닌 시험이었다. 공부만이 능사였던 시절이다. 시험을 잘 보든 그렇지 못하든 어쨌든 싫었다. 오줌을 찔끔거릴 만큼 시험이란 것은 정말 보기 싫은 것들 중 최고였다. 심지어 면허시험을 볼 때조차도 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댔으니까.

대학을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그런 악몽을 자주 꾸었다. 덕분에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새벽 별을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대학시절 악몽의 주인공은 고문

대학에 가서 나는 일찍이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것도 좀 특별하게 했던 관계로 그 당시의 관행상 시험이란 것에서는 자유스러웠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점점 책임이 커질 무렵 나도 수배라는 걸 당하게 되었다. 20대의 거의 전부를 그 쪽 방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그 시절 나의 악몽의 주인공은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고문이었다.

당시의 안기부나 기무사 등에 한 두 번 끌려갔던 경험을 소름 끼치게 증언하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상적 무장은 차치하고 미구에 나에게 들이닥칠 수사관들의 험상궂은 얼굴들과 계단 깊은 지하실의 음습한 장면들때문에 등허리에 흥건히 땀을 쏟아내곤 했다.

끝내는 그저 악몽으로만 끝났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그렇지 못한 동지들에게 한 없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할지 영 헷갈린다. 내가 그 나이 때 꾸었던 악몽을 지금의 후배들은 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군대는 늦은 나이에야 가게됐다. 나이 들어 군대에 가면 서럽다. 신병훈련 끝나고 야간 열차와 포장트럭을 타고 내가 내가 가게된 곳은 충주의 한 병영이었다. 군기는 충천한데 처음 들어간 내무반에서 나보다 한 살 어린 병장이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너 오늘 들어온 신병이냐?"
"네! 이병 김지영! 네 그렇습니다!"

아마 내무반이 붕 떴다 가라앉을 만큼 큰 소리였을 것이다.

"근데 어떡허냐? 난 오늘 제대하는데."
"…."

뭘 어떡하냐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더 서러워져 버렸다.

신병시절엔 꿈도 마음대로 꿀 수 없다. 온 정신을 고참들의 시선에 맞추어 놔야 했기 때문에 잠을 자면서도 누가 건드리면 벌떡 일어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신병시절이 지나고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이번 주인공은 학년 말에 사귀기 시작했던 여자 친구였다. 신병시절엔 하루에 한번씩 오던 편지가 시간이 가고 날이 갈수록 간격을 멀리했다. 그 시절 그 초조한 마음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새벽 삭풍 속에서 다리에 얼음이 박힐 만큼 추위에 떨다가 내무반에 들어와 잠이 들었다. 하지만 깜박잠에서조차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호호'거리는 꿈을 꾸어야 했다.

결국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씨~.
(지금의 아내가 이 글만은 안보길 빌 뿐이다)

군을 어렵사리 마치고 사회에 나와 악전고투를 했다. 십년 만에 받은 졸업장에 그것도 평점이 3.0을 채 넘기지 못한 형편없는 성적표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화학과를 나왔지만 사회과학은 잘 알아도 원소기호는 몰랐다.

그래도 지금 이만한 직장에 다니는 것은 다 졸업장 덕분이다. 어머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좌우간 악전고투했던 사회생활 속에서 꾸었던 악몽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군대에 관한 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영장이 다시 나왔다. 난 뭔가 행정적인 착오라고 항변하고 울고불고 생난리를 쳐 봤지만 장면은 바뀌고 내가 가시철망이 쳐진 병영에서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한 마음으로 제대할 날을 셈해보다 잠이 깨곤 했다.

그 때의 그 암담함과 잠이 깼을 때의 그 다행함이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감격적이다. 그만큼 끌려간 군대는 두 번은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악몽 그 자체다.

내 부재가 가져올 상황들만 생각해봐도...

다시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한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지금의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다. 유년기 때 어머니의 부재를 끔찍이 싫어했던 기억들이 선연한데 이제는 처자식에 대한 부재 보다도 내가 없을 경우 남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위기들을 생각한다. 눈물은 기본이고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것은 옵션이다.

그런 악몽을 꾸는 날은 아내와 아들의 소중함을 한 번 더 실감하게 된다. 맨몸으로 가계를 일구고 아이를 낳고 아내와 세상을 살지만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부재가 가져올 심각한 상황들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존재는 제법 의미 있어진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지금 꾸는 악몽도 언젠가는 현실이 되긴 하겠지만 그 시기만큼은 많이 늦어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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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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