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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밭을 지나 헌책방으로

길그림으로 보았을 때 퍽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경기도 원당에 가 봅니다. 서울 사람도 아닌 저이지만, 일산이나 분당이란 곳은 서울에서 참 먼 곳이라고 느껴요. 종로에 살면서 성북구 끝자락이나 천호동, 강남 또 강서구 방화동 쪽이나 금천구 쪽 모두 멀다고 느꼈기 때문일까요? 하긴, 생각해 보면 서울이 너무 넓고 커요. 그러니 경기도 원당을 멀게 느낄 수밖에 없겠다 싶습니다.

전철(3호선)을 타고 갑니다. 원당, 일산, 고양 쪽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분들이 많은 듯, 전철은 꽉 찼습니다. 서울에서는 땅밑으로만 다니던 지하철이 땅 위로도 나옵니다. 한참을 달리는 동안 창밖에는 논밭이 길게 펼쳐집니다. 일산 쪽에서 서울로 오가는 분들은 이 논밭을 어떻게 느낄까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창밖으로 보이는 구경거리쯤으로만 생각할까요?

▲ 책방 앞에서. 해질 무렵 찾아갔습니다. 왼쪽에 매장 하나가 있고, 오른쪽 2층에 어린이책과 전집을 중심으로 다루는 매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최종규
돈 버는 일을 잿빛 도시에서만, 그것도 사무실에 앉아서 서류를 쓰고 컴퓨터를 사용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들로 흔히 생각하는 요즘이지요? 나날이 자연과 멀어지고 자연스러움을 잃다 보니, 우리 자신을 차분하게 돌아보며 우리 안에 깃든 자연스러움을 헤아리는 책읽기와도 거리가 멀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창밖 논밭을 바라보니 어느새 '원당역'까지 왔습니다.

<2> 시모음 한 권을 보면서

원당역에서 내린 뒤 밖으로 나와 조금 걸으니 헌책방 <집현전>이 보입니다. 낯선 길이라 헤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헌책방을 찾기는 아주 쉽군요. 이렇게 찾아오기 쉬울 줄 알았으면 진작 찾아와 볼 것을…. 가방을 내려놓고 차근차근 책을 구경합니다.

.. 우리 어린이들은 거의 모두 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 대부분이 시가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어른들의 동시와 그런 동시를 흉내내어 쓰고 있는 아이들의 그릇된 작품을 시로 알고 있을 뿐이다. 장차 이 땅의 주인이 될 어린이들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삶을 표현한 시 한 편을 읽지 못하고 그대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개인으로나 민족으로나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어른들이 국제적인 무슨 경기에서 일등을 한 것을 어린이들에게 자랑삼기보다 훌륭한 우리 민족시인의 시를 단 한 편이라도 우리 자신이 외워 보이고 어린이들에게도 가르치는 것이 백 배도 더 자랑스런 일이 아닐까, 온 세계에 자랑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 해설-이오덕


▲ <꽃 속에 묻힌 집> 겉그림입니다. 저작권자 권리를 짓밟은 출판사 횡포 때문에 판이 끊어진 안타까운 책입니다.
ⓒ 창작과비평사
먼저 <꽃 속에 묻힌 집>(이오덕·이종욱 엮음, 창작과비평사, 1979)이란 어린이 시모음을 만납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읽을 만한 시모음 하나 변변하게 없던 때 묶은 책이에요. 그릇된 동심천사주의와 상업주의 그리고 독재권력에 빌붙으면서 문단세력이나 키우는 흐름에 휩쓸려 제대로 된 동시 하나 만나기 힘들던 지난 날, 일반 어른시를 쓰는 분들 작품 가운데에서도 어린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시를 추려서 모은 책이 <꽃 속에 묻힌 집>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시집'이라는 이 책 차례를 살펴보면, 김수영(풀), 김현승(나무), 나태주(가을 산길), 민영(대조롱 터뜨리기), 박두진(해/산봉우리), 신경림(아침/낮달/장에 가는 길), 신석정(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이시영(바람아), 장만영(닭장/가을 들판에서/돌아가는 길), 정호승(구두 닦는 소년), 조태일(대낮), 한용운(나룻배와 행인), 한하운(파랑새), 서정주(골목), 심훈(그날이 오면), 유치환(저녁놀), 윤곤강(인경)… 같은 작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수영, 김현승 같은 분들 시를 어린이에게 읽혀도 좋겠다고 생각해 보셨나요? 참 좋은 시라면 아이들이든 어른들이든 누구든 즐기기에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목이 참으로 시를 시답게 하고, 시를 온 나라 사람들이 맛보도록 이끌지 싶어요.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좋은 책을 처음 묶어내는 사람 마음이 있고, 그 책을 고이 받들어 펴내는 사람 마음이 있어요. 그리하여 이처럼 나온 책을 반갑게 마주하며 읽는 사람 마음이 있고, 살가운 책을 읽은 사람이 나누는 풋풋함을 얻어 가지는 사람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언제까지나 고이고이 이어가야지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곱게만, 또 옳게만, 또 아름답게만, 또 살뜰하게만 이어가는 건 아니더군요.

▲ 왼쪽 매장 골마루. 골마루가 셋 있습니다. 골마루 둘을 사이에 두고 앞쪽에는 "책에 앉지 마세요"란 쪽지를 꽂아 두셨군요.
ⓒ 최종규
<3> 이런 책도 구경

<戶籍(소화17년)>라는 얇은 잡지 하나를 봅니다. 1942년에 나온 책으로 온통 일본말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잡지가 '식민지 조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판권을 보면 '조선총독부법무국민사과'에 있는 '조선호적협회'에서 펴냈다는 글귀와 잡지 뒤에 있는 '인천해운조합' 광고 때문입니다.

제 고향이 인천인 터라 '인천 옛 자료'로 쓰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집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호적>이란 잡지는 '창씨개명'을 억지로 시키던 그즈음에 나온 책이고, 그리하여 그때 흔적과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도 제구실을 하겠다 싶습니다.

▲ <일본원색잡초도감>에 나오는 한 대목. 우리 나라에도 사진으로 된 도감은 많고 그림 넣은 도감도 더러 나옵니다. 하지만 사진만 보아서 잘 알기 어려운 도감이 참 많고, 그림도 너무 곱게만 그려서 '사실성-정보'를 못 담곤 합니다. 일본 도감은 이런 대목을 훌륭하게 엮어내고 있어요.
ⓒ 전국농촌교육협회
<日本原色 草圖鑑,全國農村敎育協會(1969)>라는 도감도 하나 만납니다. 책 겉그림을 보고는 요즘 책인가 싶었는데 판권을 보고 놀랐습니다. 1969년에 나온 책이라니! 1969년 책이 맞냐고 물을 만큼 책이 깨끗하고 종이질도 좋으며 사진 상태나 그림 상태도 아주 훌륭합니다. 일본이란 나라가 얼마나 인쇄술이나 편집술이 앞서 있는가를 새삼 느끼겠습니다. 이런 책, 이런 도감 하나 변변하게 없는 우리 나라인 터라 더욱 부럽고 안타깝습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책 팔아 번 돈으로 이렇게 훌륭하고 살뜰한 책을 새롭게 만들어야지 싶어요. 그래야 책 하나 기꺼이 사준 독자에게 고마움을 갚는 길일 테며, 책 만드는 참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4> 우리가 지켜 가야 할 것

우리가 지켜야 할 것, 지키면 좋은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작고 수수한 것입니다. 먹는 물, 마시는 공기, 먹는 밥이 더럽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도 넉넉합니다. 먹는 물과 마시는 공기와 먹는 밥을 더럽지 않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쓰레기를 만들지 않고 공해덩어리를 낳지 않는 일이겠죠? 이렇게 하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밥찌꺼기를 함부로 남기지 않는 한편, 멀지도 않은 곳을 구태여 차를 몰고 갈 까닭도 없으며, 자기에게 돈이 많다고 지나치게 헤프게 쓰면서 쓸모도 없는 물건을 마구 사는 일도 하지 않아야 좋습니다. 전깃불도 아끼고, 추운 겨울엔 내복을 입어서 난방비를 아끼는 일도 훌륭합니다. 사서 읽은 좋은 책은 이웃이나 동무와 나눠 볼 수도 있겠죠? 몸이 자라 작게 된 옷은 이웃이나 동무나 동생에게 물려줄 수 있고요.

작아 보이는 이런 일부터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게 바로 우리가 지킬 것이고, 이렇게 지켜 나가는 마음이라면 무슨 일을 하건 무슨 생각을 품건 어떻게 놀건 참으로 아름답고 모두가 즐거울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집현전> 헌책방은 자기 책방 이름을 넣은 비닐봉지가 따로 있습니다. 보통은 버려진 봉투나 값싼 비닐봉지를 쓰지만, 이렇게 책방 이름을 넣은 비닐이나 봉투를 쓰는 곳도 있어요.
ⓒ 최종규
책을 만드는 출판사 사람도 그렇고 책을 읽는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첫마음을 생각해야 좋겠어요.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처럼, 어른은 늘 어린이일 적을 떠올리면서 자기 마음을 깨끗하고 다소곳하게 다져 나가면 좋겠어요. 책을 왜 만드는지, 책을 왜 읽는지를 늘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아, 참 좋구나' 하고 느낄 만한 책을 만들고 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해야 책 문화도 살고 출판사도 사는 한편 독자들도 즐거울 수 있어요. 그러는 가운데 헌책방 살림도 북돋울 수 있으며 우리 살아가는 세상도 한껏 아름다움과 희망과 꿈이 부풀고 하나하나 이루어질 수 있지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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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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