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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유석 서울중앙지법 판사.
ⓒ 한국법조인대관
신용불량자의 실상을 공개한 서울지방법원 파산부 문유석(36) 판사의 글 '파산이 뭐길래'가 화제다.

문유석 판사는 법원 회보인 <법원사람들> 5월호에 기고한 이 글에서 자신이 1년 동안 파산부에 근무하면서 경험한 사례들을 생생하게 공개했다. 문 판사는 특히 이 글에서 개인 파산자를 '모럴 헤저드'로 모는 사회의 잘못된 시각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문 판사의 글은 신용불량자 관련 사이트에 올라와 신용불량자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

문유석 판사는 '파산이 뭐길래' 에서 ▲연쇄부도가 난 중소기업 경영자 ▲큰 병에 걸려 카드로 병원비 충당했다가 신용불량자된 택시운전사 ▲친언니 빚보증 서줬다 카드 돌려막기 하다가 파산한 학원 강사 ▲채무자와 채권자가 법원에서 화해한 사례 등 파산부 판사로 근무하면서 자신이 맡았던 실제 사건을 소개했다.

"방탕한 생활 커녕 빚 절반은 병원비 나머지 반은 카드수수료, 연체이자로...

그는 방탕한 생활은 커녕 빚의 반은 병원비, 나머지 반은 온갖 카드수수료, 연체이자로, 결국 손에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한 돈을 갚느라 심신이 다 황폐해진 채 비로소 법원을 찾은 이 답답한 아저씨를 보고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이 지경인 사람에게 끝도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해주고 사용하게 한 카드회사들에게 화가 난다"고 분노를 나타냈다.

문 판사는 "아직까지는 파산자들은 대부분 세 가지 종류"라면서," 빠듯하게 먹고 살다가 실업, 질병 등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먹고살아 보려고 이것저것 해 보다가 망해버린 사람들,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지난 해 말 부모가 없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어린 소녀 20여명이 살고 있는 종교 시설을 찾았다가 "사채업자가 깡패를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다치게 했는데, 물어 줄 돈이 없으면 몇 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해요?","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 나오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며, "이 아이들에게서 가정을, 엄마 아빠를 빼앗아 간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돈"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문유석 판사는 "우리는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이라고 쉽게 숫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은 숫자가 아니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가정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고 아이들이 있다"면서, "400만 명이 신용불량자면, 최소한 400만 가정이 빚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며, 그 중 상당한 수의 가정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아이들이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친 세상에 던져졌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도덕적 해이는 어디있나" 도덕적 해이론 반박

그는 "도대체 '모럴 헤저드'의 표본인 남의 돈으로 흥청망청 신나게 쓰고는 자기 먹을 것은 다 숨겨 놓고 호화생활을 하며 파산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느냐"면서, "골프장 '해저드' 안에 숨어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문유석 판사는 또한 개인 파산이 사회 구조에 기인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는 미국 중산층의 몰락을 분석한 <맞벌이의 함정>이란 책을 소개하면서 "도시치안이 불안해지고 공교육이 부실화되자, 비교적 안전하고 좋은 학교가 있는 주택가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맞벌이에 필수인 유아보육비를 비롯 유치원비, 애들 교육비, 의료비가 모두 높아져, 사치는커녕 부부가 뼈빠지게 일해서 자식은 남들만큼 교육시켜 보려고 지출하는 돈이 소득의 거의 대부분이어서 미래의 위험에 대비할 여유자금이라고는 없고, 아슬아슬하게 꾸려가는 이 생활이 실업, 질병 등 충격에 쉽게 파산지경에 몰리고 만다"고 중산층의 파산이 구조적 문제임을 짚어내기도 했다.

문 판사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근래 면책율은 99%이라면서, 손에 골무를 끼고 종일 기록을 뒤적이는 평범한 머글(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마법사 아닌 사람들의 총칭' 어리석은 자라는 뜻도 있음) 판사들이 할 수 있는 마법은 한 가지 뿐이라고 고백했다.

"주문, 파산자를 면책한다"

개인 파산은 사회구조의 문제...서울중앙지법 면책률 99%

문유석 판사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글을 쓰게된 계기를 묻자 "글을 쓴 취지를 이미 '파산이 뭐길래'에서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따로 이야기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을 아꼈다.

문유석 판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36회에 합격해 97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용됐다.

2002년 춘천지법 강릉지원 판사 시절 '성전환수술을 받은 자의 성별'이라는 연구논문을 통해 "성전환 수술을 받는 자들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법적으로 성전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교육과 병역의무 이행, 결혼 및 취업, 직장 생활 등 사회 전반에서 끊임없이 혼란이 반복될 수 있다"면서, "사회 일반이 인식할 만큼 성공적으로 성전환이 이뤄진 경우 법률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인도주의뿐만 아니라 공공복리에도 부합한다”면서 소수자 권리 보호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다음은 문유석 판사의 '파산이 뭐길래' 전문이다.

덧붙이는 글 | <파산이 뭐길래>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문유석 판사

법원가족 여러분, 언론에서 신용불량자 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죠? 법원의 파산사건, 개인회생사건도 많이 늘고 있구요. 쉽게 말씀드리면, 개인파산면책이란 가진 재산 모두 털어 빚잔치를 하여 나누어주고 남은 빚은 탕감받는 것이고, 개인회생이란 수입이 있는 사람의 경우 5년 내의 기간 동안 버는 돈으로 열심히 빚을 갚아 나가고, 남은 빚은 탕감받는 것입니다.

빚탕감이라....  다른 법원가족들이 열심히 재판해서 빚갚으라고 판결도 해 놓고 했는데, 판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앉아 있으니 파산부는 참 희한한 곳입니다. 저도 작년 이 곳에 전입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시적 법대 1학년생 시절 민법 교과서에서 본 “Pacta Sunt Servanda”, 즉 일단 맺어진 계약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근엄한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거든요. 그 후 1년여 파산면책항고사건 등을 처리하면서 나름대로 느낀 것들이 있어, 감히 두서 없는 글을 써 봅니다.

 1. 몇몇 사건들 

전입초기, 한 사건을 심리하게 되었습니다. A씨는 어떤 중소기업의 경영자였는데, IMF 시절 거래처들의 연쇄부도를 못견디고 부도를 냈습니다. 그런데, 회사자금을 빌릴 때 대표이사 개인도 연대보증을 하도록 금융기관들이 요구하기 때문에 회사의 빚이 모두 대표이사 개인의 빚이 되었습니다. 살던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실업자가 되어 친지 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증채권자인 금융기관이 A씨가 재산을 은닉하고 있다면서 면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니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정도되는 세 따님이 있길래, 심문 도중 자녀들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머뭇거리더니, 글쎄, 런던에서 음악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역시 흔히들 말하듯, 사업은 망해도 사업가는 다 재산을 빼돌려 잘 먹고 잘 살고 있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저는 물었습니다. 남의 빚은 못 갚는 분이 무슨 돈으로 자녀들은 해외유학을 시키고 있느냐고. 어눌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애들이 장학금도 받구요, 애 엄마가 그곳에서 식당 일도 하고... 좀 믿기 어렵더군요. 그렇게 쉽게 처자식 영국유학을 보낼 수 있으면 대한민국 국민 누군들 안 보내겠습니까.

이후 재산은닉여부, 학비 등 조달경위에 대한 심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이 속속 밝혀졌습니다. A씨의 어린 세 딸들은 세계대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했던 음악 영재들로, 학비 및 기본생활비를 충당할 만한 금액의 영국정부장학금 등을 받고 있었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반주자로 일하며 생활비를 보태고 있었습니다. 애들 엄마는 식당에서 월 100만원 정도 받으면서 일을 하고 있고, 사는 집도 허름한 월세집이었습니다. 서울에 홀로 남은 애들 아버지가 재산을 숨기거나 처자식에게 돈을 보낸 어떠한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얼마 후, 또 다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B씨는 택시기사를 한동안 하다가 그만두고, 실업자 생활을 한 지 오래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뒤지다보니 신용카드내역서에 ‘코코’ ‘발리’등의 야릇한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술집인 것 같았습니다. 남의 빚은 안 갚는 주제에 술집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니! 신문에 자주 나오는 소위 ‘모럴 해저드’가 이런 거로구나. 
그런데, 심문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파산자는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하고 병색이 완연한 병자였습니다. 중증 호흡기질환 장애인이며, 말하는 것도,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했습니다. 방탕한 생활은 커녕 일상적인 생활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택시기사로 일하며 살아가던 B씨는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급성 호흡기 질환으로 대수술을 몇차례나 받고, 1년 가까이 병원에 장기 입원해야 했고, 돌볼 친지도 없어 간병인까지 두어야 했습니다. 수천만원이 훌쩍 넘어가버린 병원비 등은 온갖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메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퇴원 후에도 살길은 막막했지만, 막연히 카드대금이 연체되어 신용불량자가 되면 큰일난다는 생각에 또다른 카드를 발급받아 앞의 카드를 막는 돌려막기를 반복하다보니 고액의 카드수수료와 연체이자로 빚은 금새 두 배로 늘어 버렸습니다. 더욱더 카드결제대금이 부족해지자 파산자는 예전 동료인 택시회사 노조원들에게 조합원 회식 등으로 단란주점에 갈 때 자기 신용카드로 계산을 하고 결제일에 돈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사적으로 ‘카드깡’을 한 셈이죠. 결국 밑빠진 독에 물은 채울 수 없게 마련이고, 예정된 파국이 찾아와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카드대금고지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고, 신용불량자 낙인은 물론 채권추심원들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파산신청을 한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안타깝고, 화가 났습니다. 방탕한 생활은 커녕 빚의 반은 병원비, 나머지 반은 온갖 카드수수료, 연체이자로, 결국 손에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한 빚을 나날이 키워만 가다가 심신이 다 황폐해진 채 비로소 법원을 찾은 이 답답한 아저씨에게. 그리고, 이 지경인 사람에게 끝도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고 사용하게 한 카드회사들에게.

답답한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C씨는 학원강사로 일하던 여자분입니다. 결혼하였고, 어린 아들도 있습니다. 학원강사 수입으로 넉넉지는 못해도 가족들이 먹고 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어 보이는데, 왜 파산부를 찾게 되었을까요. C씨의 빚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100% 친언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C씨만큼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이상하게도 식당이고 뭐고 먹고 살아보려고 시작만 하면 망하곤 하는 언니를 위해 C씨는 빚보증도 여러 건 서주고, 돈도 주고, 그러다 결국 자기도 카드돌려막기를 하는 신세가 되고도 또 현금서비스를 받아 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너무 답답해서 C씨에게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대책 없이 언니를 위해 빚을 졌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단둘이 자란 친자매였기에, 도저히 살아보려고 애쓰는 언니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고, 자기도 너무 힘들어 모질게 맘을 먹어 보아도, 늙으신 어머니가 언니를 이번 한번만 더 도와 주라며 눈물을 보이면 견딜 수 없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되뇌이며 카드를 긁었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것은 빚진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돈을 빌려 준 사람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D씨 사건의 경우입니다. D씨는 자수성가하여 가구공장을 경영하던 분입니다. IMF 당시 부도를 냈다가 힘들게 재기하여 어렵게 어렵게 공장을 운영하다가 불의의 화재로 공장과 재고가구가 모두 불타 수억원의 피해를 입고는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그를 안타깝게 여긴 거래업체 분들은 대부분 그가 재기하기를 빌어주며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래도 남은 금융기관 빚을 감당할 수 없어 면책신청을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금융기관들은 아무런 이의도 안하는데, 소액채권자인 자재대금 300만원을 못받고 있는 E씨가 강력하게 면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E씨는 화재 전까지 D씨와 형님아우하며 지내던 사이였다는데 말입니다. E씨가 주장하는 이의사유들은 법적으로는 면책불허가사유가 될 만한 것들이 아니었으므로 간단히 배척하면 그만인 듯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화재로 알거지가 된 사람도 억울하지만, 돈을 떼이는 사람도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에 쌍방을 모두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E씨의 말씀은 이랬습니다. D씨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사고 이후에 좀처럼 연락도 없다가 면책신청을 했다기에 연락을 해서 그런 신청을 하려면 미리 상의라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야박하다며 되려 화를 내기에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감정이 많이 상하여 이의신청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D씨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화재 이후 좌절해 있다가, 살아 보려고 고시원 생활에 부부가 일용직을 전전하며 재기해 보려고 발버둥을 치느라 미처 E씨 마음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저는 D씨에게 물었습니다. 면책을 받게 되면 법적으로는 E씨를 비롯한 거래업체 사람들의 빚을 안 갚아도 됩니다. 하지만, E씨를 비롯한 거래업체 사람들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인데, 그 마음의 빚도 안 갚고 사실 수 있겠습니까. D씨는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면책이 아니라 무슨 결정을 받던,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아주 적은 돈이라도 벌게 되면 제가 피해를 끼친 분들께 갚으며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D씨의 말씀이 E씨에게 겉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받아들여졌는지, E씨는 흔쾌히 이의신청을 취하하겠다고 하시면서 D씨의 재기를 빌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정표현이 서투른 40대 후반의 이 두 아저씨는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계면쩍어 서로 뭐라고 이야기를 건네지 못하고 각자 저에게만 이렇다 저렇다 어눌하게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런 사건들을 하나씩 하나씩 거치며, 그렇게 저는 파산부 판사가 되어 갔습니다.

 2. 천사들과의 만남

지난 연말의 일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한 작은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헌신적인 원장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네다섯살부터 초등학생, 일부 중고생까지 여자아이들 20여명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은 부모님이 안계시거나, 계시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아이를 돌보기 힘든 가정의 자녀,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학교도 다니고, 함께 도와가며 살아가는 가정공동체입니다.

수녀님이신 원장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후원자분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들은 여느 아이들 못지 않게 밝고 맑게 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집이지만, 깨끗하고 아늑했구요.
말로만 듣던 판사 아저씨들이라니 호기심이 가득하면서도 쭈뼛거리는 아이들. 한 판사님이 열심히 준비한 간단한 마술 몇 가지를 선보였더니 비로소 환호성이 터지더군요. 선물도 전달하고, 다같이 앉아 피자도 나누어 먹고, 서로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숫기 없는 판사들이 처음 본 여자아이들과 금방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난망. 더구나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어려웠고, 결국 다소 서먹한 채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제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머뭇머뭇거리기에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더니, 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일어서기에 아쉬움이 많았던 저는 남아서 그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설명해 주고, 학교생활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라고 해 줘야지...정도 생각을 갖구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한 아이씩, 한 아이씩 제 주변에 아이들이 둘러 앉아 이것 저것 물어보고, 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투어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는데, 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무엇을 판사에게 물어볼 것 같으세요?

사채업자가 깡패를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 어떻게 해야 돼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다치게 했는데, 물어 줄 돈이 없으면 몇 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해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 나오는 건가요?

.....저는 어리석게도 이 집에 흐르는 안온한 분위기와 밝은 아이들의 모습만 겉으로 보고는 이 아이들이 짊어지고 있는 어느 어른들보다 가혹한 삶의 무게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에게서 가정을, 엄마 아빠를 빼앗아 간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돈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용불량자 400만이 어떻고 쉽게 숫자로 이야기하지만, 그 한 명 한 명은 숫자가 아니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가정이 있고, 부모형제가 있고 아이들이 있습니다. 400만명이 신용불량자면, 최소한 400만 가정이 빚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며, 그 중 상당한 수의 가정은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괴되어 아이들이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친 세상에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 없이 아이들의 질문에 가능한 한 알기 쉽게 답해 주려고 애쓰고 있는데, 아이들 중 가장 어려보이는 네 살 정도의 아이가 제 주변을 맴돌더니 괜히 제 어깨도 만지작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보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들이 하는 이야기 같은 것을 알아들을 나이도 아닌 이 꼬마아가씨는, 여자들만 사는 이 집에서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아빠의 모습을 제게서 찾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재작년 법원회보에 제 딸아이 육아이야기를 썼었는데 기억하세요? 이제 일곱 살, 다섯 살인 두 딸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이 예쁜 꼬마아가씨도 안쓰럽지만, 이 아이의 아빠 가슴은 어떨지 생각하니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맘 속으로는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값싼 감상과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일만큼 아이들이 자기들이 짊어지고 있는 운명에 대하여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저는 이들을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른에게 법률상담하듯이 제가 아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이 얘기 저 얘기 하다보니 헤어지기 전에는 보다 진지한 토론도 잠시나마 할 수 있었습니다.

- 동방신기에서 누가 제일 멋진 것 같니? 아저씨는 믹키유천이 모자 쓴 스타일이 멋지더라.
에이, 아저씨. 유노윤호가 최고예요. 

 3. 모럴 해저드? 

아이들과 이야기하던 중, 파산면책제도에 대하여 제가 잠시 이야기해 주었더니 한 아이가 그러더군요. 에이, 그런게 있으면 누가 빚을 갚겠어요?

세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빚 때문에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 순진한 아이가, 자기 빚을 떼일까 겁나서 목청을 높이는 돈 많고 힘 있고 유식한 어른들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저 말을 우리나라 유식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어로 하면 바로 모럴 해저드 아닙니까.

유식한 사람들은 숫자나 유식한 말로 모든 것을 자신 있게 결론 내리기를 좋아합니다. 그 말들을 실제 사람의 삶과 연관지어 보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소비의 하방경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득이 줄어든 주제에 종전 소비수준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여 빚이 늘어난다는 거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도 유지하려 하는 종전 소비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것들일까요? 외제차, 해외여행, 골프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는 유치원을 그만두게 하느냐이고, 남들 고액과외시킬 때 아이들 동네 학원이라도 보내며 공부 잘해서 나중에는 부모보다 잘 살기를 바래 왔는데, 그나마 그만두게 하느냐이고, 노환으로 병원 출입이 잦으신 고향 부모님께 병원비와 용돈 보태시라고 보내던 10만원을 계속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이 경제학자들처럼 과감하게 ‘소비수준을 하강시키지’ 못한 채, 앞으로 열심히 돈을 벌어 갚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마이너스대출을 받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학원비, 병원비, 유치원비를 내다가, 결국 월말 카드대금고지서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파산은 고사하고 카드대금 연체 1회라도 시작되면 인생 끝장이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잘도 발급해 주는 신용카드를 또 발급받아 돌려막기를 시작하고 카드깡을 해 가며 카드대금을 갚아도 원금은 난공불락, 연체료 갚기도 버겁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빚이 1억이라는데 그 중에 학원비, 병원비, 유치원비로 써 보기라도 한 돈은 반도 안 되고 나머지는 다 이자, 연체료인 상황이 되자 벼랑 끝에서 뛰어 내리는 심정으로 빚을 탕감받고자 법원을 찾는 것이 늘어난다. :  ‘모럴 해저드가 우려된다’는 말의 통역입니다.

그런데, ‘모럴 해저드’라는 말에는 다른 뜻도 있더군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연구한 ‘신용불량자 증가의 원인분석과 대응방향’이라는 자료를 보니, 신용불량자의 증가는 1998년 소위 IMF 시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며 시작되었지만(이는 실업과 불황 등 ‘소득 감소’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겠죠), 

이를 확대시킨 것은 1999. 5. 현금서비스 한도규제 폐지 후 신용카드 회사들이 길거리 모집 등 위험관리를 도외시한 치열한 자산확대 경쟁을 전개하여 잠재적 부실을 축적한 채 신용팽창이 계속되다가(통역: 소득이 줄어들었는데, 그렇다고 갑자기 전에도 빠듯하게 살던 생활수준을 더 낮출수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일단 돈을 쓰게 해 주고, 다시 앞에 빌린 돈도 못 갚는 사람들이 돌려막기로 파산을 모면하며 버틸 수 있게 온갖 카드를 발급하여 주면서 업계 1위, 외형 1위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가), 

2002. 6. 이후 감독당국에 의해 건전성 감독규제가 도입되자 갑자기 카드회사들이 신용정책을 엄격화하여 잠재적인 부실이 현재화하게 된 것(통역: 더 이상 위와 같은 사람들이 돌려막기를 할 수 없게 돈을 빌려주는 것을 까다롭게 하자 곧바로 카드대금 연체가 시작되고,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된 것)이라네요. 

그러면서 2002년 3/4분기 이후 드러난 신용불량자의 급증은 주로 신용카드회사의 ‘도덕적 해이’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겁니다. ‘모럴 해저드’라는 말은 이럴 때도 쓰는 것이더라구요. 

제가 요즘 자기 전에 읽는 책이 있습니다. 하버드 법대의 파산법 교수인 엘리자베스 워런 (Elizabeth Warren)교수가 따님인 컨설턴트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Amelia Warren Tyagi)와 함께 쓴 ‘맞벌이의 함정(The Two-Income Trap)'이라는 책입니다. 이는 하버드대학이 주관한 개인파산에 대한 통계적 분석과 연구성과를 기초로 미국에서의 개인파산의 증가(2002년에 200만명이 파산신청을 했다는군요) 원인을 알기 쉽게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의 파산자 중 상당수는 맞벌이로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이라는 겁니다. 소득이 올라갔는데 웬 파산이냐구요? 요약하면 소득 올라가는 것보다 고정지출 늘어나는 것이 휠씬 높아서 여유자금은 과거보다 훨씬 줄어든 빡빡한 삶을 살아가다가 실업, 급여감소, 질병 등 변동요인만 발생하면 곧바로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고정지출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냐? 그건 바로 자녀의 ’안전‘과 ’교육‘에 대한 지출이라는 것입니다. 도시의 범죄율 증가와 공교육의 부실화로 중산층 부모들은 안전한, 그리고 좋은 학교가 있는 학군 좋은 교외주택가(비벌리힐즈 같은 부촌과 귀족사립학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웬만한 평범한 주택가를 말하는 것입니다)로 너도나도 몰려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런 곳의 주택값은 천정부지, 대출금 이자 값는 데만도 허리가 휜답니다.  

게다가 맞벌이를 하다보니 필수인 아이 봐주는 보육비와 유치원비는 대학등록금보다도 비싸지고, 자녀가 평범한 샐러리맨 생활이라도 하려면 대학교육은 필수라는데 대학등록금은 오르기만 하고, 건강보험료와 본인부담금은 늘어만 가고. 사치는 커녕 부부가 뼈빠지게 일해서 자녀 남들만큼만 교육시켜 보려고 지출하는 돈이 소득의 거의 대부분이어서 미래의 위험에 대비할 여유자금이라고는 없고. 아슬아슬하게 꾸려가는 이 생활이 작은 충격에도 무너져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4일 미국 하원에서는 부시 정부가 내놓은 파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더군요. 파산신청의 남용을 규제한다면서 파산면책받기를 까다롭게 만들어 놓은 법입니다. 그것도 주 타겟은 바로 중산층인 것 같더군요. 지난 몇 년간 미국 파산법 개정을 위해 소비자신용업계 등 대기업들이 엄청나게 노력을 하고 있다더니 부시 대통령의 재선과 함께 결실을 보신 모양이네요. 

4월 14일,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는 하버드 대학 연구실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뉴스를 바라보고 계셨을지 일면식도 없는 주제에 전화라도 해 보고 싶어집디다. 이화여대 법대 오수근 교수님의 글을 보면 파산법의 역사는 영국의 1542년법 이래 450년 동안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빚 못 갚는 채무자 목에 칼을 씌워 구경거리로 삼고 감옥에 투옥시키던 때로부터 정말 오랜 세월을 거쳐 불운하나 정직한 채무자에게 채무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 것입니다. 

그 오랜 역사동안 언제나 채권자들은 채무자들이 파산법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죠.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의 파산법 개정안 통과 뉴스를 반갑게 지켜 보았을 분들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백년 파산법 역사에 연간 200만명 가까이 파산신청하는 미국에서도 위 개정법에 대해서는 악법이라고 논란이 많던데,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로 1만건을 넘은 우리나라에서 이용도 하기 전에 남용부터 막으려 할 정도로 장래를 내다보시는 분들이, 왜 4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기 전에 진작 무분별한 소비자신용업의 남용을 걱정하지 않으셨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 문제는 물론 미국에서의 중산층의 위기와는 달리 보다 서민층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난 문제이지만, 우리나라 중산층의 교육열, 사교육비, 강남 집값 등을 보면 위 책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파산의 문제는 특정한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면책제도와 개인회생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인 것입니다.

파산면책을 이용해 남의 빚을 안 갚는다구요? 안 갚는 것이 아니라 못 갚는 것입니다. 면책결정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빚 갚을 능력은 고사하고 신불자로 취업도 안 되고 신용거래도 되지 않아 자기 가족의 기본적 생활도 꾸려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파산선고를 받고 면책을 받는 것이고, 그나마 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어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라도 갚아 나간 후 남은 채무를 면책받는 것이 개인회생입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들에 대한 채권은 액면이 10억이던 100억이던 이미 가치가 제로나 다름 없는 부실채권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이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식확인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꼬박 꼬박 잘 갚고 있고, 앞으로도 갚을 수 있는 빚을 어느날 갑자기 법원이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갚지 못해 왔고, 앞으로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숫자에 불과한 채무의 노예로 묶어 놓고 취업도 못하게 하고, 빚독촉전화에 자살하고 싶도록 궁지에 몰아 넣어서 채권자들이, 이 사회가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차피 못 갚는 빚, 무의미한 숫자 지워주고 경제활동에 복귀하여 자기 앞가림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으면, 결국은 이 사람들은 국민 세금으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대상자가 되거나, 심하면 홈리스, 범죄자가 되어 또다른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빚을 갚을 수 있으면서도 재산을 숨겨놓고 파산을 신청하는 사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면책불허가사유가 있고, 사기파산죄가 있는 것입니다. 빚진 사람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누굽니까. 돈 빌려 준 사람 아닙니까. 채권금융기관들이 신용관리를 제대로 해 왔다면 애초부터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돈 갚을 재산과 능력이 있다고 파악되어 있는 사람이 이를 숨기고 면책신청을 하는 경우가 발견되면, 파악하고 있는 자료를 첨부하여 법원에 이의신청하면 당연히 법원이 참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를 놓고 볼 때 이러한 경우는 매우 소수입니다. 물론, 파산사건의 증가와 함께 이러한 악용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은 저희들도 항상 염려하고 주시하고 있습니다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에서의 개인파산은 남용을 걱정하기보다는 이용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걸음마 단계라고 생각됩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가 2004년도에 처리한 면책사건의 면책율은 98.6%입니다. 금년 1/4분기에는 99.3%입니다. 파산부 판사들이 우표에 소인 찍듯이 사건만 들어오면 곧바로 면책 도장 찍어주고 있냐구요? 물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처리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채권자들에게 온갖 이의신청 기회 다 주고 있을 뿐 아니라, 판사라는 사람들의 천성상, 기록이 아무리 쌓여 있어도 기록상 명백히 사치, 낭비, 투기를 일삼거나 재산을 빼돌리는 등 진짜 파산을 남용하는 흔적이 나타나는데 바쁘다고 안 보고 지나가지는 못합니다.

얼마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장님께서 파산부 판사들에게 저녁을 사주시면서 건의사항이 있으면 하라시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파산부 쪽 전기배선이 안 좋은 것 같다. 밤 11시가 되어도 밤 12시가 되어도 도통 불이 꺼지질 않는다. 좀 수리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심리해서 면책한 비율이 99%입니다. 그럼 나머지 1%는 정말 흉악한 사기꾼들이냐구요? 솔직히 아닙니다. 그 1%도 비록 면책은 여러 가지 사유로 불허가되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다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건이 급증하면서 남용이 우려되는 사례도 늘기는 하겠지만요.

제가 보기에는 아직까지는 우리나라의 파산자들은 대체로 세 가지 종류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 가족이 빠듯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가까스로 충당하다가 실업, 질병 등의 이유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조금이라도 잘 살아 보고 싶어서 돈을 벌어보려고 이것저것 애쓰다가 망해버린 사람들, 자기도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그놈의 ‘정’과 ‘핏줄’에 목이 매인 한민족으로 태어난 죄로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

도대체 ‘모럴 해저드’를 걱정하는 분들이 말씀하는 남의 돈 빌려서 흥청망청 신나게 쓰고는 자기 먹을 것은 다 숨겨 놓고 파산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골프장 해저드 안에 숨어 있나요?

바쁜 직장생활을 살다보면 들곤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도 돌려막기하며 살고 있는 것 아닌가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을 돌려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할 시간을 돌려서, 아름다운 음악과 책을 즐길 시간을 돌려서, 해야 할 일을 막아내는데 쓰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지난 주말에 친구를 만나서 주책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내가 세 명이었으면 좋겠다. 일하는 나,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나, 나 자신을 위해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는 나.  그랬더니 친구 왈, 이미 세 명인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너는 그 중 일하는 쪽이고. 

일만 하다보면 어느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서 하고 있는지를 잊기 쉽습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언제나 조용히 야근을 하고 있는 올해 새로 전입한 판사가 있습니다. 대학교 동기인 친구인데, 제가 하루는 많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즐겁게 일하고 있다더군요. 힘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하는 일인데 왜 즐겁지 않겠냐구요. 그렇습니다. 우리 법원가족들은 주로 잘못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거나, 누가 누구에게 돈을 주라고 하거나, 남의 집을 팔아 빚을 받아 주거나 하는 일을 합니다. 모두 사회를 유지하려면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파산면책,개인회생사건 한건 한건은 한 사람을, 한 가정을, 한 아이를 되살리는 일입니다. 회사정리나 화의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회사가 살아나면 주주도, 근로자도, 협력업체 사람들도 살아납니다. 파산부는 회생부이기도 한 것입니다.

 4. 마법책 

지난 연말 아이들과 만났을 때, 한 판사님이 보여준 마술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마술그림책이었습니다. 한번 스르륵 넘길 때는 아무것도 없다가, 다시 한번 처음부터 넘기니 예쁜 그림이 나타나고, 또 다시 처음부터 넘기니 색깔이 칠해져 있고. 

저도 호그와트에라도 가서 진짜 마술을 배워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는 엄마아빠가, 친구들 집같은 평범한 가정이, 작지만 예쁘게 꾸민 자기 방 한 칸이 나타나도록. 그리고 빚갚으라며 아빠 멱살을 잡던 험상궂은 아저씨의 기억도, 엄마가 보고 싶어 남몰래 베개를 적시고 마는 눈물도, 소풍때 엄마아빠와 온 학교친구들 곁에서 느낀 부러움도 영원히 사라지도록 말이죠. 

하지만, 평범한 머글인 판사들이 할 수 있는 마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손에 골무를 끼고 기록을 뒤적이다가, 컴퓨터 자판을 눌러 주문을 외웁니다.

'주문,파산자를 면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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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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