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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년동안 해고노동자의 아내로 살아온 한미선씨
ⓒ 김정숙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국정홍보처 공익광고 구절이다.

8년을 넘게 해고노동자의 아내로 살아온 한미선(41˙울산 동구 화정동)씨를 봐도 이 '긍정의 힘'이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다. 해고노동자의 아내로서 겪는 어려움의 그림자 대신 해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을 변함없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남편은 단순한 해고노동자는 아니다. 지난 97년 울산 현대미포조선에서 명령불복종과 회사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해고된 남편 김석진씨는 올해 2월 혹한의 날씨 속에서 대법원 정문 앞에서 20여일 동안 1인 시위를 벌여 언론에 이미 알려진 바 있다.

남편 김씨는 해고 직후 울산지방법원과 부산고등법원에서 복직 판결을 받았으나 회사 쪽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대법원은 그러나 3년째 재판을 계류시키며 판결을 늦추고 있어 김씨는 이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1인 시위 이후 남편 김씨는 다시 울산으로 내려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해결에 함께 하는 등,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노동운동의 하루하루를 멈추지 않고 있다.

8년, 김씨가 해고노동자로 보내기에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다. 그러나 남편을 만나기 전에 노동운동의 '노'자도 몰랐던 아내 한씨가 맞서기에는 더 더욱 긴 어려움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해고는 당사자 삶의 변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 전체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날려 버리는 토네이도와 같다. 그동안 유지돼왔던 가족의 모든 질서들이 뒤죽박죽돼 버리고 그 위기 앞에서 자칫 모두가 황폐해져 갈 수도 있다.

전업주부로만 지내던 한씨에게 '긍정의 힘'이 없었다면 아마 이 가정도 그랬을지 모른다. 어쩌면 거꾸로 남편의 해고가 한씨에게 내재돼 있던 '긍정의 힘'을 끌어 올려준 동인이 됐던 것일까.

현장 조직인 '민노회' 의장을 맡는 등 노동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해 온 남편에게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지리라'는 예감으로 살아온 한씨였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남편이 해고됐다는 소식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침착함이 먼저 찾아오더라고 했다.

▲ 현재 대법원에 재판이 계류 중인 해고노동자 김석진씨.
ⓒ 김정숙
당장의 생계도 생계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과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뇌사상태로 자리보전하고 있던 시어머니를 생각해서도 자신이 쓰러지면 안 된다고 맘을 다잡았다. 남편은 복직투쟁을 해야 했고 간병해야 하는 시어머니가 있어서 한씨는 당장 돈벌이에 나설 수도 없었다.

살던 집을 잡히고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하면서 겨우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순식간에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생활의 모든 것을 최소한으로 압축해야 했다. 다행이 어린 딸들이 이런 생활에 적응을 잘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씨는 지난 2003년 본격적으로 생활 전선에 나섰다. 결혼 후에 사회생활이라곤 아무 것도 해본 적 없고 가진 밑천도 없는 한 씨는 친구의 권유로 화장품 영업사원 일을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부끄러움도 가슴 깊은 곳에 욱여넣고 종일 발품을 팔아 한 달 후에 손에 쥔 첫 월급은 40여만원. 이제는 경력이 좀 쌓여 수입이 좀 늘었다지만 그래도 70~80만원에 불과해 한씨 혼자 버는 이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적은 월급도 월급이지만 수영이며 꽃꽂이며 문화강좌를 들으러 가는 다른 주부들의 모습을 봤을 때 양 손에 화장품 가방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궁색해 보이면 그것도 큰 서러움이었다.

마음 힘든 건 하루 이틀 아니었지만 마음 따라 몸이 지쳐 힘든 적도 많았다. 지난 2000년, 남편이 회사 앞에서 천막 노숙 투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어머니 간병에 정신적 힘겨움이 겹쳤던 것일까. 몸이 아파 병원에 가보니 갑상선이 심하게 부어 안 좋으니 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한마디 말도 못했다. 남편을 보러 회사 앞으로 간 날 그는 길 건너에서 경비들에게 무참하게 떠밀리고 있는 남편을 보고 말았다. 아픈 목이 슬픔에 더 뜨겁게 아파왔다.

한씨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내가 아프다는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고 그 때 얘기는 지금껏 남편에게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이제야 털어 놓으면서 웃음으로 억누르고 있던 울음을 끝내 터뜨렸다.

▲ 몸이 아파도 남편의 힘든 모습을 보며 아프다는 말도 못했다는 한 씨. 처음으로 그 얘기를 하며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 김정숙
그러나 남편이 옳은 길을 간다는 믿음이 있기에 다시 신발 끈을 묶었다. 자신도 힘들지만 회사와 대법원을 상대로 싸우는 남편은 몇 갑절 힘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위의 사람들도 큰 힘이 됐다. 지역 노동단체들이 양말 등을 팔아 수익금을 보내오기고 하고 이웃들은 쌀이며 반찬이며 옷가지들을 보태 주었다.

"그냥 편하게 살라"는 권유도 없지 않았다. 더군다나 "충분히 먹고 살만큼 다른 것으로 보상해 줄 테니 '복직 투쟁'은 이제 그만하라"는 회사 쪽의 회유도 강했다. 그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서 질 경우 빚도 빚이지만 그동안 재판비용으로 썼던 모든 것도 책임져야 한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다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씨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이 시간 동안 겉으로는 웃어도 사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심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한씨의 표정이 일순간 어두워져도 이내 웃음을 다시 머금는다.

"남편이 늘 얘기합니다. 삶이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주는 것이라구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힘겨움도 함께 극복해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찾아온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죠."

이 힘이 8년의 세월을 함께 버티게 해 준 그들 가족의 힘이다.

한씨는 그 얘기를 하면서 복직 투쟁하는 남편 사진이 담겨 있는 액자를 가리켰다. 액자 한 켠에는 '투쟁을 하고자 하는 자는 방법을 찾고 투쟁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는 구실을 찾는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남편 김씨가 직접 쓴 글이라고 했다.

남편이 쓴 그 글처럼 '구실'을 찾아 포기하는 대신 끊임없이 '방법'을 찾아 살아온 8년은 더 이상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함께 '투쟁해온' 이웃과 '동지'들이 있기에 둘이 원한다고 해서 이제는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했다. 어쩌면 이웃과 '동지'들은 그들에게서 희망을 증거를 찾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이다.

"8년 동안의 투쟁이 우리 두 사람만의 힘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으려 했던 이웃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고 이기든 지든 우리는 그 이웃들과 다 함께 싸워 가고 있는 거니까요."

노동운동의 '노'자도 몰랐던 한 씨가 남편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87년 노동자들이 싸우는 것을 봤을 때 그때는 '저 사람들이 왜 저럴까'하고 의아해 했었지만 이제는 알지요. 요즘은 다른 주부들이 그런 소리를 하면 제가 설명해 주기 바쁘답니다."

▲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아왔지만 함께 있으면 더 없이 행복하다.
ⓒ 김정숙
두 딸도 마찬가지다. 꼬마였던 두 딸이 8년의 세월 동안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5학년이 됐고 그저 몸만 자란 것이 아니라 '아빠가 하는 일이 옳다'는 정신적 신념까지 함께 성장했다.

딸들은 복직투쟁에 함께 하며 아빠가 머리띠 두르고 투쟁하는 과정을 다 보며 자랐다. 큰 딸 소영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소감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직업을 갖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힘줘 말하기도 했다.

"5년 전 아이들이 아빠가 좋아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때 남편이 딸아이의 방 벽지 위에 커다랗게 가사를 다 써 주었지요. 그걸 늘 함께 부르고 자랐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적힌 때 묻고 낡은 벽지는 여전히 그대로다. 그 가사 옆에는 원직복직 쟁취, 민주노조 사수, 노동자 정치세력화 등의 구호가 함께 적혀 있다.

'여성평등 세상', '남존여비사상 분쇄'라는 구호도 눈에 띈다. 가끔 남편이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라치면 한씨는 웃으면서 벽에 적혀 있는 구호를 가리키곤 한단다.

▲ 남편이 두 딸에게 가르쳐 준다며 5년전 쯤 벽에다 써놓은 노래 가사와 구호들.
ⓒ 김정숙
그러나 남편은 좀처럼 그런 면이 없다. 그래서 한씨는 "한 남자로서 사랑하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 존경한다"고 서슴지 않고 말했다.

노동운동의 과정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구구절절이 말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삶을 살아온 남편'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늘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실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존경하며 언제나 힘이 돼왔다. 그러나 지나온 8년의 역사는 이제 그 둘만의 것은 아니다.
ⓒ 김정숙
"그런 남편이 복직해서 현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다른 대단한 뭔가 돼 주기를 바라지 않아요. 해고가 부당했고 그래서 정당하게 들어가 예전처럼 노동현장에서 성실히 일하는 것이 최고의 바람입니다. 남편의 꿈도 그것이구요."

지금 한씨 앞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8년을 끌어 할 만큼 했으니 이제 타협해서 편하게 살라는 것'과 '희망을 잃지 않으면 노동자의 가족으로 땀 흘리며 다시 이웃들에게 희망이 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이들 가족, 여전히 긍정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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