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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9일 오전 8시 30분경. 나는 '자존심(Pride)'을 버렸다. 내세울 것 하나 없이 초라하기만 한, 그러나 부끄럽지 않은 내 자존심을 길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 날 출근길에 아내를 내려주면서 "저녁 때 집에서 보자"며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고 '빠빠이'를 하던 중 "쿵"하는 충격과 함께 잠시 정신을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정신을 잠깐 놓친 사이 정차해 있는 택시를 뒤에서 받아버린 것이다.

▲ 전에 타고 다니던 내 차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거의 흡사하다. 흰색 프라이드를 볼 때마다 옛 분신이 떠오르는 것 같아 흐뭇해지곤 한다. 요즘에는 이 차종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참을 돌아다닌 후에 겨우 한 대 발견했다.
ⓒ 윤태
다행히 택시 기사는 겉으로는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지 않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부득이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결국 수리비만 주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입원까지 가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는 이번 사고 건을 계기로 며칠 쉬고 싶다고 했다. 이른바 '막말'로 멀쩡한데도 다음날 아프다고 연락하면 어쩔 거냐고 하면서 보험 처리할 것을 권유했다. 보험료율이 인상돼 나만 손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쩌랴! 택시기사가 '막말'까지 운운하고 나오니….

여하튼 사고 뒷처리는 그렇게 해결됐다. 문제는 망가진 나의 '자존심' 프라이드를 회생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앞 범퍼를 바닥에 질질 끌며 대롱대롱 떨어질 듯 말 듯 그렇게 위태롭게 사무실까지 차를 몰고 왔다. 라디에이터(냉각장치)가 터져 냉각수가 상당히 빠져나갔고, 엔진의 온도계는 위험 수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무실 근처 카센터에 견적을 의뢰하니 최소 30만 원은 있어야 한단다. 라디에이터와 범퍼는 기본이고 축이 휘어지고 엔진이 한쪽으로 밀려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신중히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고민에 빠졌다. 폐차해? 고쳐? 양자택일을 놓고 하루 종일 전전긍긍했다.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세상의 모든 걱정과 시름은 내게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사형 선고'를 내리기로 말이다. 견인차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프라이드의 뒷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왜 '그깟' 70만 원짜리 중고차 '자존심'에 집착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낸 것처럼 허전하고 또 목이 메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정'때문이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간 그 차와의 인연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10월 식구들 모르게 중고 자동차를 70만 원에 구입했다. 당시 여자 친구(지금의 짠순이 아내)에게 20만 원, 그리고 여자친구를 통해 예비 장모님께 30만 원을 빌렸고 나는 20만 원을 보탰다.

93년 4월식 프라이드 팝(POP) 3도어 흰색, 노 파워 핸들, 창문 수동, 트렁크 수동, 연료 주입구 수동, 당시 주행 거리 18만5천km였다. 쉽게 말해서 핸들 돌리는 데 땀을 빼야 하고(특히 주차시), 창문 여닫을 땐 손으로 돌리고, 트렁크를 열려면 키를 빼서 뒤로 가야하고, 기름 넣을 때도 주유원에게 키를 줘야하는 시스템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주유 경고등에 빨간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시동이 꺼지는 문제까지 있었다. 연료량이 정상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단점이 있었지만 미리 기름을 넣어두면 문제될 게 없었다. 옛말에도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물론 1년 4개월 동안 이 차를 타면서 세 번이나 기름이 바닥을 쳐 길바닥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등 애를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보험 서비스를 불러 '간단히' 해결했다.

운행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기름을 가득 채우면 약 33∼34리터로 600km는 너끈히 달렸다. 휴가철 찜통 더위 속에서 10시간 넘게 길바닥에 지체·정체돼 있어도 끄떡없었다. 간혹 연기 풀풀 나는 차를 세워 놓고 애 먹는 운전자들을 보면서 역시 내 차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외형이 어떻든 간에 고장이 없으면서 뛰어난 연비 등 내실만 있으면 그만 아닌가(사실 연애 시절부터 나는 짠순이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겨울에는 불편이 많이 따랐다. 최고 영하 15도까지 내려간 지난 겨울에는 내 '자존심'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소 20분은 시동을 걸어 놔야 온기가 돌았고 달리는 동안 찬바람이 스며들어 안전 운전하는 데도 방해가 됐다.

무엇보다도 불편했던 점은 바로 '문짝이 얼어 붙는 것'이었다. 키 구멍은 물론 문틈 사이로 들어간 눈이 얼어 붙어 아침마다 애를 먹어야 했다. 추운 겨울날 아침부터 물을 끓여 차 문짝에 쏟아 붓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이 때마다 짠순이 아내는 나의 '자존심'이 동상에 걸린 것보다는 '쓰지 않아도 될' 가스와 물이 낭비되는 것에 더 마음 아파했다. 그래도 난 감히 차를 바꾼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폐차하는 그 날까지 새 자동차는 없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 성남 은행동 남한산성 중턱에 위치한 우리 동네 모습이다. 좁은 골목에 일렬주차돼 있는 모습을 보면 주차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조금이나마 넓은 골목에는 또 얼마나 많은 차량이 즐비하게 주차돼 있는지 짐작이 된다. 내 차 프라이드는 이러한 골목을 잽싸게 누비며 숱한 이삿짐을 날랐다.
ⓒ 윤태
프라이드에 대한 불편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70만 원을 주고 샀지만 그동안 700만 원 이상의 값어치는 충분히 해냈다고 생각한다. 결혼과 함께 이사하면서 프라이드는 그 '괴력'을 과시했다. 성남으로 이사하면서 프라이드는 숱한 이삿짐을 책임졌다.

'깎아지른' 절벽을 방불케 하는 성남 남한산성 중턱의 신접 살림집에 뻔질나게 이삿짐을 날랐다. 게다가 몸집이 크지 않은 탓에 숨막히는 좁은 골목도 요리조리 잘 빠져나갔다. 서초구 재활용 센터에서 기다란 책장이나 비교적 부피가 큰 중고 가구를 실어 나르는 데 프라이드는 제법 한몫 했다.

시골에 내려가면 내 차는 '달리는 냉장고'가 돼 농산물을 가득 싣고 큰누나 집이나 처갓집에 신선한 농산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결혼 전 상견례 때 그 차로 장인장모님을 시골까지 모셨고, 시골 아버지께서 서울에 올라오시면 그 차로 서울 구경도 시켜드렸다. 또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진부령, 한계령 등 험하디 험한 '강원도 일주'를 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자존심'은 상처도 많이 입었다. 찢기고 찌그러지고 깨지고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상처 나고 몰골 사나운 모습이 오히려 도움을 줄 때가 많았다.

차 가진 사람이 가장 골머리를 썩게 되는 '주차 문제'. 하지만 난 별로 고생한 적이 없다. 사무실, 식당앞 등 어느 장소든지 주차·정차할 때마다 키를 꽂아두면 편리했다. 운전자들 혹은 주차관리인들이 알아서 내 차를 움직여 다른 차를 댔고 용무를 마치고 나오면 대충 아무 곳에나 내 차는 주차돼 있었다.

그렇다고 도로변 등에 불법 주차를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건물 내 주차 공간이 부족하거나 잠시 동안 차를 세워놓아야 하는 경우 그 건물, 식당 주변에 키를 꽂아둔 채 차를 세워 놓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설마 끌고(훔쳐) 가겠어?"라는 믿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다. 간혹 "정말 누가 끌고 갔으면 어떡하지?"하고 걱정을 한 적도 있지만 그야말로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여하튼 나는 내 차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오히려 내 차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호텔에 들어가고, 자동차 극장에 들어가도 내 차는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시골에 가면 여섯 대의 차가 앞마당에 세워지는데 나를 제외한 5남매는 비교적 잘 나가는 것이었다(소나타 3, 트라제, 누비라, 아반떼, 스펙트라). 물론 차의 이름과 크기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형제들은 간혹 "차 안 바꾸냐?"며 은근히 내 '자존심' 비하 발언을 하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최고 연비와 잔 고장이 없음을 강조하며 '자존심'을 치켜세우곤 했다. 큰 차는 줘도 싫다며 나만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오랫 동안 프라이드의 매력에 푹 빠져있던 나는 사고 이후에도 또 다시 같은 중고차를 구입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파워 핸들, 파워 윈도우의 유혹을 못 이기고 결국 '파워있는' '중고 경승용차'를 구입했다.

지금도 간혹 한때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던 그 자동차를 볼 때가 있다. 흔한 차는 아니어서 차가 많다는 서울 거리에서도 올 한해 동안 서너 번 정도밖에 못 봤다. 그때마다 나는 지난날 내 분신을 보는 것 같아 옛 추억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전관예우' 차원에서 프라이드가 차선 변경 신호를 넣으면 여지 없이 '양보'해 줬다. 이 정도면 나도 자존감 있는 인간이며, 지조 있는 인간이 아닌가.

나는 결코 프라이드 예찬론자가 아니다. 다만 이 차를 몰았던 1년4개월여 동안 잔고장 하나 없이 늘 함께 했던 '고마운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쭙지 않았던 '그 차'가 없었더라면 무슨 수로 이삿짐을 나르고 또 장인 장모님, 아버지를 모셨으며 시골에서 신선한 야채를 갖다 먹을 수 있었겠는가. 구구절절 열거하지 않아도 내가 그 작고 허름한 차에게 받았던 도움이나 고마움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누구든지 '첫 차'에는 정이 많이 간다. 무난하게 차를 이용했던 사람도 폐차하거나 중고차 시장에 넘길 때는 많이 서운함을 느낀다고 한다. 하물며 여자 친구와 예비 장모님의 재정적 도움으로 어렵게 첫 차를 구입한 나는 어떻겠는가. 또 차의 외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허름한 모습을 내 '자존심'이라고까지 여겼던 '그'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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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통과 대화를 좋아하는 새롬이아빠 윤태(문)입니다. 현재 4차원 놀이터 관리소장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며 착한노예를 만드는 도덕교육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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