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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국 체류 중이며, 이 기사 속 이야기는 미국 현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 편집자 주)

하루도 커피 없이는 못 사는 나의 책상 맡에는 언제나 큼지막한 커피잔이 놓여 있다. 아침을 굶어도 하루를 보내는 데 별 지장이 없지만, 커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커피는 명백한 중독성이 있는 '합법화된 마약'으로, 필수 영양소 이외의 다른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내 몸은 이미 독립성을 상실한 상태다.

내가 학교 앞의 스타벅스를 자주 찾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번째는 같은 가격에 가장 독한 커피를 가장 많이 담아준다는 아주 단순한 경제성의 이유 때문이고, 두번째는 내 눈을 즐겁게 하는 스타벅스 매장의 시각적 미감 때문이다.

캠퍼스 안에 있는 커피숍답게, 한 층을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책상은 물론, 아예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도록 긴 소파에 우아한 벽난로까지 갖추어 놓았다. 학생들은 커피만 하나 달랑 사서 온종일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대자본은 이렇게 관대하기도 하다. "안 사려면 말라"는 한국식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미국 스타벅스의 이런 자상함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느 때처럼 녹색의 원 안에 인어가 그려진 종이컵을 들고 커피숍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때 스타벅스 매장 밖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학생들을 보았다. 그들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매장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학생들의 피켓에는 스타벅스의 상호와 도안을 패러디한 '프랑켄벅스'와 '스타퍽스(Starfucks)'가 새겨져 있었다. 그들이 나누어준 전단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스타벅스는 이디오피아 등의 커피생산지에 구매대금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제 삼 세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덕기업일 뿐 아니라, 국민 건강을 위해 유전자 조작식품과 홀몬성장 유제품을 사용하지 말라는 우리들의 요구를 계속해서 묵살해온 무책임한 기업이다."

그날 커피맛이 어떠했을지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입보다 더 당황한 것은 그 흰 종이컵을 쥐고 있던 나의 손이었다. 자신을 미국보다 이디오피아에 더 가깝다고 여기는 한국 유학생이 커피를 들고 매장을 나서고 있을 때, 한국이나 이디오피아와 별로 관계가 없는 미국 학생들은 제3세계의 노동력 착취를 소리높여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장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그 문전 '영업방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나와 있던 뚱뚱한 경찰 아저씨마저 두 명의 금발 여학생에게 둘러싸인 채 나와 같은 설득 대상이 되어 있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총으로 무장한 '구사대'를 동원해 파업중인 노동자를 사살한 잔혹한 기업주였다. 그는 대중을 달래기 위해 학교, 도서관, 공연장에 많은 기부를 하기도 했으나(그것도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결국 아일랜드로 돌아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국에서 그는 어린이 위인전집에 빠지지 않는 위인'으로 존경받는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아담 스미스가 한국에서는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서 호령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정치인들 입에서 걸핏하면 나오는 구호가 '시장 기능'이다. 그 '시장'이 현실사회에서 구현될 수 없는 조건을 전제로 하는 이론적 개념이라는 건 고등학교 사회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다(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걸 맡기기 위해서는, 모든 차들이 소음이나 배기가스 없이 달려주어야 하고, 기업은 환경파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하며, 소비자는 신이 되어 모든 상품에 대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언제든지 원하면 기업주가 되어 시장에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유로운 '시장의 파라다이스'로 미국을 꼽는다.

그러나 내가 사는 미국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낙원이 아니다. 이곳의 방송사는 국민의 35퍼센트 이상을 시청자로 가질 수 없도록 규제받고 있고, 주시청시간(Prime time)의 처음 한 시간은 반드시 지역 방송에 할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의 버스는 국영이고, 언제나 적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금현실화'니 '민영화'니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곳에서 밤늦게 다니는 버스는 언제나 비어 있고, 단 한 명을 위해서도 매일 장애인용 버스가 운영되고 있다.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버스회사가 민영화되는 순간, 한국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신으로 모시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저녁시간부터 학생들의 귀가를 서둘게 만들거나 장애인들을 종일 집 안에 앉혀놓을 것이다. '효율'을 마다하고 적자를 무릅쓰는 이들은 그 '시카고 학파'의 가르침을 잊고 있는 바보들일까, 아니면 고약한 사상에 물든 불순분자들일까?

얼마 전에는 스타벅스 옆의 저가 의류매장인 '갭(Gap)'이 봉변을 당했다. 그 회사가 최저임금도 지불하지 않는 '착취공장(sweatshop)'을 통해 저개발국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매장의 쇼윈도는 전단으로 도배되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부 과격한 학생들이 밤에 몰려가 매장 앞에서 '단체방뇨'를 했다고 한다. 직원들을 멋대로 해고하고, 심지어 노동조합마저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기업들이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고 하니, 아마도 그 기업주들은 카네기 위인전을 읽고 자란 모양이다.

걸핏하면 미국 운운하면서 자신의 부당한 권력을 유지하려는 한국의 언론이나,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탈규제를 위한 협박수단으로 쓰는 기업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미국이 그렇게 좋으면 그 낙원을 찾아 하루 속히 떠날 일이다. 그렇게 매일 미국찬가를 부르면서도 한국에 계속 눌러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부랴 부랴 짐을 싸들고 미국으로 향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웃고 있자니, 벌써부터 이곳 친구들의 물마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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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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