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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의원 공개 지지를 선언한 최보은 씨의 인터뷰 기사를 실은 월간 <말> 2002년 3월호. ⓒ 구영식 기자
박근혜 의원을 둘러싼 여성계 내부의 논쟁이 뜨겁다. 표면적인 논쟁구도는 박 의원에 대한 지지 논란이지만 그 심층에는 여성의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여성계의 대립되는 시각이 드러나 있다.

'박근혜 논쟁'은 월간 <말> 3월호(2002년)에 실린 최보은 월간 <프리미어> 편집장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촉발되었다. 인터뷰를 했던 박형숙 기자의 평가처럼 '초강력 아줌마 페미니스트'인 최 씨가 "박근혜가 출마하면 그를 찍겠다"고 발언한 것이다.

'박근혜 화두'와 여성의 현실정치 참여

우선 최 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내가 '출마한다면 박근혜 의원을 찍겠다'고 공언할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여성정치 참여현실의 참을 수 없는 후진성에 대한 역설적, 반어법적 수사였다. … 박근혜가 구체적 화두로 다가온 것은, 그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 경선주자로 나선 뒤였다. 그전부터 이 땅에서 여성의 참정권 행사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철학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여성진영은 왜 참정권 행사를 여성 독자의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바라보지 않고 '진보진영'의 틀 속에서 바라보려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월간 <말> 3월호, 80∼81쪽)

박 의원을 통해 여성의 현실정치 참여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본격화하자는 것이다. 다시 최 씨의 '문제의식'이 잘 드러난 다음의 발언을 보자.

"가능성을 믿고 때를 무한정 기다리기에는 여성의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지 않는가. 여성의 정당한 권력획득, 정치계에서의 합당한 지분확보가 1년 지연될 때, 그 1년 동안 성차별 현실에서 희생당하는 여성의 수를 생각해 보라. … 만약 이 땅의 여성들이 여성의 참정권 행사와 정치세력화를 위해 피를 흘렸다면 여성들의 정치의식이 지금처럼 열악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박근혜를 훨씬 더 치열한 토론과 관심의 담금질 앞에 두어야 그 뒷세대인 정치인인 이미경, 추미애 의원도 그에 합당한 주목을 받을 수 있다."(월간 <말> 3월호, 82쪽)

'박근혜 지지'가 여성들에게 진보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이러한 최 씨의 '공개적인 박근혜 지지'는 여성계 내부에 큰 논란을 불러왔다. 특히 여성문인동인 '살루쥬'에서는 '박근혜 논쟁'의 후유증 때문에 정정임 씨(김해 여성복지회 관장)가 대표직을 그만뒀을 정도다.

"여성임을 부정한 케이스"..."여성주류화의 현실적 대안"

그리고 월간 <말> 4월호에는 '박근혜 논쟁'을 둘러싼 '페미니스트 조현옥-장정임-김정란 릴레이 논쟁'이 실렸다. 먼저 조현옥 정치학 박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며 박근혜 의원 지지에 대해 반대의견을 분명히 했다. 하나는 "박근혜 의원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그는 정치인으로서 무슨 성과와 업적이 있으며, 특히 여성문제와 관련해 무엇을 하였는가"이다.

"그의 정치적 기반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버지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며, 현재 정치권에서 세를 모으고 있는 근간도 거기에 있다. 박근혜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시절에 맛보았던 여러 가지 이득을 잊지 못하는 지역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박근혜 의원은 개인적 정치인이거나 여성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딸'로서 그 좋던 시절의 향수를 달래주거나, 또는 다시 그 영광을 가져오는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

… 지난 4년여의 정치생활에서 박근혜 의원이 여성들을 위한 정책이나 관심이나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 박근혜 의원은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거나 여성관련 정책을 개발하기보다 오히려 여성임을 부정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하긴 그는 자신이 독립적인 여성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순간 그가 정치적 터전으로 삼고 있는 아버지의 상징을 깨뜨려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가 '우연히' 여성이고 또 권력의 핵에 가까이 가 있다고 해서 그를 지원할 수는 없다."(월간 <말> 4월호, 85∼86쪽)


하지만 '살루쥬'의 전 대표였던 장정임 씨는 최보은 씨의 '박근혜 공개지지'에 공감을 표시하며 "박근혜도 여성의 생각을 배우고 두렵게 여기는 기회가 되도록 '박근혜 효과'를 십분 활용하자"는 얘기로 최 씨의 발언을 해석했다. 그는 최 씨의 발언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여성대통령 만들기 진입이란 실현가능성을 향해 놀랍고 용감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내가 최보은 씨 말에 쌍수로 동의한 것은 그의 제안이 무력감만 가지고 말로만 여성주류화 선언을 외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으켜 '여성대통령 만들기'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 우리가 만약 박근혜 같이 대중성 있는 여성과 연대하여 가열차게 노력한다면 여성대통령에 대한 반여성적인 정치적 환경은 조금이라도 다르게 바뀔 것이다. … 안타깝게도 이미경 의원이나 추미애 의원은 현실적으로 박근혜만큼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 선거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 아니라 유권자 현실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여성후보로서 박근혜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월간 <말> 4월호, 87∼88쪽)

장 씨는 박 의원이 '마이너에 속한다'고 전제하고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남성보다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여성이 정치적으로 단결해보는 경험이 없이는 여성주류화의 길은 너무나 멀다"며 "이번에 '박근혜 난장'이 한번 크게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박근혜는 박정희·육영수와 지역주의의 그림자에 불과"

세 번째 논쟁자로 등장한 김정란 교수(상지대 불문과)는 "박근혜의 사람됨을 신뢰하는 편"이지만 "정치적으로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김 교수는 박 의원을 지지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정란 교수는 박근혜 의원 지지론에 대해 반대의견을 냈다. 월간 <말> 2002년 4월호. ⓒ 구영식 기자
"나는 박근혜가 위치하고 있는 정치적 역학 지평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박근혜를 지지할 수 없다. 최보인과 장정임은 언제까지 박근혜를 '독재자의 딸'로 자리매김할 것인가, 이제는 박근혜를 독자적인 정치인으로 보아주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 내가 박근혜가 누리고 있는 정치적 후광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모든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그 신화적 요소 때문이다.

나는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그 신화를 누리려고 하는 한,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박근혜는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이, 비이성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신화적 아우라에 감싸인 채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 유권자들의 대부분은 박근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신화의 살아 있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박근혜임이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아니다. 박근혜는 언제나 박근혜의 타자이다."(월간 <말> 2002년 4월호, 90쪽)


김 교수는 박 의원을 '독재자의 딸'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야말로 '본질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즉 "박근혜를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를 완전히 복권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근혜 지지'는 '지역주의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는 지역감정과 떼어놓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박정희가 씨앗을 심어놓은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박근혜라는 정치인의 코드는 바로 이 층위에서 작동한다. 그녀는 여성이라는 코드로 작동하지 않는다. 박근혜가 스스로를 여성의 코드로 자리매김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녀는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않고 합리적 정책 개발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쌓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월간 <말> 4월호, 91쪽)

그래서 김 교수는 "박근혜 지지는 최보은이나 장정임의 순진한 바람처럼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작동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일축했다. 오히려 "우리 사회를 지역주의의 망령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판단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다.

그 동안 한국정치사에서 여성이 대선후보로 나온 적은 드물었다. 김옥선 씨가 92년 14대 대선에 출마하긴 했지만 그 역시 '남장'을 해서 겉으로 보기엔 남성후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는 결정적으로 대중성이 너무 부족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의원이 대선후보로 나온다면 해방 50년만에 가장 대중적인 여성정치인이 대권에 도전하는 사례로 기록될지 모른다. '박근혜 논쟁'은 바로 이 지점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래서 박 의원이 대선후보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 이와 동시에 이 논쟁도 다시 거세게 불붙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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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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