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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박사' 파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신정아(35) 동국대 조교수가 16일(현지시간) 인천공항발 대한항공 KE81편을 타고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뒤 현재의 심정 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피한채 공항을 빠져 나가고 있다.
'가짜 박사' 파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신정아(35) 동국대 조교수가 16일(현지시간) 인천공항발 대한항공 KE81편을 타고 미국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뒤 현재의 심정 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피한채 공항을 빠져 나가고 있다. ⓒ 연합뉴스 김현준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신정아씨가 수석큐레이터, 동국대 조교수, 광주비엔날레 총감독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그 출발점은 신정아씨의 (위조된) 학력이 높아서가 아니라 일부 기업 미술관의 큐레이터에 대한 낮은 인식 때문이다."

신정아 교수를 처음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했던 박영택 경기대 미대 교수는 신정아 사건의 출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박 교수는 97년 당시 금호미술관에서 수석큐레이터로 활동 중이었다. 박 교수는 "97년 7월에 호안 미로 전시회를 열면서 전시장에서 영어안내할 사람이 필요해 채용했다"며 신정아 교수를 채용했을 당시를 추억했다.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신씨가 갑자기 큐레이터로까지 '상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신 교수가 미국의 캔자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미술관에서 인턴십까지 마친 재원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사립 미술관의 오너들이 큐레이터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아르바이트생' 신정아가 큐레이터 된 까닭

"당시 나와 함께 큐레이터 한 명이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미술관 측과 갈등이 많았다. 기업 미술관이 대다수 개인화랑을 운영하는 식이나 특정 기업 관련 전시회를 주로 하려고만 한다.

하지만 큐레이터는 고등의 미술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이고 큐레이터 자기만의 미술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러니 오너들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도 금호미술관을 그만두고, 같이 일하던 큐레이터도 그만 두자 아르바이트생이었던 신씨가 갑자기 큐레이터라는 직함을 달고 활동을 시작했다."


박 교수는 "미술관의 입장에서는 갈등이 잦았던 전 큐레이터보다도 신씨가 편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 후에도 대중적인 전시회를 많이 여는 등 미술관의 홍보에도 신씨가 많은 역할을 해 오너에게는 유능한 인물로 비춰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큐레이터는 현대미술에서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미술전공자들이 큐레이터를 꿈꾸고 있으며 그와 함께 수요에 비해 너무나 많은 큐레이터들이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2001년부터 실시된 박물관미술관진흥법에 의해 큐레이터(학예사) 자격증을 딴 사람 수를 따져보면 2007년 현재 약 1700명 정도다. 더군다나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외국에서 미술사 석박사 학위를 딴 사람들의 수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작 정식 등록된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유명 사립미술관의 경우 인턴이 아닌 정식 큐레이터는 대부분 1명에서 3명 정도에 불과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학예직)은 18명에 불과하다.

신정아 교수는 97년 금호미술관에 '영어 안내 아르바이트생'으로 미술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신정아 교수는 97년 금호미술관에 '영어 안내 아르바이트생'으로 미술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 오마이뉴스 이경태
큐레이터,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그늘

어렵게 큐레이터가 되더라도 박봉과 엄청난 노동강도에 시달린다. 김미순 세오갤러리 자문위원은 "신정아씨와 달리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큐레이터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며 큐레이터계의 후배들이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했다.

또 김 위원은 "수익성을 함께 고민하는 사립 미술관의 입장에서 지원 없이도 자신이 알아서 '후원'을 얻어와 전시회도 여는 신정아와 같은 인물이 눈에 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미술계가 좀 더 발전했다면 신정아 같은 인물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한 검증 시스템이 있고 전문 이론가가 많고 연구가 활발했다면, 신정아씨 같이 영어회화능력이나 언변이 뛰어나다고 해서 스타 큐레이터가 되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처럼 큐레이터계에서 박봉과 중노동보다 심각한 문제는, 신정아 사건에서 보여지듯 기업이나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사립미술관에서 제대로 된 인사검증 시스템 없이 큐레이터를 채용하고 밀어주는 것이다.

김영순 전 예술의 전당 전시예술감독은 "신정아는 큐레이터의 자질을 따져봤을 때 나올 수 없는 인물"이라고 단정했다.

"큐레이터는 미술사·미술경영 등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과 당대의 인문학적 지식 소양까지 갖춰야 하는 전문직이다. 현대 미술의 생산·소비·유통이 이뤄지는 미술관 안에서 당대의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최고의 지식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신정아와 같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립미술관의 도의적 책임도 크다. 몇몇 사립미술관의 오너들이 미술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소신 있는 큐레이터들이 미술관의 부조리를 지적하니깐 그런 이들 대신 신정아 같은 인물을 쓰는 것이다."


"오너들이 미술관을 사유재산처럼 운영"

광주 비엔날레 재단 건물.
광주 비엔날레 재단 건물. ⓒ 광주드림 임문철
또 김 감독은 "지금의 언론보도도 문제"라며 "신정아 사건을 미술계의 학벌지상주의 풍조라 몰아붙이는 경향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과 같이 특수한 육성시스템이나 검증 과정이 없는 이상 신규채용 때 학력이 최소한의 검증 장치"라며 "신정아 개인의 문제를 확대해석하지 말고, 미술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적인 문제로 우선 일부 사립 미술관의 부도덕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오너들이 미술관 운영의 근본 정신인 '고급 문화의 공유'라는 가치를 망각하고 사유재산처럼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미술관을 설립하면서 세제 혜택도 받는데다 정부로부터 지원금도 얻고 있지만 정작 운영은 공공성에 위배되는 식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전문성과 미술관이 부재한 오너들의 입김이 미술관 운영에 영향을 미치다보니 작품의 관리나 관객의 안전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올해부터 정부는 박물관미술관진흥법에 따라 영세한 박물관과 미술관의 자격증을 소지한 큐레이터 고용을 위해 기관당 1명에 한해 월 130만원에서 140만원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

또 김 감독은 "비평이 사라진 미술계도 또 하나의 구조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김 감독은 "80년대 후반까지는 미술 비평이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큐레이터가 등장한 이후 건강한 비평이 사라졌다"며 "이에 대한 자성과 노력 없이는 신정아와 같은 거품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큐레이터가 작가의 발굴·작품전시·평가까지 맡게되면서 비평가들의 몫을 가져가게 됐다. 그럼에도 큐레이터의 전시회에 대한 담론·비평은 없다. 이런 구조적인 상황에서 작가들은 큐레이터와 가깝게 지내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다. 큐레이터의 활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비평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큐레이터들의 자질과 활동에 대해 온전한 평가가 이뤄지고, 미술계 안에서 제대로 된 전시 위계나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신정아#미술#큐레이터#학력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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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입사. 사회부·현안이슈팀·기획취재팀·기동팀·정치부를 거쳤습니다. 지금은 서울시의 소식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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