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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토루아 박물관, 뉴질랜드 마오리들의 삶을 볼 수 있다.
로토루아 박물관, 뉴질랜드 마오리들의 삶을 볼 수 있다. ⓒ 배지영
현기가 왔다. 작은 누나와 현기는 '모자 상봉' 하며 눈물을 쏟지 않았다. 한 사흘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듯 잘 생겼던 현기 얼굴은 살이 올랐고, 엉덩이는 서양 사람처럼 질펀했다. 그 애는 늦잠 자서 오래 기다리게 한 게 머쓱한지 "숙모, 내가 차에서 들으려고 CD 구워왔어요. 숙모도 맘에 드는 거 많을 걸요? 잘 했죠?" 했다.

우리는 렌터카부터 빌리러 갔다. 공항 안에 사무실이 있었다. 메이저 회사에 속하는 Hertz에 갔다. 큰 회사들은 전국이 지점으로 연결되어서 오클랜드에서 빌렸다가 남섬의 끝까지 가서 반납해도 된다. 값이 싼 렌터카 회사도 있는데 덜컥 계약했다가는 여행의 쓴 맛을 볼 수도 있다. 날마다 드는 보험료가 덧붙여지고, 주행거리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렌터카를 빌리려고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해 왔다. 우리 집은 군산, 전주 운전면허시험장에는 국제운전면허증 창구가 따로 있었다. 30분도 안 걸려서 발급 받았다. 뉴질랜드에서 렌터카를 빌릴 때는 국제운전면허증과 여권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용카드도 필요한데 만약의 사고를 위해서 보증금을 거는 의미다. 차를 반납할 때 돈은 돌려준다.

청정 뉴질랜드는 공장이 별로 없어서 물건을 거의 수입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이나 유럽차가 많다. 차를 빌릴 때는 맘에 드는 모델로 고르면 되는데 우리는 눈에 익은 차가 하나도 없어서 현기가 타보고 싶었던 차로 골랐다. 계약서를 쓸 때는 운전하는 사람과 보조 운전할 사람까지 함께 적었다. 든든한 작은 누나가 있어서 나는 '2빠' 운전수로 등록했다.

시내에서 주차하기, PAY HERE 앞에 차를 세운다. 보통 1시간에 1달러쯤 한다.
시내에서 주차하기, PAY HERE 앞에 차를 세운다. 보통 1시간에 1달러쯤 한다. ⓒ 배지영
우선 멈춰서 오른쪽 길을 내어주라는 뜻이다. 3초쯤 멈춰서 주위를 살핀 다음에 출발해야 한다.
우선 멈춰서 오른쪽 길을 내어주라는 뜻이다. 3초쯤 멈춰서 주위를 살핀 다음에 출발해야 한다. ⓒ 배지영
차 열쇠를 받아서 공항 밖으로 나와 우리가 탈 차를 찾았다. 여자로 살기에는 아깝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작은 누나는 거리낌 없이 오른쪽 운전석에 앉았다. 차를 빌려서 나올 때까지 까불고 느슨하던 분위기는 팽팽해졌다. 뉴질랜드에서 자기 차를 갖고 다니는 현기는 자기가 운전할 줄로 안 모양이었다.

"엄마, 여긴 한국하고 완전히 반대야. 엄마가 어떻게 운전해?"
"시끄러, 렌터카는 21세 이상만 가능한 거야. 네가 하면 불법이야."


우리가 탄 차는 공항을 벗어나기도 전에 역주행할 뻔 했다. 차는 운전대만 반대로 있는 게 아니었다. 차선도 반대고, 방향지시등과 와이퍼도 반대였다. 교차로에서는 'ROUND ABOUT'라는 교통 법규를 따로 지켜야 한다. 무조건 정지, 무조건 오른쪽 차량 우선이다. 'GIVE WAY'도 오른쪽 차선을 내어주기 위해 3초 정도 멈춰서 주위를 살핀 다음 출발해야 한다.

작은 누나가 운전하는 차는 앞으로 나아갔지만 위태위태했다. 차 안에 앉은 우리는 한국에서 교통사고 났을 때처럼 행동했다. 무엇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잘못 없다고 발 빼기 위해 목에 핏대를 세우고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사람들 같았다. 현기가 많이 참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엄마, 'GIVE WAY'(양보)도 모르면서 무슨 운전이야? 엄마, 제발, 운전대가 눈에 익을 때까지만 내가 할게."
"이 자식이 컸다고 엄마를 무시해? 엄마는 할 수 있어."
"몰라. 엄마가 어디로 가든 난 상관 안 해. 나 없어 봐. 바로 역주행이라고!"


주유소는 셀프 서비스가 기본이다. 도시 밖으로 나가면 조금씩 비싸진다. 우리나라보다 기름값이 쌌다.
주유소는 셀프 서비스가 기본이다. 도시 밖으로 나가면 조금씩 비싸진다. 우리나라보다 기름값이 쌌다. ⓒ 배지영
고속도로, 아무 때나 앞 차를 추월할 수 없다. PASSING LANE에서만 가능하다. 통행료는 따로 없었다.
고속도로, 아무 때나 앞 차를 추월할 수 없다. PASSING LANE에서만 가능하다. 통행료는 따로 없었다. ⓒ 배지영
차에도 표정은 있다. 뒤를 보았더니 우리를 따라오는 차들은 알아서 비켜가는 모양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한숨을 놓았다. 이제는, 풍선이 삭아서 스스로 빠지는 바람 소리 같은, 허무한 웃음이라도 필요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이 냉랭한 상태를 건드려주면 좋을 것이다. 나는 시골 사람, 순박하게 말했다.

"우리, 뉴질랜드 왔으니까 호칭 떼고, 외국식으로 이름 불러요. 나는 민숙! 현기! 이래야지."
"나는 그럼 숙모보고 지영이라고 해도 돼요?"


오른쪽 운전대에 신경을 쏟고 있는 작은 누나도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아이는 고모와 엄마, 형아한테 '맞장'을 뜰 수 있는 기회를 반대했다. 싫다고 하는 아이 표정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렸는데 차창 밖으로 한때 뉴질랜드의 수도였던 오클랜드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작은 누나는 경기 종료 휘슬을 불기 직전에 터진 골처럼 시원하게 렌터카를 주차했다.

대도시인 오클랜드를 벗어나고 나서는 오른쪽에 운전대가 있는 차를 가지고 다녀도 사정이 조금 나아진다. 차량 통행도 적어지고 운전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거기다 우리가 주워들은 정보에 따르면, 21살이 안 되었어도 옆에 보호자가 있으면 렌터카 운전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자고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현기를 '1빠' 운전수로 임명한 셈이었다.

여행은 해밀턴을 지나고부터는 '늘쩡'했다. 슬슬 돌아다녀서 가속도가 붙지 않았다. 우리 성정이 갑자기 뉴질랜드 자연을 닮아서 느긋해진 건 아니었다. 가끔씩 길을 잘못 들었다. 밤에 묵는 모텔에서 지도를 얻고, 지나는 사람들한테 길을 묻기도 했다. 그런데도 가고 싶은 곳을 한 방에 찾지 못해 헤맬 때가 있었다.

ROUND ABOUT, 둥글게 돌아가는 형태로 무조건 멈춤, 무조건 오른쪽 차량 우선이다.
ROUND ABOUT, 둥글게 돌아가는 형태로 무조건 멈춤, 무조건 오른쪽 차량 우선이다. ⓒ 배지영
몇 대의 밴에 나눠 탄 아이들이 교차로에서 비켜주지 않고 계속 도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 어느 차도 끼어들 수는 없다.
몇 대의 밴에 나눠 탄 아이들이 교차로에서 비켜주지 않고 계속 도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 어느 차도 끼어들 수는 없다. ⓒ 배지영
한국과 반대로 뉴질랜드는 겨울, 사람들은 오후 5시면 집으로 돌아간다. 한국처럼 거리의 밥집과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문화가 없다. 표를 끊는 절차를 거치는 관광지는 적어도 4시까지 가야 친절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날 오후, 우리는 로토루아 호수를 거쳐 로토루아 박물관을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교차로에서 차가 꿈쩍하지 않았다.

교통 표지판은 'ROUND ABOUT'였다. 몇 대의 밴이 장난을 치고 있었다. 둥글게 돌아가는 교차로에서 비키지 않고 돌면, 어떤 차도 낄 수가 없다. 현기 또래의 아이들이 음악을 크게 켜고 몸을 흔들면서 장난 치고 있었다. 우리도 끼어들고 싶다고 하자 한 자리를 내줬다. 현기는 빠른 랩이 나오는 CD로 바꿨다. 나는 차에서 내려 환호하는 애들을 구경했다.

한 번은 끝없는 호수가 있는 마을에서 차를 멈추었다. 작은 누나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는 호수의 새들을 따라 놀고, 나는 마을 안으로 걸어갔다. 그 때 현기는 렌트한 차가 익숙하지 않아선지 기름이 떨어졌다고 착각했다. 마침 조깅하던 여인에게 주유소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이는 "15분만 기다려"라고 하고선 사라졌다.

달리기하던 여인, 우리에게 기름을 갖다 주었다. 돈을 받지 않는 대신 길에서 자동차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당부를 했다.
달리기하던 여인, 우리에게 기름을 갖다 주었다. 돈을 받지 않는 대신 길에서 자동차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라는 당부를 했다. ⓒ 배지영
뛰어서 사라졌던 여인은 차를 끌고 왔다. 그리고 우리 차에 기름을 넣어주었다. 뭔가 한국적인 것을 선물하고 싶은데 가방은 모텔에 있었다. 고맙다는 표현은 투명한 상거래처럼 돈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누나는 뉴질랜드 여인이 태어나 처음 들었을지도 모르는 한국의 군산말로 "고마워서 어쩌까요?"를 몇 번이나 했다. 현기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돈을 내고 싶어요."
"아니. 괜찮아. 대신 약속 해. 즐겁게 여행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돼."


그이의 말을 계시처럼 받아들이고 나서부터는 'GIVE WAY'를 만날 때마다 자동차가 서고, 오른쪽을 살피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서로 운전 스타일이 달라서, 앞차와 간격을 두지 않고 바짝 붙었다, 지나치게 속도가 빠르다, 같은 이유를 대며 싸우기는 했다. 그러나 역주행의 구렁텅이로 빠지지는 않았다.

덧붙이는 글 | 6월 29일부터 7월 6일까지 다녀왔습니다. 뉴질랜드 북섬의 오클랜드, 해밀턴, 로토루아, 타우포, 파머스턴 노스를 랜터카로 다녔습니다. 글에 나오는 작은 누나는 우리 아이의 고모, 제게는 시누이입니다. 그러나 시누이와 올케라는 호칭이 조금 서럽게 느껴져 저는 작은 누나로 씁니다.


#랜터카#GIVE WAY#로토루아 박물관#뉴질랜드#오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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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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