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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브래스카 주의 대평원. 네브래스카뿐만 아니라 콜로라도, 캔자스, 노스 다코타 등은 한때 비옥한 곡창지대였지만 이제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잦아든 활기를 잃은 퇴락한 농촌이 되어 버렸다(Photo by Matthew Trump).
ⓒ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미국 농민들은 잘 사는가?

도전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이 질문을 받은 필자의 반응은 "글쎄요"이다. 한번도 이 당연한 질문을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찬히 한번 따져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필자가 겪은 사례 하나. 장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자동차 대리점. 연구년 중에 쓸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대리점에 들른 필자가 한국에서 온 농업경제학자라는 걸 안 영업사원이 들려준 말, "미국 농민들은 잘 산다"는 것이다! 바로 그날 아침에 쌀농사를 짓는 농민이 멋진 일제 지프를 현금을 내고 사갔단다.

이건 미국 농가 수입 대부분이 정부보조금에서 나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이다. 캘리포니아 쌀 농가의 소득에서 정부의 각종 보조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50%가 넘는다. 규모가 큰 농장은 한해 수십만불의 보조를 받기도 한다. 2006년 5월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상위 1% 농가는 평균 자산 200만불에 연소득은 20만불이지만 이 중 연간 정부보조금이 15만불이라고 한다. 그러면 상위 1%가 아닌 농가들은 어떨까?

현금으로 지프 사는 미 농민들, 정부보조금 없인 못 살아

우선 미국 농가의 평균소득은 2000년 6만2000불에서 2005년 8만1000불로 껑충 뛰었다. 이는 일반 가계에 비해 45%나 많은 수치다. 자산 규모도 농가는 59만불인 반면 비농가는 36만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수치로만 보면 미국의 농민들은 일반 가계에 비해 잘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농가를 자세히 해부하면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미국의 농가소득 중 농업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19%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2000년의 5%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이는 미국의 평균적인 농가는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소득이 비농업 부문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미국의 평균적인 농가는 농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 농가의 92%는 연 매출 25만불 이하의 소규모 가족농이다. 이들은 다시 한계농(11%), 은퇴농(14%), 취미농(42%), 전업농(24%)으로 나뉜다. 이중에서 전업농을 제외하면 농업이 생계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농가들이다. 미국 농가의 7%는 매출 규모가 25만불 이상인 대규모 가족농이고 나머지 1%만이 기업농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바로 8%의 두 집단이 전체 농업생산의 73%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미국 농민들은 잘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기업농의 경영수익은 1989년 12.8%에서 2003년 15.3%로 증가했다. 대규모 가족농들은 같은 기간 18%에서 14.7로 감소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익을 내고 있다. 반면 소규모 가족농은 1989년 -5.8%에서 2003년에는 무려 -28.5%의 적자를 보이고 있다(물론 정부보조금을 포함한 수치다).

즉, 미국의 농가는 평균치로 봤을 때는 잘 살지만, 이는 8%의 대규모 농가에 의해 왜곡된 수치일 뿐이다. 평균에 감춰진 모습을 해부하면 대부분 농가의 소득이 마이너스 상태다.

농촌 총각 신부 찾기 대소동, 미국에도 있다

사례 둘. 필자가 1989년 박사학위를 받고 근무한 첫 직장은 미국의 중북부 파고(Fargo)에 위치한 노스다코타 주립대학이었다. 밀과 보리, 유채 등을 주로 경작하는 전형적인 곡창지대인 노스다코타는 남한 면적의 3배에 해당하는 넓은 평원이지만 '평화로운 정원(Peace Garden State)'이라는 별명답게 전체 인구는 63만명을 약간 넘는다. 이는 제주도의 56만명과 비견된다.

문제는 이 인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는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는데 2005년 현재 군 단위 지역의 인구 기반 5000명에서 2020년에는 4000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같은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는 가족농의 해체와 젊은 층의 탈농촌, 향도시 현상에 기인한다. 농업의 수익성 감소로 가족농은 해체해 대농에 편입되고 있으며, 농촌 생활의 고립화로 젊은 층은 탈농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젊은 농부들도 가정을 이룰 상대를 찾기 어려워지고 있어 중요한 사회문제로까지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농촌마을을 지나다 보면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유령마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때는 흥청거렸을 마을 중심가에도 몇몇 노인들이 지나가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세계에서 1등 가는 농업 국가의 농촌 마을 모습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이는 폭넓은 사회안전망 제도를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유럽이나 일본 농촌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같은 인구 감소는 지역 경제 위축과 공동체 사회의 기능 단절로 이어지며, 이는 다시 인구 감소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조그만 학교에서 교사 한명이 다양한 학년의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미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게 바로 미국 농촌의 아픈 현실이다.

농업 수출 늘어도 왜 미국 농민들은 가난할까

▲ 2006년 9월 미국 시애틀에서 있었던 한미FTA 삼보일배 투쟁 장면. 당시 투쟁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남미 등 다양한 나라의 농민들이 함께 했다.
ⓒ 오마이뉴스 김연기
"규모와 독점이 경제적 힘을 높일 수 있지만, 그것을 낮출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쟁이다. 우리 식품체계의 모든 부문에서 농민들은 경쟁이 가장 심한 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거대 농기업(Giant)들이 주도하는 세계에서 그러한 경쟁은 농가의 소득을 낮추는 역할을 한다.

왜 농민들은 일시적으로 오직 소수에게만 이익이 되고,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해가 되는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애를 쓸까? 경쟁 때문이다. 왜 농민들은 계속적으로 생산을 많이 해서 농산물 가격이 낮게 유지되게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도 경쟁에 있다. 왜 농민들은 그들의 이윤을 지주나 거대한 농기업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는 낮은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역시 그 해답은 경쟁에 있다."


미네소타대학의 레빈스 교수는 미국 농가의 소득 문제가 소수의 대규모 가공업체나 종자회사, 유통업자 등 거대 농기업에 비해 열악한 시장 교섭력 때문이라고 보고, 농민들의 집단적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카길(무역)과 몬산토(종자와 비료), 타이슨(축산가공), 월마트(소매유통)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다국적 거대 농기업들이 욱일승천하는 반면 미국 농민들은 초라하게 쪼그라들고 있다. 가격 결정은 대부분 시장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고, 계통 출하가 아니면 판매할 시장을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농민들 사이의 경쟁은 NAFTA 같은 자유무역협정과 WTO 같은 다자간 협상이 진행되면서 이제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이제 미국의 채소 농가는 멕시코, 과일 농가는 칠레, 면화 농가는 브라질, 그리고 밀 농가는 호주나 캐나다의 농가와 싸워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소규모 가족농들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다. 시애틀의 DDA 협상장 앞에서 WTO를 반대하던 미국 농민들의 모습은 전혀 생뚱맞은 얘기가 아닌 것이다.

한미FTA 과실, 농부 아닌 거대농기업에게 갈 것

▲ 미국 아칸소 주 벤톤빌에 위치한 월마트 1호점 전경. 미국에만 3500여개 매장이 있는 월마트는 저렴한 상품을 갖춘 창고형 매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월마트에 납품하기 위해 농민들은 가격을 끊임없이 낮춰야 한다(Photo by Bobak Ha'Eri).
ⓒ Creative Commons
그렇다면 한미FTA는 미국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이번 협상의 대상이 아니었던 쌀이나 이미 완전 개방 상태에 가까운 밀과 옥수수 농가들은 별 변화가 없을 것이다. 오렌지나 유제품, 쇠고기 등은 시장 개방 폭이 확대됨에 따라 수출은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미FTA로 인한 한국의 수입증가액은 연 평균 3억7000만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중 관세가 인하되면서 다른 나라로부터 빼앗아 온 수입 증가액은 1억4000만불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 농업은 15년간 연평균 6700억원의 생산액이 감소하는 피해를 입을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농가의 소득 증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그 이유는 수입 증가액이 미국 농업 규모에서 봤을 때는 미미한 정도이고, 미국이 수출하여 생긴 국내 공급의 공백을 제3국이 채우는 소위 '수출진공효과' 내지 '수입유인효과' 때문이다.

수입유인효과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WTO 분쟁으로 확대된, 2004년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밀 전쟁이다. 공세적인 수출보조 정책은 미국산 밀의 수출 증가를 가져와 미국 내에서 밀 가격을 상승 시켰다. 하지만 이는 밀 공급 부족으로 이어져 다시 캐나다 산 밀의 수입을 증가 시켰고 역으로 캐다나 농민들이 이익을 챙기게 됐다. 이는 미국 수출정책의 과실을 미국 농민이 아닌 캐나다 농민들이 챙긴 것으로 현재진행형인 분쟁이다.

이러한 수입유인효과는 한미FTA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즉 한미FTA의 결과 발생한 미국 국내 시장의 공백을 캐나다나 멕시코 등의 농민들과 나누게 될 것이고, 이는 다시 멕시코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여러 나라 농민들과 나누게 될 것이다. 또 수입증가액은 카길 등 무역회사와 유통, 가공을 담당하는 중간 단계의 주머니를 우선 채울 것이다. 결국 한국 농민을 절벽 아래로 내모는 한미FTA의 과실이 온전히 미국 농민의 주머니에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적어 보인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농민들은 잘 사는가? '대부분 농가들은 그렇지 않다'는 게 필자의 대답이다. 농산물 수출 1위의 미국 농업, 하지만 농부들은 가난하다. 그 과실이 누구에게 가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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