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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보강: 29일 저녁 7시 25분]

▲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그룹 본사.
ⓒ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승연 회장의 부정은 이 시대 사라진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화그룹이 29일 김 회장의 경찰 조사를 앞두고 김 회장의 인간적 면모를 자세하게 소개한 자료를 배포했다. 보복 폭행 사건으로 김 회장에게 불리하게 형성되고 있는 여론을 일부나마 불식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사상 처음으로 재벌 총수가 폭행사건에 직접 연루돼 경찰의 조사까지 받고 있는 상황인데, 좋지 않은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한화 그룹차원으로 '회장 살리기'에 나선 것은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접한 누리꾼들은 "기업의 과민반응이 오히려 기업 이미지를 더 깎아내리고 있다"며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한화 "회장님은 '기러기 아빠', 자식사랑 유별나"

한화그룹은 이날 배포한 '김승연 회장의 인간적 면모'라는 제목의 보도 참고자료에서 ▲인간적 면모 ▲탁월한 경영 능력 ▲부모님에 대한 효심 ▲자식 사랑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나눠 김 회장을 둘러싼 에피소드들을 소개했다. 그룹차원에서 김 회장을 살리기 위해 '육탄방어'에 나선 셈이다.

특히 이번 사건이 김 회장의 아들과 연관된 점을 의식해 '자식 사랑' 부분을 부각시켰다. 김 회장이 지난 2월 그룹 인사팀에 지시해 부인과 자녀를 해외로 보낸 '기러기 아빠'들이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특별휴가와 항공비를 지원한 것도 세 아들을 모두 해외로 유학보낸 김 회장의 유별한 부정 때문이라는 것.

한화그룹은 이를 두고 "김 회장은 1981년 갑자기 29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다, 이러한 김 회장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를 일찍 여윈 김 회장의 보상심리였다"며 "김 회장의 부정이 이 시대 사라진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화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번 자료에선 김 회장의 효심이 남다르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김 회장이 김종희 선대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를 초청해 팔순 잔치를 올리고, 2006년 모친의 팔순 때는 축하 편지를 직접 작성해 영상 편지로 제작했다는 것.

한화그룹은 또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상황을 소개하면서 김 회장의 인간적 면모를 부각시켰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 회장은 계열사를 매각하면서 '신의 경영'을 바탕으로 종업원의 고용 승계를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20억~30억원 정도 손해가 나도 종업원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매각 작업을 추진했다고 적고 있다.

이 밖에 김 회장이 현재 살고 있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불우 이웃을 위해 매년 쌀 240포를 기증하고 있으며 2005년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한화이글스 김인식 감독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사령탑을 교체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누리꾼들 "폭행이 아버지 사랑? 차라리 가만히라도 있지"

이를 접한 누리꾼들 대부분은 한화 측 대응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화의 이 같은 대응이 오히려 김 회장과 기업 이미지만 더 깎아내리고 있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소나무'란 아이디를 가진 누리꾼은 "한화그룹이 김승연 회장을 구명하기 위해 나서는 것까지는 말릴수 없지만 그가 취한 폭력을 '이 시대 사라진 아버지의 사랑'으로 미화하고 극찬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다"며 "김승연 회장의 폭행은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라고 미화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돌발적이고도 한심한 폭행사건일 뿐이다"고 지적했다.

아이디 'SC138'은 "지금은 그냥 조용히 있는게 회사 이미지에 좋을것 같다"며 "회사의 이같은 대응이 오히려 기업 이미지를 더 깎아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한화그룹이 배포한 보도참고자료 전문.

▲ 한화 홈페이지에 오른 김승연 회장 가족사진들. [왼쪽] 1987.06.01. 일본여행에서 큰 아들과 함께. [가운데]1988.05.05. 어린이날. [오른쪽]1995. LA 디즈니 랜드에서 가족과 함께.
ⓒ 한화그룹 홈페이지
1.김승연 회장의 인간적 면모

계열사 매각시 고용 승계 및 신분 보장을 최우선

- 한화그룹은 IMF 외환위기 당시 그룹의 존폐 위기까지 거론될 만큼의 위기 상황에 처했었다. 김승연 회장이 미리 위기상황을 예측하여 IMF 위기 2~3년 전에 각 계열사에 강력한 구조조정을 지시하였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도 당시 그룹 외형의 절반에 가까운 주력 계열사의 매각을 성사 시키는 등 발 빠른 구조조정으로 이 위기를 타개했다

- 이 험난한 매각 과정에서도 김승연 회장은‘고용승계’를 최우선 협상과제로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김승연 회장이 평소 가지고 있는 ‘신의 경영’을 그대로보여 준 것이다.

- 한화에너지 정유부문의 매각 협상 시 김승연 회장은 상대방인 현대정유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20~30억은 손해 볼 테니 인수과정에서 근로자들을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 조건으로 신속하게 매각 작업을 추진할 것"을 제의하고 약속을 받아냈다. 실제로 계약이 성사된 후 한화에너지 706명과 한화에너지프라자 456명에 대한 완전한 고용승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 여기에 그치지 않고 회사 매각 이후 회사간의 문화차이로 그룹으로 복귀를 원하는 사람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받아주라는 지침을 내려 실제 복귀를 원하는 상당수 임직원이 그룹에 복귀해 근무 중이다.

퇴직 임직원들에 대한 애정

- 김승연 회장은 1998년 말 기업매각, 희망퇴직 등으로 회사를 떠난 전직사원들에게 '지난날 같은 깃발 아래 한솥밥을 먹던 소중한 인연을 되새기고자 이렇게 소식 전합니다, 전직사우들의 사랑과 성원 덕분에 회사가 어려움을 이기고 새 출발을 맞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친필 연하장 5000여통을 다음 해 달력과 함께 발송했다

- 설에는 400여명의 퇴직 임원에게 '지난날의 인연을 잊지 말고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며 부부용 은수저세트를 전달하기도 했다

- 김승연 회장의 이러한 정성에 대해 전직 임직원들이 감사편지와 연하장을 거꾸로 보내오는 바람에 서로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한다

- 김승연 회장은 이외에도 1998년 퇴직한 전 한화증권 상무가 딸의 투병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즉시 위로금을 전달했다

자그마한 인연도 소중히 여김

- 1998년 고 이성수 전 <경향신문> 사회부장의 빈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했을 때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김승연 회장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 김승연 회장과 이 전 부장은 그룹이 <경향신문>을 경영할 당시 그룹 총수와 노조 지도자라는 묘한 인연으로 만났다

- 나중에 <경향신문>의 개혁에 이 전 부장이 적극 협조하면서 두터운 인간관계로 발전했다

- 김승연 회장은 빈소에 8시간 머물면서 목을 놓아 통곡한 뒤 초등학생인 고인의 장남을 불러 "아버지가 해야만 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북촌마을 관련한 미담

- 김승연 회장이 거주하시는 가회동 인근 북촌마을은 조선왕조의 궁궐에 인접한 전통주거 밀집지역으로서 달동네로 불리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있는 마을이다.

- 김승연 회장은 이러한 이웃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는 2006년부터 이 마을에 매년 백미 240포(포당 10㎏)를 기증하셨다.

- 그리고 백미 기증 이외에도 마을회관의 노인정에 나오시는 어르신들이 편하게 세상 구경을 하실 수 있도록 야유회 개최를 할 때마다 버스를 대절해 드리는 등 편의를 제공하였다.

- 한편 김승연 회장의 어머님께서는 해마다 김승연 회장 생신 때면 마을회관 노인정에 떡을 돌리셨는데 김승연 회장의 북촌마을에 대한 지원 취지를 아시고는 떡을 돌리는 대신 백미 기증에 동참하셨다고 한다.

- 김승연 회장의 이러한 선행에 대해서 최근 북촌 한마음 봉사회 명의로 김승연 회장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임직원 가정을 위한 사랑의 행진

- 지난 2005년 11월 김승연 회장의 제안으로 우리 그룹은 그룹 내 질환이나 투병생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직원 가족을 위한 사랑의 행진을 실시했다.

- 1박 2일간 김승연 회장과 신입사원 100여명이 충청북도 수안보 일대의 50㎞를 걸으며 마련된 기금을 어려움을 겪고 있는 5가족에게 전달한 것인데 이 일을 계기로 2006년에도 계열사 CEO를 포함하여 임직원 220명이 3박 4일간 200㎞ 릴레이 형태로 행진하며 6000만원을 모아 그룹 내 질병 사우 및 가족에게 전달하였다.

- 사랑의 행진은 김승연 회장이 불우 임직원의 아픔을 그룹 가족이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것으로 진한 동료애를 느끼게 해 준 행사이다.

로버트 김 후원

- 김승연 회장은 로버트 김이 1997년 미 펜실베이니아주 앨런우드 연방교도소에 수감된 이후부터 2003년 7월 로버트 김에 대한 후원회가 정식 발족할 때까지 그를 지속적으로 지원했는데 이 사실은 주위사람은 물론 그룹 내 측근도 알지 못하였다.

- 이는 순전히 김승연 회장 개인적으로 지원을 한 것으로 로버트 김의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다른 대기업 관계자들은 로버트 김이 국가기밀 유출 혐의로 수감된 탓에 미국 정부와의 관계를 의식하여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미국 정관계 인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김승연 회장으로서는 용기있는 일을 한 것이며 인간적인 면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이러한 사실은 김씨가 2005년 10월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화 인터뷰를 통해 밝힘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방송에서 진행자 김미화씨가 "모든 재산을 재판비용으로 쓰시고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을 텐데, 생활은 어떻게 했나요?"라고 묻자, 김씨가 "한화 김승연 회장께서 상당히 오랫동안 뒷바라지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해주시고 계시고, 정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 것이다.

한사랑마을 어린이들 초청

- 김승연 회장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애인 어린이들의 자그마한 소망을 우연히 시청하고는 즉시 이들을 초청하여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었다

- 1999년 11월, 당시 인기있던 MBC '칭찬합시다' 프로그램에서 경기도의 장애인 복지시설인 한사랑마을 어린이들이 출연해 "바다가 보이는 콘도에 놀러 가고 싶은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된 김승연 회장은 아이들의 꿈을 이뤄주기로 했고, 결국 '한사랑마을' 아이들 160명은 그룹 직원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설악 한화콘도와 동해 바다를 여행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 이후 '한사랑마을'에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김승연 회장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김승연 회장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오게 할 수 없다"며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김인식 감독과의 의리

- 김승연 회장과 김인식 감독을 묶는 고리는 '신뢰'다.

- 김인식 감독은 2005년 한화의 감독으로 취임 후 시즌을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에 따라 동계훈련이 어려워 곧 시작될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감독교체를 할 것이라는 외부의 시각(프로 야구단에 있어 동계훈련은 시즌 성적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훈련기간임)이 팽배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승연 회장은 한화에서 영입한 김인식 감독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해서 성적만을 위하여 바로 교체한다는 것은 평소 그룹과 자신의 경영정신인 '신의'에 어긋난다며 김인식 감독이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믿고 기다리라고 주문하여 야구 관계자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 이에 김인식 감독은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결국 병을 극복하고 그해 한국시리즈 포스트 시즌 진출 및 WBC 4강을 달성하여 김승연 회장의 믿음에 화답하였다

-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끝난 뒤 김승연 회장은 김인식 감독과 한화 선수단을 초청하여 축하 리셉션을 마련하여 김인식 감독의 믿음의 야구에 대하여 치하했는데, 당시 김인식 감독은 "시즌을 앞두고 감독인 본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도 교체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김승연 회장에게 신뢰를 배웠다"고 감사하며 "병으로 한 때 불편한 몸을 가진 본인을 한화 이글스 사령탑으로 믿고 기용해준 김회장이야말로 재활용전문 경영인"이라고 답한 바 있다.

태국 푸미폰 국왕과의 면담

▲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 태국 푸미폰 국왕은 1946년 18세 나이로 국왕에 즉위한 이래 태국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분이다. TV등을 통해서 보면 그를 알현하는 사람 모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것을 본다. 이런 푸미폰 국왕을 1992년 김승연 회장이 만난 적이 있다.

- 당초 김승연 회장과 푸미폰 국왕은 15분의 면담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15분은 서로 만나 공식적인 인사를 하는 의례적 면담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면담 도중 푸미폰 국왕이 김승연 회장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회장님은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는 지극히 사적인 질문을 하고 김승연 회장께서 한국에서의 자녀교육 방법 및 당신의 자녀 교육관을 피력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길어져 50분이 넘게 면담이 진행되었다.

-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다음 면담 순서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선수단(선수단장은 왕자) 본진이었는데 김승연 회장으로 인하여 30분이나 넘게 대기하였다고 한다.

- 푸미폰 국왕이 김승연 회장 면담 후, 독자인 마하 와지라롱콘 왕세자를 불러 나중에 기회가 되면 김 회장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김승연 회장이 국왕 면담 뒤, 국제복싱연맹 부회장 자격으로 바로셀로나 올림픽을 관전하기 위하여 바르셀로나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해보니 태국 왕세자가 보낸 꽃이 숙소에 있더라는 것이다. 서로 일정상 면담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최고의 대접을 해 온 것이다.

2. 탁월한 경영 능력

회장직 수행 26년간의 경영성적표

- 1960년대 10대 그룹이었던 회사 중 거의 반세기가 지난 현재 10대 그룹에 해당되는 기업이 한화와 삼성 둘 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김승연 회장의 경영능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다.

- 김승연 회장은 1981년 8월 만 29세의 나이로 한화그룹 회장직에 임명돼 현재 10대 그룹 회장 중 가장 오랫동안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 젊은 나이로 회장이 되었을 당시에는 주위의 근심어린 시선이 많았으나, 한양화학인수, 경인에너지 내국화, 한화유통·한화리조트 인수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런 시선을 불식시키고 제2의 창업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 김승연 회장은 이후에도 1990년대 초 세계화 과정과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경영능력을 발휘했고, 2002년에는 대한생명 인수를 통해 한화그룹을 다시 한번 재계에서 우뚝선 그룹으로 만들었다.

- 취임할 당시와 현재(2006년말)의 한화그룹 면모를 비교해보면 계열사는 21개에서 33개로 늘었고, 매출액은 7642억원에서 24조원으로 31배 증가했다. 또한 총자산은 5846억원에서 61조원으로 104배가 증가해 김승연 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살펴볼 수 있다.

한양화학과 다우케미컬 코리아 인수시 보여준 뚝심

- 제 2차 석유파동이 밀어 닥쳐 석유화학 경기가 크게 위축된 1980년대 초는 한양화학과 다우케미컬 코리아 모두 적자가 심해 한양화학이 1980년 한 해에만 75억 적자를 내는 등 부실기업이었으며 다우케미컬도 본사가 경영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철수를 준비 중이었다.

- 김 회장이 위 회사의 인수 검토를 지시하자 그룹 내 스태프들은 거의 반대를 하였는데 "세계적으로 저명한 다우가 철수를 왜 하겠습니까?"라는 분위기였다

- 하지만, 김 회장은 석유화학의 장래가 어둡지 않으며 머지않아 국제경기도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판단과 "PVC의 원료가 VCM이고 VCM을 생산하는 회사가 한양화학이므로 우리도 붙어서 얘기라도 해봐야 할 것 아니냐"라는 현실적 필요성을 고려하여 인수를 독려하였다.

- 인수 과정에서 김 회장은 다우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들의 급박함을역이용하였다. 일단 다우가 다른 곳에 가지 못하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제안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다우는 아시아 본부인 홍콩을 거치는 등 의사 결정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면서 다급해졌다. 이에 김 회장은 인수 의사는 강력히 보이되 가격에 대한 협상을 뚝심 있게 진행 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 결과, 다우 쪽에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았는데 매매대금 전액을 분할 상환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적극적인 추가 협상 끝에 값도 깎고 거치 기간도 늘리고 분할 상환 기간도 늘리면서 계약을 확정시켰다.

- 여러 차례 밀고 당기는 협상과정에서 김회장은 가계약의 조속한 인수를 종용하는 다우 측에 맞서 신중한 행보를 통해 유리한 계약조건을 이끌어 냄과 동시에 인수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되돌려 놓아 젊은 회장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 사실 이 딜은 당초 정부에서는 원료를 쓰는 럭키화학이나 한국프라스틱공업 같은 곳에서 인수를 하면 어떻겠냐고 종용시켰던 건이다. 럭키화학하고 먼저 얘기가 시작되었는데, 석유 화학이란 것이 잘되면 몇 백억씩(현재 기준으로는 몇 천억) 이익이 나지만 안될 때는 몇백억, 몇 천억 마이너스로 가는 사업이다. 그 몇 백억, 몇 천억이라는 게 한국 그룹의 규모로 봐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금액이었다. 더구나 당시가 세계적인 불황이라 LG로서는 큰 메리트가 없다고 보고 조건을 엄격히 내세우는 쪽으로 가 협상이 결렬되었다.

IMF 외환 위기 예견

- 한화는 1996년부터 김 회장의 강력한 리더쉽하에 전임직원들이 일치단결하여 구조조정을 과감히 추진한 결과 재계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선도적인 구조조정으로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기업으로 주목 받았다.

- 구조조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한 김회장이 계열사에 사전에 대비책을 강구토록 조치하였기 때문이었다. 좋은 회사라도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쉽게 매각할 수 없을 뿐더러 매각하더라도 헐값에 매각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사전 준비로 그룹은 그나마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다.

- 김 회장은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갈비뼈 하나를 들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경영권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경향신문>의 정리 및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알짜사업의 매각까지 전 사업부문에 걸쳐 철저히 경쟁력 제고 차원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 김 회장은 구조조정 업무를 총괄 지휘하며 어려운 고비 때마다 직접 협상에 나서 해결함으로써 직원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언론으로부터는 '구조조정의 마술사'라는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아픈 별칭을 얻기도 했다.

- 당시 언론에서는 김 회장에 대해 그룹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협조융자를 신청할 때 자신의 개인주택과 주식을 모두 담보로 내놓는 등 경영권에 대한 집착을 과감하게 버렸고, 빙그레와 경향신문을 상호협의 아래 성공적으로 계열분리 하였으며, 7개 계열사를 외국에 매각하여 3억3000만 달러 외자를 유치하는 등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모범 기업인이라고 보도하였다.

- 이 외에도 1998년 12월 1일에는 한일기업경영간담회에 참석하여 외자유치 활동을 벌여 1억5000만불 규모의 나프타 수입 유산스(Usance)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3. 부모님에 대한 효심

워커 전 주한 미국대사 팔순 잔치

▲ 한화의 홍보 광고.
- 김 회장은 '신의'를 경영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다. 리차드 워커 전 대사와 관련된 일화를 보면 '신의'에 더하여 부친인 선대 회장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다

- 워커 전 대사와 김종희 선대 회장과는 친형제 이상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선대 회장이 워커 대사의 60세 생일 잔치를 한국식 회갑 잔치로 치러주기로 약속했으나 1981년 별세하시고 말았다.

- 김 회장은 이 약속을 기억하고는 회장에 취임한 다음 해인 1982년에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회갑 잔치를 마련함으로써 선대 회장의 약속을 대를 이어 지키게 되었다

- 김 회장은 그 자리에서 팔순 잔치도 한국에서 마련해 드리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약속대로 지난 2002년 동일한 장소에 워커 전 대사의 자녀·손자·손녀 등 가족들과 한국의 친구 등 100명을 초청하여 팔순 잔치를 열었다

어머님 팔순 잔치

- 2006년 말 김 회장은 어머님의 팔순을 기념해 어머님의 지인과 동네 사람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었다.

- 이 잔치를 앞두고 김 회장은 어머님의 팔순을 축하하는 편지를 직접 작성해 이를 영상 편지로 제작했다. 영상편지는 잔치에서 상영됐으며 어머님께 지극 정성을 다하는 효자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돼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4. 김승연 회장의 자식사랑

- 김승연 회장은 유별난 부정으로 유명하다. 특히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올해 설 직전인 2월 중순 김 회장은 그룹 인사팀에 지시해 그룹 내에서 부인과 자녀를 해외로 보낸 기러기 아빠들에게 가족을 만날 수 있도록 특별휴가와 왕복 항공 경비를 지원한 바 있다.

- 김 회장 자신이 아들 셋을 모두 유학보냈는데, 보고 싶어도 보기 힘들어 늘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자식들이 보고 싶어 매일 전화를 하기도 했다. 또한, IMF 시기 기업 경영에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차를 타고가며, 자식들이 보고싶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큰 아들 동관군은 하버드를 졸업하고 공군에 복부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예일대, 셋째 동선군은 승마로 유명한 미국 태프트 스쿨에 재학 중이다. 지난 아시안 게임때 아들이 금메달을 땄을 때 아이처럼 좋아하기도 했다.

- 김 회장은 단체전에 출전한 동선군에게 "정 떨리면 본부석에 있는 나를 쳐다보라"며 용기를 북돋웠다.

- 이날 김 회장은 아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부인과 함께 카타르로 갔다. 또 세 아들의 졸업식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참석했다.

- 김승연 회장은 1981년 갑자기 29세의 나이에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다. 이러한 김회장의 자식 사랑은 아버지를 일찍 여윈 김 회장의 보상심리였다.

- 김승연 회장의 부정은 이 시대 사라진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화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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