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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가 있기 전 어느 가을, 버지니아 텍의 평화로운 풍경
ⓒ 김윤주
월요일(16일)의 놀람과 두려움, 'South Korea'(한국) 소리가 나올 적마다 가슴이 턱 내려앉던 화요일(17일)의 막연한 불안감과 동요는 수요일(18일)이 되니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듯했다. 한국대사관과 한국 언론사들에서 경쟁하듯 걸려오던 전화도 줄었고, 불안에 떠는 친구들의 전화도 줄었다.

남편은 한국인이라는 발표가 나는 시점부터 동료들과 대책 회의를 한 후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교수 미팅에도 나가고, 추모식에도 동참하고, 학과 전체 메일을 통해 버지니아텍 일원으로, 또 한국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입장 표명을 하기도 했다. 단순히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막연한 불안감에 떨며 우왕좌왕할 때가 아니라는 게 남편의 이야기였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다.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인 친구들과 교수님들한테서도 하나 둘 전화와 메일이 오기 시작했고, 가까운 이는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나름의 충격과 슬픔과 힘겨운 느낌들을 솔직히 나눌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진전이 되긴 했으나 여전히 맘이 편한 건 아니었다.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게 딱히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제(19일) 하루종일 들어야 했던 말,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소외되었다 느끼고 있는 아이를 따뜻이 보듬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등. 먼저 따뜻한 위로를 건네 오는 이들이 고맙기도 했으나 이런 종류의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딱히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미국 교육을 받고 미국사회에서 자라왔으니 한국인이 아니네, 맞네 하며 양분되어 가는 여론, 이민 1.5세대의 사회적 부적응 문제, 한인사회의 보복 테러에 대한 우려 등을 집중 조명하며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한국 언론의 보도들.

반지하 셋방살이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으나 결국은 허망한 파멸이라고 전하면서 16년 전인가 살았다는 연립주택 사진까지 공개하는 데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CNN까지 그걸 인용하며 "한국에는 'half basement'(지하방)이라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주거양식이 있는데 'Cho family'(조의 가족)은 미국 오기 전 그런 곳에 살았고, 그 살기 어려운 한국이란 땅을 마침내 '탈출'했지만 미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하지 못해 결국 이런 끔찍한 범죄로 파멸하고 말았다"는 등의 논조를 펼칠 때는 정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쨌거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일상을 재건해 보자는 움직임이 확산되어갈 무렵, NBC로 보냈다는 'Cho'(조)의 우편물이 공개되면서 사건의 우울함은 다시 또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모니터의 동영상 속에는 증오에 가득 찬 남자의 눈빛과 웅얼거림, 정확히 나를 겨누고 있는 듯한 총구는 온몸이 오싹한 공포와 손끝까지 힘이 쪽 빠지는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도대체 상상키 어려운 이 증오와 분노와 자기망상의 근원은 어디란 말인가.

범인의 국적이 아닌 미국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자성과 재건의 방향으로 움직이던 여론에 이 우편물 공개는 슬픔과 분노를 자극하고 구체화하는 계기를 제공해 버렸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NBC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더는 이 자료들을 방송하지 않거나 자제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영상 이후 사건 직후보다 오히려 더 우리의 불안감을 염려하는 미국인 튜터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보니, 표면적으로는 차분히 회복되어가는 듯한 이 블랙스버그에서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아 보인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걱정

애초에 목요일부터는 정상등교하기로 했던 공립 초·중·고등학교도 이번 주 1주일간 휴교하기로 했다. 어른들이야 지성도 이성도 있다지만 아직 성숙지 않은 아이들이 걱정이다.

다섯 살, 여덟 살 딸 아이들이랑 밥상머리에 앉아, 아빠가 다니는 학교 교실에서 수십 명이 어느 날 총에 맞았는데, 그것이 우리 집 맏딸과 같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와 대학생이 된 어떤 'South Korean boy'(한국 남자아이)에 의한 사고였다는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

앞으로 학교나 밖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마주치게 될지 모를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응법까지 단련시켜야 하는 현실이 참 가슴 아프다. 언제 닥칠지 모를 '총 든 나쁜 사람'에 대한 대처법도 가르쳐야 할 터인데 거기까진 힘이 닿지 않는다.

지금 서 있는 현실이 얼마나 우울하든, 씩씩하게 우리는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마음 단단히 다잡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행복한 아이'를 키우는 일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더더욱 충실할 것을 마음으로 깊이 다짐하고 있다.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만드는 일, 그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오늘 이곳, 블랙스버그 버지니아텍에서 다짐, 또 다짐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쑥쑥닷컴에 올린 글을 수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버지니아텍#조승희#아메리칸 드림#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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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통해 시대를 넘나드는 기호와 이야기 찾아내기를 즐기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인문학자입니다. 이중언어와 외국어습득, 다문화교육과 국내외 한국어교육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대학교수입니다.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다문화 배경 학생을 위한 KSL 한국어교육의 이해와 원리> 등의 책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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