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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5일 부동산 대책, 출자총액제한제도 개편안 등을 다룰 확대당정협의회가 열린 가운데 권오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이 굳은 표정으로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5일 정부는 열린우리당과의 협의를 거쳐 출자총액제한제도(이하 출총제)를 비롯한 공정거래법상의 재벌정책 개정 방향에 대한 정부안을 발표하였다.

아직 당정간에 이견이 있고 향후 국회 심의 과정에서 더 후퇴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번 정부안은 재벌정책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최종 입장 정리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재벌개혁 포기'이다.

미소짓고 있을 재벌 모습, 눈에 선하다

정부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출총제는 자산 10조원 이상인 기업집단 소속 계열사 중 자산 2조원 이상의 중핵회사에 대해서만 적용하고, 출자한도도 순자산의 25%에서 40%로 상향조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출총제 적용대상이 현재 14개 그룹의 343개 회사에서 7개 그룹의 24개 회사로 대폭 축소되며, 출자여력은 현재의 16조원에서 32.9조원으로 크게 늘어난다.

한 마디로 출총제는 규제의 실효성이 전혀 없이 사실상 폐지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완전 폐지가 아니라서 불만스럽다고 말하지만, 표정관리하기에 바쁜 재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편, 공정위가 그동안 강력하게 주장했던 환상형 순환출자(A→B→C→A로 완전히 한 바퀴 도는 출자형태) 규제는 아예 없던 일이 됐다. 사실 이같은 규제는 현재 순환출자가 확인된 15개 그룹 중 현대자동차 등 한두개 그룹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큰 부담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출총제보다도 더 강력한 재벌해체 수단'이라고 엄살부리는 재벌들의 공갈협박에 정부와 여당은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태산명동에 이런 서일필(태산이 떠나갈 듯 요란을 떨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마리 뿐)이 따로 없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재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한,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촉진한다'는 명분 하에, 자회사 지분율 요건을 완화(상장자회사의 경우 현재 30% 이상 지분 보유에서 20% 이상으로)하고, 증손회사 지배도 허용하며, 자회사로부터 받는 배당수익에 대한 세제상 혜택을 확대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미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는 지주회사 부채비율 완화(100%→200%)와 손자회사의 사업관련성 요건 폐지 등에 추가하여 기존 지주회사제도의 뼈대를 무너뜨리는 규제완화라고 할 수 있다. '설마 이것까지야' 하다가 망외의 선물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 재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노태우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경제위기를 말했다

▲ 지난 8월 `열린우리당 -경제 5단체장 간담회`에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과 강신호 전경련 회장이 웃으며 함께 들어서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한 마디로, 재벌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그러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동안 규제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던 투자'를 적극 확대하겠다는 재벌들의 약속? '민생회복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모습'에 감복한 국민들의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율 회복?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먼저, 투자 문제를 보자. 재계가 출총제 폐지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투자부진론'은 이젠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했다가는 세상물정 모르는 좌파세력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투자부진론은 경제개혁의 예봉을 꺾기 위해 기득권 세력이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는 '경제위기론'의 새로운 버전이다.

노태우 정부('제2의 남미경제론')도, 김영삼 정부('고비용 저효율 구조론')도, 김대중 정부('IT 버블 붕괴와 9·11 사태에 따른 세계 동시 불황론')도, 그리고 노무현 정부('1만불의 덫을 야기한 투자부진론')도 기득권세력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고, 결국 이들의 경제개혁 구호는 찻잔 속의 태풍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투자부진론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또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는 객관적 주장인가? 천만의 말씀. 투자부진론이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원인진단 및 대안제시에서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이데올로기이다.

2000년대 이후의 투자가 극히 부진하다는 것의 증거로서 흔히 외환위기 이전보다 훨씬 낮아진 (설비)투자율 수치가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그 어떠한 규율장치도 작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복과잉투자로 치달았던, 그래서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1990년대 중반의 '비정상적' 투자율을 비교준거로 삼는 것 자체가 왜곡이다.

이는 부지불식간에 외환위기 이전의 경제구조를 '정상적'인 것으로, 따라서 되돌아가야 할 목표로 설정하는 효과를 유발한다. 이것이 누구의 이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인지는 자명하다.

재벌의 투자가 늘면 노동자도 언젠가 행복해진다?

현재 투자 문제의 핵심은, 투자율의 평균 수준이 낮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업종별·기업규모별 투자의 양극화 현상이 극도로 심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상위 8대 재벌의 투자가 국민경제 전체의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2005년의 경우(39.40%) 외환위기 이전 최고치였던 1996년(39.21%) 수준에 도달했다. 상위 4대 재벌의 비중은 2005년(36.09%)에 이미 1996년(35.16%) 수준을 초과하였다.

그리고 2002년 이후 비제조업에 비해 제조업의 설비투자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역시 상시 고용인 500인 이상의 대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2006.9.28), <재계의 '투자부진'론에 대한 검토 보고서> '경제개혁리포트 3호' 참조)

설사 출총제 폐지에 의해 소수 재벌들의 투자가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한국경제의 장기적 성장에 보탬이 되겠는가? 재계 주장을 요약하면, '아랫목에 군불을 때면 언젠가는(!) 윗목도 따뜻해질 것'이라는 이른바 떡고물 전략(trickle down effect)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파이부터 키우자'라는 주장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나 재벌중심의 성장 우선론이 중소기업의 발전과 거기서 일하는 대다수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으로 귀결된 경험이 우리에겐 없다. 따라서 이 역시 누구의 이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인지 자명하다.

▲ 지난해 6월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이해찬 국무총리와 전경련 회장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최근 한국경제의 대안 중 하나로 스웨덴 모델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물론 스웨덴은 우리 입장에서는 부럽기 그지없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주의해서 보아야 할 대목도 있다.

스웨덴은 발렌베리 가문을 비롯한 소수의 가족기업집단이 국민경제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경제력이 고도로 집중된 나라이다. 그런데 스웨덴의 상위 50대 기업의 설립연도를 살펴보면, 1970년 이후 신설된 기업이 하나도 없다.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신설기업이 상위 50대 기업으로 성장한 예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경직된 구조 또는 역동성의 상실이 스웨덴 경제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인구 900만명의 스웨덴과 같을 수 없다. 몇몇 국가대표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다고 해서 5000만 국민의 경제적 삶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이 한국에서 여전히 경제력 집중 억제가 중요한 경제정책 목표가 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경제력 집중 억제를 위해 출총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박정희에서 못 벗어나고 한나라당과 다르지 않은 정부·여당

21세기 글로벌 경쟁의 시대에 경제력 집중 억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재계와 정부와 정치권은 반박한다. 그러나 누가 시대착오인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재벌중심의 박정희식 모델의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시대착오 아닌가?

특히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박정희 시대의 낡은 잔재를 청산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경제정책은 박정희 시대의 그것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오직 재벌을 중심으로 경제 문제의 해법을 사고한다는 점에서 과거 집권세력과 다른 점이 있는가? 한나라당과 다른 점이 있는가? 누가 시대착오인가?

노무현 정부의 국정철학은 박정희 시대와는 다르다고? 부탁이니, 경제정책 이야기할 때는 국정철학 운운하는 것은 제발 삼가하기 바란다. 그건 아마추어의 작태다.

정책수단이 같은데 결과가 다르겠는가? 그 정책수단을 입안하는 사람(모피아와 여당 내의 모피아 출신 정책 라인)이 같은데 어찌 결과가 다르겠는가? 그리고 정책수단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같은데 어떻게 결과가 다를 수 있겠는가? 이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재벌정책이 과거 정부와 다르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한번 보자. 출총제 폐지 등 재벌개혁 포기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얻은 정치적 효과는 무엇인가? 2002년 대선 캠페인 당시 노무현 후보는 '최초로 재벌개혁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공화국의 완성을 추인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제 경제정책 측면에서 정부·여당과 한나라당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재벌정책도, 한미FTA도, 노동정책도, 심지어 부동산정책도 두 정치세력을 차별화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결국 정부·여당은 한나라당의 정제정책을 모방함으로써 내년 대선에서 유권자의 선택기준을 경제정책 이외의 요소(예컨대, 정치·외교 이슈 또는 지역선거)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권은 유한하되, 재벌은 영원하다"

▲ 지난 2002년, 동전이 가득한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달한 어린이를 안고 있는 후보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자료사진).
ⓒ 권우성
이거야 돗자리 깔고 앉은 분들이 더 정확하게 답할 문제이지만, 이러한 정치적 전략의 경제적 귀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다음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그 역시 노무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실패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터진 SK글로벌 사태와 카드대란으로 인해 경제정책의 자유도를 완전히 상실했고, 결국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다. 아마 내심으로는 전임 대통령의 경제정책 실패에 대해 무척이나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역시 그 자신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해 후임 대통령의 원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악순환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다.

새삼스럽게 한국사회의 진리 하나를 되뇌게 된다. "정권은 유한하되, 재벌은 영원하다."

근조 재벌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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