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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 부석사의 바로 그 풍경.
추억 속 부석사의 바로 그 풍경. ⓒ 이희동
추억의 고향 부석사

혹자는 말했다. 20대를 훌쩍 넘기고 난 후 영동고속도로를 다시 타는 것은 결코 동해를 가기 위함이 아니라 추억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흘러간 시간 속에 묻힌 아련한 추억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주 들리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회가 되어 자꾸 가게 되는 그곳. 그러나 그 발걸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낯익은 그곳에는 지난날의 나의 모습이 있으며, 우리는 그때를 기억하며 현실의 상처를 치유하곤 한다.

경북 영주의 부석사는 내게 그런 곳이다. 어머니 고향이 영주인 터라 처음 맺었던 부석사와의 인연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이제 부석사는 내게 아련한 추억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부석사 그곳에 가면 나의 학창 시절과 그 시절을 관물대에 고이 간직했던 군대에서의 생활, 그리고 사랑했던 이와 함께 했던 시간 등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많은 이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이나 안양루 너머 펼쳐진 소백산맥의 장쾌한 모습이 가끔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는 결코 위대한 문화재에 대한 가치나 화려한 수식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부석사의 그 모든 것들이 아직 그대로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나의 흘러간 시간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부석사의 유래 뜬돌.
부석사의 유래 뜬돌. ⓒ 이희동
부석사 초입의 동네 순흥면

8월의 마지막 주, 나의 발걸음은 또다시 부석사로 향하고 있었다. 주말에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했음에도 동강 래프팅을 강행하기로 한 우리 팀은 영월로 가는 도중 들를 만한 한 곳을 찾았고, 난 강력하게 부석사를 추천했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나서니 순흥면이라는 표지가 보인다. 우리나라 대부분 '안씨'를 차지하는 '순흥 안씨'의 본적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등장하는 부석사 표지판. 비록 10년 전의 호젓한 길은 확장되어 그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길가로 보이는 풍기의 자랑 사과나무의 과수들은 이제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과밭 너머 고즈넉한 산세와 평화로운 마을. 그러나 순흥면의 역사는 결코 보기와 같이 평탄치 않다. 조선시대 세조의 아우이자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던 금성대군은 형에게 반대하다가 이곳 순흥까지 유배되어 왔고, 이후 순흥 부사 이보험과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조정은 사건 이후 역모의 땅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순흥 30리 안에 있는 백성을 거의 도륙했는데, 이때 죽계(竹溪)를 타고 흐른 피는 10여 리를 흘러 안정면 동촌리에서 끊어졌다 하여 지금도 이 마을을 ‘피끝 마을’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주변의 소수서원이나 최근 조성된 선비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마도 이 지역은 죽령 바로 밑의 고장으로서 많은 선비가 기거하고 있었을 것이고,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는 그 세를 꺾기 위해서라도 좀 더 많은 피를 봤을 것이다.

조용한 산사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입구.
조용한 산사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입구. ⓒ 이희동
부석사 들어가는 길

드디어 부석사 입구. 역시 예나 지금이나 부석사 입구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끄러워지고 화려해지는 그곳. 조용한 산사를 기대하고 처음 갔던 사람이라면 실망하기 딱 좋은 모양새다.

그러나 3년 전보다 눈에 거슬리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부자연스러운 인공미가 아닌 부석사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 산세들의 색깔이었다.

비록 늦여름, 초가을이었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푸르러야 할 소나무의 색깔들이 누리끼리 우중충하게 변해 있었다. 소위 소나무의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이 이곳 부석사에까지 퍼졌기 때문일까? 재선충을 인간 욕망의 결과라 해야 할지, 아님 자연의 반격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재선충이 재앙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특히 소나무를 단순한 나무를 넘어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격상시키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민중들에게 현재 재선충의 발흥은 국가적인 중대사일 수밖에 없다. 소나무 한 그루 없는 산을 어디 상상하기 쉽겠는가. 혹자의 말대로 당장 애국가 가사부터 바꿔야 할 노릇 아닌가. 당장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확산 속도가 최대한 늦춰지길 바랄 뿐이다.

부석사 오르는 길가, 재선충을 피해 꿋꿋이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
부석사 오르는 길가, 재선충을 피해 꿋꿋이 서있는 소나무 한 그루. ⓒ 이희동
표를 끊고 드디어 극락의 여정에 들어선다. '태백산 부석사'가 적혀 있는 일주문을 넘어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까지.

부석사에 오르는 길은 내소사나 월정사같이 장엄한 맛은 없지만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길옆으로 펼쳐진, 향기가 오를 대로 오른 사과밭과 그 밭에서 방금 딴 사과를 파는 사람들. 어쩌면 부석사가 아직 많은 이들에게 회자하는 이유는 그 소박함 속에 묻어나는 향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하나의 종교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경건함이나 엄숙함만으로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사찰 건축의 교과서 부석사

천왕문에 도달하니 그 앞으로 급한 계단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불교의 백팔번뇌를 형상화했을 그 계단들. 사찰건축의 교과서로까지 거론되는 부석사의 명성에 걸맞게 계단은 인간의 고뇌를 현실적으로 나타내려는 듯 결코 만만치 않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면 펼쳐지는 화엄의 세계.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면 펼쳐지는 화엄의 세계. ⓒ 이희동
부석사 범종루.
부석사 범종루. ⓒ 이희동
계단의 끝. 저 멀리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보인다.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가람들. 10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던가.

자꾸만 서울 지하철 광고판에서 봤던 영주 부석사 풍경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산세 밑으로 화엄 세계를 나란히 펼치고 있는 부석사의 사진. 그러나 그 멋있는 사진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광고판을 보고 부석사를 꿈꾸었겠지만, 오히려 관념은 독이 되어 부석사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을 방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십몇 년 전에 읽었던 유홍준의 부석사가 그렇듯이.

사실 같은 맥락으로 부석사에 관한 여행기를 쓰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미 너무 많은 글과 사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호사가의 구수한 입담과 고건축가들의 예리한 분석들. 따라서 그 선험적 지식을 버리고 내 생각을 싣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경험이고 무엇이 편견인지도 헷갈리는 경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온전한 나의 시각인지마저도 자신 없는 상태. 그건 바로 대상이 부석사이기 때문이다.

부석사 안양루, 극락까지의 마지막 여정.
부석사 안양루, 극락까지의 마지막 여정. ⓒ 이희동
고개를 깊이 수그리고 안양루를 통과하니 그 자리 그대로 무량수전이 있었다. 비록 일부 공사 중이라 끝 부분의 파란 천막이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어쨌든 그 모습, 그 위용은 그대로였다. 비록 역사가들은 봉정사의 극락보전과 비교하며 최고(最古)를 논하지만 무량수전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름다울 뿐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풍경. 그곳엔 유홍준이 국보 0호라고 일컫던, 삿갓 시인 김시습도 차마 그냥 보내지 못하고 시 한 수 읊었던 그 장쾌한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어느새 이만큼 올라왔던가'라고 자문할 만큼 아스라이 펼쳐진 백두대간의 구릉들. 그것들은 부석사의 터가 왜 명당인지, 부석사의 앞마당이 우리나라에서 왜 가장 넓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호연지기. 불가의 앞마당에서 맹자의 덕목을 떠올린다면 실례일까?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부석사의 가람.
학의 날개처럼 펼쳐지는 부석사의 가람. ⓒ 이희동
저 멀리 보이는 동네들만이 그나마 이곳이 속세와 멀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저 멀리 보이는 동네들만이 그나마 이곳이 속세와 멀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 이희동
안양루에서 바라본 그 유명한 부석사의 앞마당.
안양루에서 바라본 그 유명한 부석사의 앞마당. ⓒ 이희동
다시 발길을 돌려 삼층석탑을 지나 호젓한 오솔길에 올라선다.

보통 다른 사찰에 들르면 시간에 쫓기어 본전 뒷산 중턱에 있는 전각들은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지만 부석사는 다르다. 그 아름다운 산길에 묻은 개인적인 추억도 추억이거니와 무량수전까지만 보고 부석사를 내려가기에는 못내 아쉬움이 크기 때문에 난 꼭 이곳까지 오른다.

산길의 오른쪽 끝에는 조사당이 있었다. 그곳에는 부석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의상대사가 모셔져 있었으며, 전각 앞 흉물스러운 철장 속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선비화가 피어 있었다. 그 잎을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아늑한 산사에 무식하니 서 있는 철장에 기분 좋을 리 없다.

어차피 그 시작부터 기복을 흡수한 불교라면 차라리 그 철장을 없애고 전설을 이어나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물론 선비화가 수난을 당하겠지만 전설을 전설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성불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몫인 터.

산길 끝의 자인당, 웅진전을 둘러본 뒤 산에서 내려온다. 다른 일행들은 무량수전까지만 보고 난 뒤 부석사의 모든 것을 본 양, 내게 빨리 서둘러 내려오라고 재촉 전화를 해댄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구구단 외우듯이 외운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추슬러 부석사를 나온다. 안양루를 지나 범종루를 지나 다시 들어서는 그 길. 하지만 이젠 속세로 향한 길이다. 비록 같은 길일지라도 그 방향에 따라 속세의 길과 극락의 길은 엄연히 다르다. 극락의 길에서는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지만, 속세의 길에서는 다가오는 현실에 무언가 채우기에 급급하다고나 할까.

결국 나는 또다시 미련만을 한껏 안은 채 부석사를 나선다. 꼭 다시 찾아오리라는 못난 기약과 함께.

덧붙이는 글 | 유포터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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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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