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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룔연 계곡으로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구룔연 계곡으로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 박도
옥녀봉

이번 등반길에 나는 두 대의 카메라를 가져갔다. 나의 답사 경험으로는 중요한 곳을 갈 때는 예비카메라가 있어야 했다. 백두산 1차 등반 때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되지 않아서 무척 속을 끓였다. 출판사에서는 디지털보다 슬라이드 필름을 더 좋아한다.

디지털카메라와 필름카메라로 그 무게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열심히 찍어두면 기록도 보완해 주고, 두고두고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욕심을 부려 망원렌즈까지 가져갔는데, 통관할 수 없다고 하여 차에 두고 내렸기에 그나마 부담이 줄었다. 구룡연 계곡에서 쉬엄쉬엄 경관을 완상하면서 사진촬영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북녘 관리인이 옥녀봉을 가리키고 있다.
북녘 관리인이 옥녀봉을 가리키고 있다. ⓒ 박도
우리 내외가 마지막인 듯, 북녘 금강산 관리인과 동행케 되었다. 관리인은 나에게 북조선 방문이 처음이냐고 묻기에, 두 번째로 지난해는 평양 묘향산 백두산을 다녀왔다고 하자, 매우 반색하였다.

자신을 최아무개로 소개하고는 금강산에 대한 여러 유래담과 전설을 들려주었다. 내가 멀리 보이는 가물가물한 산봉우리를 묻자, 최씨는 '옥녀봉'이라고 했다. '옥녀'라는 이름이 귀에 익어 기억을 더듬자, 바로 최초의 항일전을 승리로 이끈, 봉오동의 전설적인 영웅 홍범도 장군의 첫 부인 이름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홍범도가 배우지도 못하고 공장에 가서 일곱 달이나 일을 해도 공장주가 품삯을 주지 않고 오히려 먹고 잠잔 값을 내놓으라는 말에 몹시 화가 났다. 홍범도는 공장주를 냅다 꽂고는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와서 중이 되고자 불도를 닦았다. 홍범도는 수도생활 중 옥녀라는 여승과 그만 눈이 맞았다는데, 그 여승의 이름은 옥녀봉에서 따왔던가.

중창한 신계사 대웅전
중창한 신계사 대웅전 ⓒ 박도
'옥에 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내려오는데, 여성관리인과 합류케 되었다. 김아무개라는 명찰을 달았는데, 매우 곱상하였다. 인사말로 결혼 여부를 묻자, "통일되면 남조선 총각과 결혼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지난해 평양에서도 수행 간호사에게서도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 아마도 남측 인사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하라고 교육을 받은 모양이었다.

중간 지점에서 그들 두 사람은 쳐지고 우리 내외만 쉬엄쉬엄 내려오는데, 다시 보아도 언저리 자연 풍물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다만 한 가지 '옥에 티'로 몹시 눈에 거슬린 것은 바위에 새긴 이름들과 글씨였다.

바위에 이름을 새긴 낙서들
바위에 이름을 새긴 낙서들 ⓒ 박도
김 주석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
김 주석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 ⓒ 박도
경성(京城) 평양(平壤) 대정(大正) 등으로 미루어 봐서 일본강점기로도 짐작이 가고, 관찰사(觀察使)라는 글로 봐서는 조선시대로도 짐작이 갔다. 거기다가 눈에 자주 띌만한 바위에는 어김없이 붉은 구호나 혁명가, 김 주석 가족 찬양문구로 자연을 훼손해서 유감스러웠다.

김 주석이 이런 유치한 일을 지시했을까. 아랫사람들이 과잉충성으로 새긴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역사를 보면 늘 아랫사람들의 과잉충성이 문제였다. 결자해지(結者解之)로 새긴 사람들이 원상 복구는 힘들더라도 말끔히 지우는 게 주군을 욕되게 하지 않고, 후손들에게도 흉잡히지 않을 것이다.

온정리로 가는 길에 신계사에서 잠시 머물렀다.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남북 불교계가 손을 잡고 요즘 한창 중창 중이었다. 신계사에서 바라보는 집선봉의 경치가 천하일품이라고 하나, 상봉의 구름으로 보지 못해 아쉬웠다. 아마도 금강산 산신님이 우리 내외를 다시 오라고 보여주지 않았나 보다.

신계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집선봉
신계사 대웅전에서 바라본 집선봉 ⓒ 박도
삼일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오후 삼일포 여정에 앞서 온정리 옥류관으로 가서 평양냉면을 들고는 2차 삼일포 행 오후 2시 30분 버스에 올랐다. 삼일포 가는 길은 관광전용도로에서 벗어나는 구간이 많아서 북녘 동포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모두 그만그만한 살림집에서 소박하게 사는 듯했다. 행복지수는 국민소득수준과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네들의 소박한 삶을 자본주의식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민족 화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핏줄을 나눈 형제라면 서로 어려움을 슬그머니 도와주는 게 진정한 형제애이리라.

삼일포
삼일포 ⓒ 박도
고셩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 차자가니
단서는 완연하되 사션은 어대 가니
예 사흘 머믄 후의 어대 가 또 머믈고

(고성을 저 만큼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 남석행'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이 글을 쓴 사선은 어디 갔는가?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물렀던고?)


<관동별곡> 중 삼일포 여정 부분이다. 신라의 국선(國仙)인 술랑, 남랑, 영랑, 안상 등 사선이 경치가 좋아 사흘 동안 머물렀다는 삼일포는 온정리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나 같은 속인도 한 열흘 머물고 싶은 담수호였다.

온정리로 돌아온 뒤 저녁밥을 먹고는 곧장 온천장으로 갔다. 오늘 산행의 여독도 풀고 여기 아니면 즐기기 힘든 천연온천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였다. 노천탕에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둘러보는데, 지상 극락에서 둘째 날이 쉬엄쉬엄 저물어갔다.

구룡연 계곡의 경관
구룡연 계곡의 경관 ⓒ 박도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구룡연 계곡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구룡연 계곡 ⓒ 박도
옥류동에서 바라본 외금강 멧부리
옥류동에서 바라본 외금강 멧부리 ⓒ 박도

덧붙이는 글 | 다음 회로 마칠 예정입니다.

(관동별곡 고어를 기사화할 수 없다면 아래 글로 대체하십시오.)

고셩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 차자가니 
단서는 완연하되 사션은 어대 가니 
예 사흘 머믄 후의 어대 가 또 머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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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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