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극락마을을 지나가며

차는 걸미고개를 넘고 걸미마을을 거치더니 극락마을을 지나 칠장사를 향해 달려간다. 신경림 시인의 '칠장사 부근' 이란 시가 떠오른다. "극락이라고 이보다 더할쏘냐/ 그래서 동네 이름은 극락"이다. 그러나 정작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온갖 궂은 일 투성이다. "시애비 병수발도 지겹고 또/못난 농투성이 지애비도 미워/며느리 돈벌이하겠다 집 나간 지 십 년" 이다. 엊그제 새로 얻은 며느리마저 도망가 버린 막다른 상황이지만 철모르는 손녀딸애는 절에 올라가서 사방치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낼 뿐이다.

'칠장사 부근'이라는 시는 16년 전 극락마을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젠 극락마을 사람들도 예전의 막막했던 삶을 접고 자신의 이름에 값할 만큼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내가 가진 궁금증 따위야 아랑곳할 바 없는 자동차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씩씩거리며 달려갈 뿐이다. 질주는 문명의 자식들이 가진 공통의 숙명이다.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올라가노라니 오른쪽 산자락에 부도밭이 보인다.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선 놓치기 십상이게 생겼다. 죽은 자의 삶을 궁금해 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호기심을 배려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다.

부도밭을 지났으니 이제 칠장사에 다 왔구나, 싶어 눈을 쏙 빼고 밖을 내다보지만 칠장사는 쉽사리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담배 한 대를 꼬박 피웠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쇠막대기 모양의 철 당간과 당간지주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부도밭과 철당간의 거리가 이렇게 먼 걸로 보아 그 옛날 칠장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철당간지주
ⓒ 안병기
사찰 입구에 세우는 당간지주는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것이다. 깃발을 다는 기다란 장대를 간이라고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지주라고 한다. 칠장사 당간지주는 현재 14마디의 원통형 철통이 남아 있다.

28개의 철통이 있었다는 옛적의 당간지주는 얼마나 위풍당당했겠는가. 당간지주를 지탱하고 있는 지주석은 별다른 장식 없이 소박하고 단정하다. 칠장사의 지형이 배 모양과 같은 형국이라서 돛대의 역할을 하도록 이 당간지주를 세웠다고 하는데 청주 용두사지나 공주 갑사의 철당간과 생김새가 비슷하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115호 칠장사 소조사천왕상. 다문천왕(좌)과 지국천왕(우)
ⓒ 안병기
사천왕은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호법신이다. 칠장사 사천왕은 진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다. 사천왕은 각기 칼, 비파, 탑, 용을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꽃이 달린 관을 쓰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있다. 천왕들은 저마다 발아래 악귀를 짓누르고 있다. 화려한 관, 세밀한 무늬의 갑옷 등 조선시대 후기 사천왕상의 대표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손에 무기를 들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쥔 천왕의 표정에 위엄이 서려 있다. 그러나 천왕이 마냥 무서운 표정만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다문천왕이 입가에 머금고 있는 미소를 보라. 얼마나 부드럽고 그윽한가.

칠장사의 유래

칠장사는 어느 절보다 설화와 전설이 많은 절이다. 칠장사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부터 그렇다. 고려 초기 혜소국사가 이 절에 머물고 있던 때 근방에 일곱 도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도적이 절에 물을 마시러 왔다가 금으로 된 바가지를 보고 훔쳐왔다. 나머지 여섯 도적들도 금 바가지를 훔쳤으나 막상 집에 돌아와 보니 금바가지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혜소국사가 부린 신통력이라는 걸 눈치 챈 일곱 도적은 혜소국사의 제자가 되어 수도에 정진해서 도를 깨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절을 칠장사, 뒷산을 칠현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경기유형문화재 제114호 칠장사 대웅전
ⓒ 안병기
칠장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다. 조선 후기 규모가 작은 사찰의 대웅전에 많이 쓰인 지붕 형태이다. 장중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을 주며 작은 절을 힘차게 느껴지게 한다. 원형의 초석 위에 세운 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을 주었으며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불화와 연꽃무늬로 채색되어 있고, 불단에는 석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 대웅전 삼존불
ⓒ 안병기
대웅전 오른쪽에는 조각 솜씨가 뛰어난 석불입상 1기가 모셔져 있다. 원래 봉업사지에 있던 것인데 죽산 중학교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 보물 983호 봉업사석불입상
ⓒ 안병기
불상의 높이는 1.57m이고 총 높이는 1.98m인데 불상과 광배가 한 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눈과 코 부분이 심하게 닳긴 했지만 곱고 섬세한 조각 솜씨는 보는 이들에게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전체적인 신체표현을 보면 손이 약간 크기는 하지만 머리나 어깨 너비 등 신체 비례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살포시 가슴에 얹은 오른손, 무릎 아래로 늘어진 옷자락을 잡고 있는 왼손의 자태가 우아하다. 불상의 뒤쪽에는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가 있으며 그 둘레에 불꽃 무늬를 새겨 놓았다.

궁예와 임꺽정의 전설이 숨쉬고 있는 칠장사

원통전 아래에 있는 명부전은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은 궁예와 임꺽정이다.

▲ 명부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의 한 장면. 유모가 활쏘는 궁예를 지켜보고 있다.
ⓒ 안병기
<삼국사기> 열전에 궁예는 신라 48대 경문왕의 서자로 기록돼 있다. 유모인 여자 종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인 그를 구하지만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한쪽 눈을 잃은 그는 유모와 함께 이 곳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활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 궁예가 어린시절에 활쏘는 연습을 했다고 전해지는 궁지
ⓒ 안병기
궁예는 활을 잘 쏘는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명부전 뒤편으로 올라가면 너른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궁예가 활 쏘는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 이름 지었던 궁예는 마침내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면서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걸치기도 한다.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호화 사치를 일삼고 점점 교만해져서 거칠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서 점점 등을 돌리게 되고 서기 918년 ·신숭겸, 복지겸 등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변복 차림으로 간신히 도망치지만 부양(지금의 평강) 에서 백성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가 은둔해 있던 곳도 이 칠장사이다. 갖바치 양주팔은 미천한 신분이지만 학식이 높아 조광조 등 당대의 양반들과 교분을 맺는다. 백정 임돌이의 아들로 태어난 임꺽정은 갖바치의 아들과 혼인한 누이를 따라서 상경한다. 임꺽정은 갖바치에게 공부를 배우지만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 대신 검술을 익힌다. 기묘사화를 보고 혼란한 정국을 예견한 갖바치는 임꺽정을 데리고 전국을 유랑한다. 이후 갖바치 병해대사는 칠장사에 은둔하면서 민중에게 생불로 추앙을 받는다. 스승인 갖바치를 만나러 자주 칠장사에 다녀가던 꺽정은 이곳에서 의적들을 규합하고 일곱 두령과 피를 나눈 형제가 된다.

명부전 외벽에는 병해대사가 꺽정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자신의 애마 칠장마를 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궁예는 스스로 미륵을 자처했지만 어쩌면 의적 임꺽정이야말로 민중의 마음 속에 자리한 진짜 미륵이 아니었을까.

▲ 보물 488호 칠장사혜소국사비
ⓒ 안병기
보물 제 488호 혜소국사비는 혜소 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법명이 정현인 혜소국사는 고려 광종 23년(972)에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출가하였으며 죽산 칠장사의 융철에게서 유가행을 배운 뒤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한다. 혜소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현재 비는 비 몸돌과 비받침인 귀부와 이수가 각각 따로 놓여 있는 상태이다.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해서체로 된 글씨가 단정하다.

비는 몸들 가운데가 갈라져 있다. 임진왜란 때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한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나한들은 참배객을 보고 웃고 나는 나한들을 보고

혜소국사비와 인접해 있는 나한전은 사방 2미터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성냥갑 같은 집이다. 나한전의 지붕 바로 옆에는 600년 묵었다는 노송이 금강역사처럼 서서 나한전을 지키고 섰다. 고려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소나무다. 나한전 안에는 딱 7인의 나한만이 안치되어 있다. 전설에 나오는 칠현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나한전이기 때문이다.

▲ 나한전에 앉아계신 일곱 분의 나한
ⓒ 안병기
나한좌상들은 채색된 작은 석상들이다. 나한들은 크기가 너무 작아 귀엽고 앙증맞기까지 하다. 한 칸밖에 안되는 전각을 받치고 있는 네 기둥은 세월에 깎여 나가고 좀이 슬었다. 나한전 안에 잠깐 앉아 있는 동안 아주머니 몇 명이 들어오더니 나한상 앞에 공손히 예를 올린다. 여기서 어사 박문수가 기도를 드리고 장원급제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탓인지 수험생을 둔 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한낮
대웅전 앞뜰에서 삼백년을 살아온 나무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한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어
어디를 건드린 듯
숨겨진 급소가 없다면
벗어나야 할 삶이 있을까?

-김광규 시 '보리수가 갑자기' 전문-


삶에는 남에게 숨기고 있는 급소가 많다. 급소란 벗어나고 싶은 삶의 약점이다. 어떤 대가를 무릅쓰더라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궁지이다. 시인에게 들으니 보리수나무마저도 급소가 있다지 않는가 말이다.

일곱 분 나한님들의 곁엔 사탕봉지가 잔뜩 쌓여 있다. 모두 자신이 가진 삶의 급소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두고 간 성의 표시 같은 것이리라. 사람들에게 벗어나야 할 급소가 많을수록 저 나한들의 사탕 봉지는 늘어날 것이다. 나한님들은 참배객을 보고 웃고 나는 나한님들을 보고 웃는다. 사탕을 밝히는 게 저 나한님들에게 숨겨진 삶의 급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