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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와 석탑만 남은 쓸쓸한 봉업사지
중부고속도로를 타고가다 일죽IC로 들어가서 38번 국도를 타고 안성 방향으로 가다보면 국도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봉업사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봉업사는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동국여지승람에 이곳에 태조 왕건의 진영을 봉안하였다는 것과 공민왕이 절에 들러 진전(眞殿)을 참배하였는데 현재에는 탑만이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까지는 사세를 유지해온 것으로 추측된다. 혹 왕조가 바뀌면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고려의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서둘러 폐사시킨 것이 아닐런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9호인 봉업사지 당간지주는 논에 일하러 들어간 농부가 받쳐놓은 지게 같다. 당간은 양지주가 1m의 간격을 두고 동서향로 마주보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기반석조차  사라진 매우 단순한 형태이다. 지주의 안팎 면에는 장식없이 소박하다. 지주 끝에 위로 길게 구멍을 뚫어  당간을 거는 간구를 장치한 흔적이 있을 뿐이다. 이 당간지주는 단순함에서 오는 담백함이 매력이다.
<보물 제 435호 봉업사터 5층석탑과 감실>

당간지주로부터 20여 미터 가량 뒤쪽에는 5층석탑이 있다. 석탑은 기단이 1층 몸돌이 다른 층의 몸돌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 비례가 맞지 않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다보면 그런대로 안정감이 있다. 아마도 길고 큰 1층 몸돌이 빚어내는 느낌일 것이다.

1층 몸돌은 판석으로 만들어졌다. 3면은 돌의 두께가 우주를 모각할 수 있을 정도의 두께이지만 감실이 있는 남쪽 판석만은 감실을 만들기 위하여 두꺼운 돌을 사용하였는데 감실을 설치한 못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지붕돌의 네귀에는 풍탁 등의 장식물을 설치하였던 못구멍이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근처에 절이 있었으나 불이 나서 없어지고 5층석탑만 남았다 하며 1968년 복원공사 때 4층 옥신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8호 죽산리 3층석탑>         

산기슭 아래에 있는 3층석탑으로 향한다. 밭 한가운데 서 있는 3층석탑은 보수 정비를 위해 비계를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기단 면석 아래로는 땅에 묻혀 있고 상륜부마저 없어 탑의 온전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중층기단은 갑석부분이 상당히 두툼하게 보이고 바깥으로 급하게 경사져 있다. 갑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희미한 연꽃무늬가 보인다. 이  탑의 1층 몸돌 역시 상대적으로 길어 전체적인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고려시대 초에 조성된 석탑으로 보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7호 죽산리 석불입상>      <석불입상 옆에 서있는 파괴된 석탑>

<석불입상 앞에 따로 놓인 연화대. 봉업사터에서 수습한 것이라고 한다.>

삼층석탑 뒷산 기슭에는 죽주산성 근처에서 옮겨왔다는 석불입상과 봉업사터에서 수습했다는 석탑부재와 연화대좌가 있다.  

아래에서 보았던 3층석탑처럼 보수정비 중인 석불입상은 몸체를 약간 뒤로 젖히고 가슴을 내밀고 꼿꼿하게 서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둥근 연화좌에 서있는 불상은 육계가 두툼하고 후덕한 얼굴이다. 법의를 양 어깨에 걸쳐 입은 통견에다 U자형 옷주름이 다리에까지 내려와 있다.

옆에서 바라보면 석불입상은 배를 앞으로 내밀고 서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볼 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석불을 조성한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시각적 보정 방법이 아닌가 싶다. 몸체에 비해 머리와 얼굴, 두 손을 크게 묘사해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조각수법이 뛰어난 이 석불입상은 고려초기 지방에서 유행했던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매산리 미륵당의 태평미륵,>

태평미륵이라 불리는 매산리 석불입상은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가 3.9m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미륵불이다. 석가모니 다음에 올 미래불인 미륵은 보살과 부처 2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이 입상은 미륵불의 모습을 하고 있다.

미륵불은 높은 머리 위에 사각형의 보개를 쓰고 있다. 높은 보관은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이를 통해서 이 불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볼에 밀착되어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귀. 번뇌·와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가 새겨져 있느 굵은 목.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앤다는 의미의 시무외인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 오른손. 이목구비는 전체적으로 비례가 맞지 않아 바라보는 이에게 괴이한 느낌을 준다.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수법과 부조화,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등이 충남 논산의 개태사 삼존석불을 연상시킨다.

미륵불 앞에는 작은 석탑이 있다. 몸돌은 1층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지붕돌만 남아 있는 형태지만 체감의 비례로 보아 본래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은 본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고 어딘가에서 옮겨져 온 듯하다.

밖이 아닌 마음 안에다 세우는 미륵

이중환의 《택리지》는 안성이 경기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하여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工匠)과 장사꾼이 모여들어서 한양 남쪽의 한 도회가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안성은 그렇게  팔도의 물산이 모여드는 집산지이기도 했지만 안성유기와 가죽꽃신으로 유명한 '안성마춤'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안성은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라 말기 비봉산 죽주산성에 기훤이 자리잡고 있었고 구예는 그런 기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궁예는 결국 양길을 찾아가게 된다. 이후 궁예는 세력을 잡으며 죽주지방까지 손에 넣었고 미륵을 자처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한편 안성엔 유난히 미륵이 많다. 태평미륵을 비롯해서 기솔리 쌍미륵과 궁예 미륵,아양동 미륵 등 안성을 두러보면 온통 미륵의 세상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민중들은 안성땅 여기 저기에 미륵을 세웠다. 그러나 제 가슴 밖에다 세워 놓은 미륵은 56억7천만 년의 세월이 흘러가더라도 결코 이 땅에 하생(下生)하지 않을 것이다. 미륵을 세우려면 자기 마음 안에다 세워야 한다. 마음 밖에다 세운 미륵은 기다려야 오는 세상이지만 마음 안에다 세운 미륵은 자기가 만들고 일구고 찾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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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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