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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부 기자가 학술토론회엘 갔다.

김상봉, 김상곤, 박명림, 손호철, 서중석, 안병욱, 정해구, 정현백, 최장집…. 정치·사회·역사·철학·교육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다 모였다. 주제는 '6월 민주항쟁과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7년 6·10 항쟁 19주년을 기해 기획된 토론회다.

사실 '취재용'은 아니었다. '여의도 정치'에 익숙한 정치부 기자가 소화하기엔 벅찬 주제다. 데스크에겐 "공부하겠다"는 이유를 댔고, 모처럼 국회를 벗어나 하루를 비정치인들과 보냈다.

5·31 지방선거 뒤 정치권은 탁구공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9월 정기국회를 지나면서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예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떤 정치인도 '헤쳐 모여'의 수준에 대해 확언하지 못한다. 서로 재고 있는 단계다.

민주당은 이날(29일) 국회에서 '바람직한 정계개편'이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노 대통령의 탈당이 정계개편의 신호탄이라든가, 열린우리당·한나라당의 거대 양당 체제는 서너개의 다당제로 쪼개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임채정 국회의장을 중심으로 여권에선 '개헌 불지피기'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3당 합당이나 DJP 연합 등의 사례를 보면 개헌은 명분일 뿐 정계개편의 지렛대가 되어 왔다는 점에서 정치권 밖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정치공학적 해법은 단순하지만 어지럽다. 여의도 밖의 얘기를 듣고 싶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다.

"운동? 제도? 정당이 제 역할 하면 된다"

▲ 최장집 교수(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날 토론은 후끈했다. 주최 측이 배포한 자료집 300부는 오전에 이미 다 나갔고, 추가로 300부가 더 나갔다. 정해구 교수(성공회대 정치학)는 이날의 '이상 열기'에 대해 "과거 운동했던 사람들이 지금의 민주주의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지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토론회는 오전 10시께 시작해 오후 6시에 끝났다. 발제문은 아래 통째로 첨부하니 그걸 참고하시는 게 좋겠다. 흥미로운 건 토론이었다.

김형기 교수(경북대 경제학)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경제민주주의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나?' 이제는 이런 문제에 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국민은 민주정부에 표를 주지 않는다"며 다소 거친 투로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가장 관심을 끈 건 3부 토론이었다. 발제는 스테디셀러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저자 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치학)가 맡았다. 사회를 본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역사학)는 "개판인 현실 정치를 질서정연하게 설명하는 최 교수가 놀랍다"고 소개했다.

과문하지만, 최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은 '운동'으로 풀거나 혹은 '제도'를 잘 만들거나. 최 교수는 이 양극단을 넘어 "정당이 제 역할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제도적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여기서 나왔다.

최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는 운동의 민주화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중산층과 기득권 세력들은 운동세력에 대해 일정한 부채의식 내지 열등감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운동의 탈동원화"라는 벽에 부딪쳤다. 최 교수는 "운동 시기 민주파들의 이상은 현실에서 그에 부응하는 정당의 건설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며 "좋은 정당 만들기"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최 교수는 개헌 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민주파들이 자신의 정치적 실패를 정당화하기 위한 출로를 제도개혁이나 헌정개혁에서 찾으려 한다"는 입장이다. 87년 헌법 체계가 정치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정치권의 개헌 명분에 대한 정면 비판이다.

정책의 연속성과 책임정치를 위해 5년 단임제는 4년 중임제로 바꾸고,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키자는 게 핵심적인 개헌 논리. 이에 대해 최 교수는 "그 동안 민주정부들은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대북 정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책 분야에서 변화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는 박명림 교수(연세대 법학)의 주장과 배치된다. 2부 발제자였던 박 교수는 "재임 중 업적을 내려는 대통령(현재 권력)과 차기 정권을 창출하려는 정당(미래 권력) 간의 충돌과 긴장으로 정당 정치의 연속성과 능력을 현저히 약화시킨다"며 '시민적 헌법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장집 주장은 배고프면 빵 사먹으라는 얘기"

▲ 김호기 교수(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자 이제, 최 교수가 내놓은 '정당운동이 대안'이라는 입장에 대한 토론이 남았다.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발본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김호기 교수(연세대 사회학)의 지적은 좀 완곡했다. 80년대 진보 지식인들의 근거지였던 '산업사회연구회'의 인연을 지닌 후학(後學)의 입장이라며, 최 교수와 대등한 위치에서 토론한다는 게 좀 멋쩍은 표정이다.

요지는 민주화를 압도하는 세계화라는 이슈를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한국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고용없는 성장, 양극화, 외국 투기자본의 침투 등의 세계화 과제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었다.

"나는 후학도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나가겠다"고 서두를 꺼낸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의 비판은 보다 신랄했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당정치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배고프면 빵 사먹으라는 얘기의 동어반복"이라고 일갈했다. 김 교수의 요지는 "그 정당을 누가 만드는가" 하는 것이다. 주체의 문제이고 시민이 문제다. 대안은? 교육에서 찾았다.

"정권 교체에도 민주화가 깊어지지 못한 까닭은 뭔가. 사유의 한계다. 소설가 최인훈은 막걸리 한 사발, 고무신 한 켤레에 영혼을 파는 사람들과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반세기 동안 그것을 극복해 왔다. 운동 그 자체가 교육이었다. 실천의 반복 속에서 배우고 깨우쳤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시민적 주체를 키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은 탈정치적이고 반동적이다. 내가 절망적인 것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정책·제도에 대해서만 말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계급적 이익에 기반한 판단을 하는 시민을 키우지 않고 제도와 정책은 뿌리내릴 수 없다. 시민교육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

"여성계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해 좀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며 여성정치인의 배출, 제도 개선 등에서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한 정현백 교수(한국여성연합 공동대표, 성균관대 역사학)는 '문화'를 꺼내들었다.

"우리가 과연 제도적 실천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서독에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한국의 진보세력과 서구의 진보세력은 일상적 삶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실천하는가에 굉장한 차이가 있다. '너 자신을 돌아보라' '사적인 것인 정치적인 것이다' 등의 화두를 던진 68운동이 왜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이제는 문화혁명이 필요하다. 여기에 나의 갈증이 있다."

손호철 교수(서강대 정치학)는 최 교수가 얘기한 것 중에서도 '대통령의 민주화'를 거론했다. 최 교수는 "권력의 최정점에서 대통령 개인을 둘러싼 정치가 전개되고 거기에서 갈등과 경쟁이 발생한다"며 '소용돌이 정치'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따라서 민중권력의 대변자로서 대통령이 아닌 제도로 대통령을 강제하는 '대통령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것.

하지만 철 지난 주장 아닌가? 노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탈권위인데?? 하지만 손 교수는 최 교수의 주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대통령의 민주화란 정당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탈당이나 당정분리는 정당 정치와의 분리를 초래하고 지지기반이 이탈한다. 대통령의 민주화에 반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당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구정물에서 연꽃을 피우는 게 정치"

▲ 손호철 교수(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우리가 안고 있는 민주주의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들이 제시되었다."

토론자들의 지적을 다 듣고 난 뒤, 최 교수가 내뱉은 일성이다. 그는 "운동이라는 인풋(input)을 통해 엘리티즘과 헤게모니에 의해 지배되는 민주주의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게 나의 문제의식이었다"며 "운동의 에너지는 굉장히 많은데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미숙하고 잘 안되는 데 안타까움이 있었다"고 소회를 드러냈다.

그의 답은 여전히 정당이었다.

"정치는 틀렸다? 그렇다고 탈정치는 아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다. 구정물에서 연꽃을 피우는 게 정치다. 운동세력이나 386이 정당의 문제성을 느끼면 가능하지 않을까? 사실 교육개혁보다 정당을 개혁하는 게 더 쉽다. 구정물 정치를 정화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마무리는 사회자가 했다. 역사학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늘 전진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퇴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냐는 것이다."

답이 아닌 물음표를 던져준 토론회였다.

[발제문 내려받기] 민주화운동의 계승과 발전(김상곤 교수)
[발제문 내려받기] 한국 민주화운동과 6월민주항쟁의 기념(정해구 교수)
[발제문 내려받기] 사회국가 그리고 민주헌정주의(박명림 교수)
[발제문 내려받기] 세계화 이후 경제·사회민주주의 현주소(장상환 교수)
[발제문 내려받기] 한국민주주의와 제도적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최장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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