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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자 <조선일보>를 보다가 문득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김종철 후보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어 여기 잠시 옮겨 본다.

"…93년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왔지만, 주체사상파가 아닌 비주류였던 탓에 낙선했다. 그때 총학생회장 당선자는 지금 청와대에서 일하고 있다."

김 후보와 같은 90학번인 나 또한 93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적어도 정우상 기자가 쓴 이 기사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 해당 기사 <조선일보> 인터넷판 캡처.
ⓒ 조선일보
전통적으로 서울대 운동권은 소위 주체사상파가 소수였다. 92년 대선 이후 93년으로 접어들면서 전체 학생운동은 큰 지각변동을 맞게 된다. 그 와중에 수많은 운동조직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그 결과 93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에는 이전보다 많은 다섯팀(아마도 내 기억이 맞는다면)이 출마했다.

그 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흔히 말하는 민족해방파(NL)의 분화였다. 서울대 내의 민족해방파 분포는 정통 주체사상파와 관악자주파로 크게 구분되었는데, 그 세력 비율이 대략 1대4 이상이었다.

관악자주파는 NL의 틀을 완전히 깨고 나온 만큼 서울대뿐만 아니라 전체 학생운동 판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이 주장했던 내용도 정통 주체사상파와는 매우 거리가 멀어서 '수령관'이니 '삼위일체'니 하는 거의 모든 내용을 폐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통일운동에서도 북한과의 연계에 무게를 두던 기존 NL과 달리 남한 내부의 자체적인 개혁과 함께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을 주장해 정통 NL들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기도 했다.

93년 총학생회 선거 당선자가 바로 관악자주파 출신이다. 관악자주파는 아예 NL의 틀을 벗고 나와 당시 민중민주(PD) 계열의 제파PD그룹과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라는 선거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당시의 선거구도는 주체사상파, 21세기, 그리고 PD다수파와 PD소수파, 경실련 등의 경합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세력분포를 대략 얘기하자면, 1:4:4:1:0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김종철 후보는 PD다수파의 총학생회장 후보였는데, 막판 조직력에서 밀려 아쉽게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러니까, 김 후보가 낙선한 것은 주체사상파와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90년대 들어 서울대 학생운동에서 주체사상파가 다수파였던 적은 거의 없다. 이 기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90년대 서울대 학생들이, 아니 적어도 서울대 운동권들이 그 정도로 비합리적이지는 않았다.

김종철 후보 "당시 당선자 주사파 아니다"

1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김종철 후보는 "당시는 운동권의 재편기였고, 총학생회장 당선자를 주체사상파로 보는 것은 맞지 않다. 당시 총학생회 당선자는 '관악자주파'로 이들은 전통적 NL과 달랐다"며 "다른 정파와 연합으로 당선된 게 맞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기사를 아무 생각없이 읽다 보면 주체사상파가 아닌 김 후보가 비주류라 낙선했고, 당시 당선자가 지금 청와대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청와대에는 주체사상파 출신의 운동권들이 넘쳐나는구나 라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거듭 얘기하지만 93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는 주체사상파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담당 기자가 왜 주체사상파를 들먹였는지, 당시 상황을 제대로 알고 기사를 썼는지 그 의도가 참으로 불순해 보인다.

<조선일보>는 항상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두고 "분열을 조장한다"라든지 "편가르기가 시작됐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는데, 정작 어거지로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건 <조선일보> 자신이 아닌가. 실체도 미약한 주체사상파를 들고 나와 사람들에게 레드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는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보인다.

남한 인구가 4700만이다. 그 중에서 혹자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리 많다 보면 별 희한한 생각을 가지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대다수의 민주화 운동세력은 주체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들과의 내부 투쟁을 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운동권들이 "너 주사파지?" 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고 하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주체사상은 현재 북한에서조차 예전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당-수령-인민'의 삼위일체가 주체사상의 핵심요소 중 하나인데, 당장 김정일은 '수령'이 아니라 그저 '국방위원장'일 뿐이다.

제발 이제는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친북 빨갱이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다"는 '소설'을 그만 써주길 당부한다. 황우석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과학적으로 명명백백한 사안을 놓고서도 온 국민이 혹세무민에 몇 달을 시달렸는데 이런 애매한 사안을 놓고서 주요 언론사가 혹세무민 하려고 든다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나. 부디 <조선일보>는 언론사로서의 정도를 걷기를 당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겨레 필진 네트워크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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