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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물결
짧지도 길지도 않은 2시간 30분가량의 시간. 1 대 800의 절대 불균형한 토론에선 무슨 말들이 오갔을까.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 과도기인 1969년 5월 13일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강의실. 당대 전성기를 누리던 문학가이자 투철한 극우파인 미시마 유키오와 좌파의 대명사 동경대(원제를 살리는 의미에서 일어발음을 배제했다)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위원회)' 패널 7명이 강단에 섰다. 미시마는 혼자였고 상대는 800명을 등에 업은 7명이었다. 일본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논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토론은 당시 휴교령이 내려진 동경대 전공투 학생들이 미시마를 초청해 이뤄졌다. 단신으로 동경대 교양학부 강당에 들어선 미시마는 의미를 담뿍 함축하면서도 균형을 잡으려는 듯 입을 연다.
"이렇게 나를 세우는 것이 반동적이라는 의견이 있었다고요?"

1 대 800의 끝장 토론, 차이만 확인한 채 마무리

토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꽃 튀는 논쟁으로 번진다. 쏟아내는 언어의 지평이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자아와 육체, 자연 대 인간, 계급투쟁과 자연으로 돌아가는 투쟁, 게임 또는 유희의 시간과 공간, 천황과 프리섹스와 신인(神人) 분리사상, 사물과 말과 예술의 세계, 관념과 현실에서의 미(美) 그리고 천황·미시마·전공투라는 이름에 대해서 까지.

신격의 천황을 지키고 부활시키려는 미시마와 '욕구불만의 비참한 육체'를 가진 인격체로 전락한 '천왕'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전공투 사이에서 발견되는 간극은 극우와 극좌의 이념적 좌표가 사사분면 대척점에 위치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논쟁은 그러나 '스스로 적을 논리적인 형태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적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토론한다'라는 기본 명제에 충실하면서 전공투의 문제제기와 미시마의 대응과 반격, 둘 사이의 겹쳐질 수 없는 평행선을 발견하면서 마무리로 치닫는다.

미시마는 전공투를 향해 끊임없이 천황의 개념과 권위를 인정하기를 요구했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공투(공동투쟁)에 기꺼이 응하겠다며 분위기를 정리한다. 그러나 전공투는 천황의 개념은 이미 그를 회자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미시마에게 공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받아쳤다.

"지금 제안은 아주 묘한 꼬드김이라 매우 유혹적이지만, 나는 공투를 거부합니다"

논쟁에 숨은 약속...이듬해 비합법 투쟁 후 할복자살

논쟁은 끝났다. 그러나 논쟁의 정점에서 미시마가 뿜어냈던 한 호흡이 목에 생선가시처럼 걸린다.

"나는 한 사람의 민간인입니다. 내가 행동을 벌일 때는 결국 제군과 똑같이 비합법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합법적으로 결투의 사상으로 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니까, 포돌이에게 잡혀가기 전에 자결이든 뭐든지 해서 죽어버릴 겁니다. 그런 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때를 대비해서 몸을 단련시키고, '근대 고릴라'로서 훌륭한 고릴라가 되고 싶습니다"

실제로 미시마는 이듬해 11월 육상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실을 점거, 헌법의 나약함을 외치며 동경대 강당에서 흘렸던 '자결'을 실행한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게 할복으로 풍미한 한때를 마감한다.

'인간'과 '역사'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미시마와 '인간'과 '역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전공투의 치열한 공방. 이 공방은 1969년에 끝나 1970년 미시마의 자결로 종지부를 찍나 했지만 30년 후인 1999년 미시마가 궐석인 채로 또다시 진행된다.

사실 이 책 읽기의 쏠쏠함은 30년 후에 모인 당시 전공투 주역들의 '복기(復碁)'에 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평가와 반성, 그리고 논쟁에서 놓쳤던 부분을 현재라는 공간 속에서 '시뮬레이션'하는 모습은 현대 일본 지식인이 어떻게 탈근대화를 이뤘는지를 보여주는 표본 같다.

30년 후 모임은 비교적 비평에 가까운 논리로 펼쳐진다. 파리 5월 혁명, 민족적 시간과 혁명공간, 스탈린주의, 무정부주의, 국어의 성립, 일본과 유럽의 근대과학, 세계 경제 시스템과 일본, 과학기술과 존재론, 인구 문제 등 주제의 지평은 무한하리만큼 넓어졌고 분석은 평자의 연륜만큼 깊어졌다.

좌우의 이념적 대립이 사회 시스템 전 분야에 미친 영향을 곱씹는 자리에서 평자들은 청년시절의 순간적 불꽃이 아닌 용광로 같은 지식을 쏟아내고 있다.

다시 미시마로 돌아가 보자. 미시마는 동경대 방문을 대체로 유쾌한 경험이었다고 후기에 쓰고 있다. 미시마 역시 동경대 법대 졸업생인 만큼 낯설지는 않았지만 패널 토론을 하는 2시간 30분 동안은 편안하고 부드럽지만 않았다고 했다. 그것을 미시마는 몇 가지 짜증 나는 관념의 상호모색이라고 표현했다(사실 책 내용이 관념어의 나열이 심하다).

양해 불가능한 질문과 사막과 같은 관념어의 나열 속에서 미시마는 정신과 육체의 극심한 피로를 겪었고 시간 때문에 충분한 문제 전개를 못했다고 술회했다. 전공투와의 토론 결과에 대해서는 논리성은 인정하되 그들이 노리는 권력이 그다지 논리적이지 않다는 지적과 함께.

자기부정의 논리...변증법의 안티테제

이는 당시 동경대 전공투가 내세웠던 '자기부정의 논리'와 상통하고 있다. 자기부정이란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전공투의 행동강령이 대변하는 논리다. 동경대생들이 자기부정 논리를 투쟁주체로 삼은 것은 지성의 중심인 동경대를 지켜야 한다는 학교와 반학생운동 진영 분위기를 해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소속집단(동경대)의 좌표와 자아(동경대생)의 윤리적 좌표가 공교롭게도 한 점에서 충돌함에 따라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자기부정 논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종국에는 일본 학생운동의 한계를 스스로 지운 업보로 작용했지만.

미시마는 이런 자기부정 논리 속에 폭력혁명을 갈망하던 전공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이 책 저변을 흐르는 변증법적 안티테제인 것이다.

"평화주의의 미명 뒤에 언제나 단 하나의 옳은 전쟁, 즉 인민 전쟁을 긍정하는 논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위험스럽게 여겨왔다. 이것이 내가 평화주의에 대해 커다란 증오를 품어 온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나의 폭력 긍정은 당연히 국가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므로, 평화주의의 가면 뒤에 숨은 인민 전쟁의 긍정이 국가 초극을 목적으로 하는 양하는 기만에 대해서 싸울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

글쓴이 : 미시마 유키오 外 
옮긴이 : 김항(도쿄대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표상문화론 박사과정) 
펴낸곳 : 새물결 
펴낸날 : 2006. 3. 28 
쪽 수 : 544쪽 
책 값 : 1만9500원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기무라 오사무 외 지음, 김항 옮김, 새물결(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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