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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화를 읽는 키워드는 '과잉'과 '적의 부재(不在)'입니다. 이 둘이 이미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세계 규모에서 보면 농산품이든 공산품이든 뭐든 남아돕니다. 또 적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과잉과 적의 부재가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제의 경험으로 내일을 재단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기껏 그로 해서 빚어지는 현상만을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과잉... '남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우선 과잉. 1970년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전체의 생산능력이 의식주 유틸리티 모든 부분에서 수요를 넘어서는 데 이르렀습니다(68년 뉴레프트 운동가들의 분석). <세계화의 덫>이라는 책에 따르면 90년대 후반에 벌써 그것이 다섯 배로 불어났습니다.

옛날부터 남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원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생산이 소비를 앞질러서 과잉이 주기적으로 나타나, 크고 작은 디플레를 일으켜 왔습니다. 그러나 기업이 쓰러지고 실업사태가 빚어지는 고통을 겪어내면 재고가 소진되면서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먹으면 설사하는 생리현상처럼 자본주의가 건강을 되찾는 방식이랄 수 있었습니다.

▲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생산된 수출용 승용차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나 70년대 이후의 이 '절대 과잉'은 다릅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자체의 근거를 무너뜨리고 있는 전혀 성격이 다른 과잉입니다.

모자라니까 더 생산해야 한다, 모자랄수록 나누는 것이 먼저라고 하던 이들 '주의'의 전제를 휩쓸어 버리고 있습니다.

전제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를테면 땅이 꺼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반이 내려앉고 있어서 빌딩이 조금씩 붕괴되고 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모자람이라는 전제 대신에 '생산과잉-유통과잉-소비과잉-환경파괴-자원고갈'이라는 악순환 고리가 이미 인간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전개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과소시대'의 심성, 이념,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다른 한편 환경재앙으로 나타나 종내는 인간과 그 삶 자체의 적합성을 묻고 있습니다.

묻고 있다기보다는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자기전개를 계속하면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인간 사회를 결정해 가는 이 의지를 근대 합리주의는 보통 때는 무시하다가 정작 닥치면 '신의 뜻'으로 치부하고 말지만, 우리는 거기서 우리 사회와 개인의 실존을 천착해야 합니다. 거기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의 집중과 '변형된 형태의 공황'

아무튼 경제에서는 남아돌면 그냥 널려있지 않고 한 쪽으로 집중합니다. 자동차 생산 능력의 과잉이 세계의 자동차회사들을 너댓 개 정도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도 집중이지만 무엇보다 돈으로의 집중입니다.

이른 바 과잉유동성. 이 집중의 지금까지 가장 큰 흐름은 90년대말 세계를 휩쓴 머니게임이었습니다.

70년대 오일 머니가 유럽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유로 달러가 되고 이것이 다시 80년대 일본의 무역흑자, 이른바 재팬 머니와 합쳐지면서 '무국적 금융자본'이 탄생했습니다.

이 미국과 관계없는 달러는 벌써 80년대 중반부터 국가간 무역실물거래가 연간 5조 달러인 데 반해 하루 1조 달러의 국제증권, 환투기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규모에서의 부의 집중입니다.

▲ 지난 4월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외환은행 노조원 10여명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 '집중'은 97년 그 정점에서 우리에게 IMF를 남기고 헤지펀드 소로스의 말처럼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썰물은 언제고 다시 밀물처럼 밀려올 수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한 나라에서 상위 소득 1%에 GNP의 30% 이상이 집중되면 디플레, 경제공황을 걱정하게 됩니다. 복잡한 논리지만, 노름판에서 한 사람이 판돈을 다 따면 판이 계속될 수 없는 것과 이치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60억 세계인구 중에서 겨우 230만이 세계 부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극에 달한 부의 편재, 거기 둥지를 튼 머니게임은 언제고 세상을 공황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NASA에서 미사일의 탄도를 계산하는 수학자들을 모셔다가 이론으로 무장한, IMF가 '새로운 세계 자본시장'이라고 애매하게 명명한 이들 세력은 전 세계를 무대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 1조 달러를 맹렬히 '허순환'시키고 있습니다. 허순환이란 재화의 생산이나 무역 같은 실물경제와는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과잉이 집중을 부르고 다시 30년대 대공황처럼 주가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른바 버블이 꺼지면서 촉발되는 공황은 전통 자본주의가 여러 번 겪어냈습니다.

그러나 국가라는 단위경제의 틀 안에서 공급과잉으로 일어나는 종래의 공황과는 달리, '절대과잉'이 경제에 국경이 없어진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모여들고는 있지만 정작 비는 내리지 않는 것처럼, 국경이라는 틀이 없어져서 과잉이 세계를 덮는 공황으로 폭발할 집중력을 아직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지금 빚어지고 있는 대혼돈의 '경제부분'이 그대로 '변형된 형태의 공황'인 것 같습니다. 국민소득론의 대가인 어빙 피셔가 1930년대 대공황이 시작된 지 몇 년이 지나서도 공황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나중에 가서야 '그 때부터 공황이 시작되었구나' 하는 것이 공황입니다. 그만큼 공황은 그 자체가 경제학에서 수수께끼입니다.

경제, '질서정연'의 천문학에서 '변화무쌍'의 기상학으로

아무튼 29년 뉴욕증시 대폭락에서 시작해서 2차대전으로 이어지는 30년대 대공황의 전개는 과거이기 때문에 '과잉-집중-버블-공황,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정치적 결과까지 흐름이 분명하지만 지금 전개되고 있는 '대변화의 공황 부분'은 거기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은 90년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남미에서 이른바 '남미화'의 80년대 10년을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만, 이를 '변형된 형태의 공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잉이 집중하고, 머니게임·투기판이 벌어져 미국과 일본의 주식시장에서 GNP의 30~40%가 깨져나가도, 다시 집중하고 다시 머니게임이 벌어집니다. 경제대국 일본은 10여년을 두고 디플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데 바로 옆 중국은 '삼황 오제 이래의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국경이라는 경제의 틀이 없어져서, 경제가, 비유하자면 질서가 정연한 천문학의 영역에서 변화가 무쌍한 기상학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크게 보면 국경이 없어지고 있는 것처럼 근대 합리주의 패러다임이 깨지면서 그것이 수백년 동안 애써 만들어 놨던 체계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뭐든 남아돌기 때문에 세계 전체로 보면 어느 나라도 더 이상 경제발전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또 경기 순환과 같은 경제에 관한 종래의 경험ㆍ법칙들이 모두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청년실업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진은 일본 도쿄 신쥬쿠카부키죠 거리의 청년 노숙자들.
ⓒ 전국백수연대
제로 성장시대, 선진국 경제는 벌써 20여년 전부터 거기 익숙합니다. 경제학이 거시경제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학자들이 말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30여년이 지났습니다.

뭐로 보나 여건이 좋은 선진국들이 수십년 정체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이유를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일본뿐만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빚을 내서 흥청거리지만, 미국 경제도 속은 일본이나 유럽보다 더 허약합니다.

또 선진국이 하나만 더 늘어도 지구 규모의 환경재앙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숫자로 나오고 있습니다. 끝없는 확대 재생산이 아니면 유지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가 갈 데까지 간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더 확실한 것은 우리 위정자들이 애써 부정하지만, '대변화의 경제부분'이 지금 이 땅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보다 결과에서 더 심각한 '장기불황'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합니다. 세계적인 추세지만 우리나라가 제일 심각해서,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가히 공황 수준입니다.

"장기불황이 아니라 경제의 양극화가 문제다"라고 정부는 강변하지만 이 양극화가 바로 부의 집중이고 집중은 언제고 붕괴되고 마는 것이 불황, 공황입니다. 무슨 분배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한 마디로 반도체ㆍ철강 등 몇몇 대기업에만 돈이 집중하면서 다른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들이 모두 허덕이고 있어서 그것이 이리 저리 파급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부의 편재로 공황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보다 '시장'이 먼저 알고 반응합니다. 요즘 보면 3천원짜리 식당에 손님이 북적대고 할인점에서는 10년 전 가격으로 물건을 판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변형된 형태의 공황', 일본과 같은 디플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부의 편재보다 더 심각한 적의 부재

적의 부재는 부의 편재보다 더 심각합니다. 부의 편재는 설사하는 것처럼 공황이라는 카타르시스를 통해 깨지면서 다시 균형을 회복할 수도 있을는지 모르지만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든 적의 존재가 반드시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ㆍ소 냉전을 끝으로 적이 없어져서 미국이 곤혹해 하고 있습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명제가 성립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적이 없으면 국가도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적의 부재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이 끝나서 전승국만 남게 되고 적이 없어지자, 좀 구차하지만 패망한 독일과 일본을 '전적국'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상대로 유엔과 나토 시토 등 '집단안보'를 펼쳤습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국제정치는 세력균형이었습니다. A국과 B국이 동맹을 맺어 C국과 D국 연합에 대항한다는 식입니다.

예컨대 국제정치학의 비조격인 미국의 한스 모겐소 교수는 이런 세력균형을 여러 나라들의 외교정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이용희 교수는 "아니다, 세력균형은 국제정치의 원리"라고 정의했습니다. 적이 없으면 안 된다라는 국가의 속성을 꿰뚫은 것입니다.

▲ 북핵저지시민연대 회원들이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앞에서 북한의 핵보유 선언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아무튼 2차대전으로 전승국만 남아서 더 이상 이런 세력균형 패턴이 불가능해지자 루즈벨트의 이 집단안보 구상이 나온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를 '세계제국주의'라고 불렀습니다.

지난해 화제가 된 '균형자'라는 것은 원래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이나 이 루즈벨트의 세계제국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의 세력균형을 밖에서 다시 균형잡아 준다는 초월적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노 대통령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아무튼 당시의 에치슨 국무장관은 루즈벨트의 세계제국주의는 그러나 '현실 정치'를 모르는 이상주의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럴듯한 적이 없으면 전쟁이나 전쟁 준비가 없으면, 도대체 나라를 유지할 수 없는데 무슨 전적국이나 집단 안보가 그런 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이나 전쟁준비가 사회구성의 핵이라는 이론을 실제로 내놓고 전개한 것은 나치즘입니다. 칼 슈미트라는 나치 이론가의 이 나치즘은 지난 시대 박정희 유신헌법에서 철학적 기초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아니더라도, 북한의 '선군정치'가 아니더라도, '전쟁'은 권력의 속성 한가운데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내놓고 전개하는가, 암묵적인 전제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루즈벨트가 갑자기 사망하자 '에치슨들'은 매카시 선풍을 일으키면서 공산주의를 새로운 적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때 때마침 "한국전쟁이 나타나서 우리(미국과 일본)를 구했다"(미 국가안보회의 문서)는 것이 미ㆍ소 냉전체제입니다.

6ㆍ25동란이 일어나, 소련을 적으로 만들 수가 있게 되어서, 결국은 미ㆍ소가 세계를 나누어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냉전이란 미ㆍ소가 "서로 적대함으로써 자기 영향권을 지배하는 체제"였다는 이 간단한 사실을 냉전이 끝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적으로 키우는 미국

증오를 앞세워 역학을 숨긴 냉전논리에 사람들은 현혹되게 마련입니다. 원래 역학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지금도 예컨대 대북강경책을 주도하는 대부분의 미 행정부 관리들까지도 북한이 나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그렇게 대응하는 것이라는 이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한가운데 도사린 소수의 이데올로그들만이 감각적으로 그 같은 국가의 본질을 구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세계지배를 합리화할 수밖에 없는 미국의 '국제정치학'이 그런 진실을 알려 줄 리도 없습니다.

한반도는 벌써 50여년 전부터 이렇게 '세계사의 중심'으로, 처음으로 세계가 미ㆍ소체제라는 하나의 체제가 된 이후 내리, 맨 앞에서 갖은 고통을 겪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가 그 이유를 똑바로 모른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미ㆍ소 냉전을 마지막으로 어디서도 적을 구할 수 없어서 다시 여기서 적 만들기 게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 따라 다시 춤추고 있을 뿐입니다.

▲ 지난 2003년 한국을 방문한 럼스펠드 미국방장관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금도 백악관 깊숙한 곳, 럼스펠드, 체니와 같은 '네오콘'들은 국가라는 '따거'가 요구하는 '국가의 적'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동분서주, '적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 개발이 부시의 '적 만들기'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대포동에서 미사일을 발사하자 럼스펠드는 "God bless Kim"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에 신의 가호를!" 한 마디로 북한을 '적으로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인 북한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적대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북한의 폭정을 새삼 문제 삼고 나섰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북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쉬운 대로 적으로 삼는 다른 한편, 계속 적대관계를 유지해 나가노라면 북한의 후견인격인 중국이 언제고 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미국의 파워게임에 응하게 되어 마침내 미국은 중국이라는 '그럴 듯한 적'을 갖게 된다는 시나리오입니다.

전쟁 벌이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기서 적을 구하는 데 실패하게끔 예정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이 달라져서 그렇습니다. 근본부터 뒤흔들려서 그런 것이지만, 전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싸지고 있는 것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1981년 어느 학자가 '전쟁비용증가의 법칙'이라는 것을 내놨습니다. 전략폭격기 B1의 대당 가격이 20억 달러, 토마호크 1발이 5백만 달러, 94년 패리 전 미 국방장관은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나면 당시 일본 GNP에 육박하는 4조 달러가 들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전쟁은 이제 비싸져서, 항간에는 미국이 석유를 노리고 이라크를 침략했다는 억지가 통하지만, 정말 전쟁은 더 이상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정치의 연장'도 될 수 없으며, 경제의 확대균형을 보장해주는 수단도 아닙니다. 체니나 럼스펠드가 아무리 중국을 적으로 만들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 용산전쟁기념관에 전시된 미사일들 사이로 국방부 건물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더구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인데, 지난번 이라크전쟁에서 보면 양쪽 다 병사들이 조금도 용감하지가 않았습니다. 국민들의 전쟁용의가 사라진 것입니다.

참호 속에서 두려움에 울부짖는 이라크 정예부대 소대장의 교신내용이나, 전쟁공포 때문에 정신착란을 일으켜 줄줄이 후방으로 실려 가는 미군 직업 하사관들의 모습이 <타임>과 <뉴스위크>의 커버스토리가 되는 일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사람을 전쟁에 동원하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습니다.

요즈음 이라크 전후문제의 전개 모두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전쟁이 불가능해지고 있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에 부시가 밀리면서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하나도 빗나가지 않습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우리 위정자들이나 언론, 전문가들의 대응이나 생각도 모두 잘못되어 있습니다. 적의 부재라는 대변화의 자기전개가 북한 핵 문제의 본질입니다.

무슨 핵확산 방지나 대량 파괴 무기의 수출 문제, 또는 동북아 비핵화문제거나 한반도의 전쟁위기 같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부시의 의도를 분명히 알고,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도가 왜 시대착오에 불과한가를 알아야 이 대혼돈의 시대에 나라를 경영할 자격이 있습니다.

세계화가 바로 근대국가의 와해

국제 환투기 문제는 과잉의 자기 전개이며 북한 핵은 미국의 '적 만들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시 모두 대변화가 '국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 간단한, 무슨 다른 이론이 필요 없는, '새로운 국제정치 기본 틀'에 익숙해지면 '세상이 보입니다'.

근대국가의 특징은 영토국가, 경제국가, 군사국가입니다. 그러나 동구권의 대분열이나 서구의 대통합(EC)에서뿐만 아니라 소위 '세계화'에서 분명하듯 한 나라의 경제권이나 영토들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여기 다시 적이 없어지고 있어서 근대국가의 존립근거는 모두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도 없이 요즘 누구나 말하는 이른바 세계화가 바로 보면 이 근대국가의 와해입니다. 세계화라는 현상, 세계화와 지역화는, 바로 국가가 안팎으로 갈라지고 있다는 뜻인데, 국가가 와해된다는 것이, 국가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 감정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유럽은 이제 국민국가가 아니고 "네트워크 국가다"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와해입니다. 고대 왕국, 봉건국가, 근세 절대군주시대를 지나온 것처럼 근대국가도 지금 "지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국가의 와해는 납득하지 못합니다. 국가의 와해나 그것이 불러오고 있는 대혼돈은 낡은 패러다임의 논리나 가치관으로는 의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부시는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 오마이뉴스 남소연
서구의 대통합은 벌써 50년대 유럽철강동맹에서부터 시작되어, 비유컨대 익은 감이 떨어지듯 자연스럽게 이뤄져서 그것이 근대국가의 와해인 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동구의 대분열은 공산주의의 붕괴로만 비쳐지고 있는 것이고, 국가의 와해와 악전고투하는 부시를 사람들은 미국 헤게모니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와해는, 후술하겠지만 근대국가라는 제도가 근대 합리주의가 구축한 최고의 형태라는 점에서 보면, 근대합리주의의 파탄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서 분수령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뉴턴의 물리학이 수정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인간 사회에서의 근대국가 와해는 실제로 하나의 패러다임 시프트인 것 같습니다.

'세계화'를 맨 처음 말한 사람은 50여년 전의 떼야르 샤르댕 신부였습니다. 후술하지만 그의 세계화, '인간의 세계화'를 알아야 세상이 어떻게 유기적인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왜 동양철학과 현대물리학이 주장하는 세계관이 분수령 너머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부시는 지금 북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근대국가의 와해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변화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국가와 그 세계체제의 와해가 갖는 의미, 나아가 언제, 어떻게 라는 그 전개를 나라 안팎에서 치열하게 파헤쳐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대신하는 새로운 질서의 모습을 먼저 봐야 우리의 살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변화에 순응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크건 작건 환경에 적응할 수 없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반도는 근대국가 세계체제가 대변화와 마지막 대회전을 벌이는 곳이라고 했지만, 대변화, 과잉과 적의 부재는 이미 우리 현실에서 국면을 일차적으로 장악해 가고 있습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와 관련된 나라 안팎의 큰일들은 다시 말하지만 모두 과잉과 적의 부재가 자기전개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비록 지난 시대와 외양은 같아 보여도 속은 모두 변해 버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 ③한반도 정치경제학 ④정치대란 ⑤사랑의 패러다임 ⑥나는 알았네 생명! ⑦만들어가는 의지의 공부길 ⑧대~한민국의 아이디 등의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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