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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가 고 구본주씨의 대표작 '갑오농민전쟁'. 갑오년 농민지도자 전봉준 혹은 김개남 장군이 모델이다.
ⓒ 문만식
▲ "주민은 평화를 사랑해 - 효태" . 대추리 주민 방효태(70)씨가 화가들이 농협창고에 그린 벽화 아랫부분에 자신의 소망을 적어넣고 있다.
ⓒ 문만식
이태 전 작고한 조각가 구본주(작고 당시 38세)씨의 대표작인 청동상 '갑오농민전쟁'이 미군기지 확장예정지인 평택 대추리 대추분교에 섰다.

제막식에 앞서 일찌감치 나온 주민들은 천으로 덮인 동상 가까이에서 제막식을 기다리며 담소를 나눴다. 주민들은 또 제막식 직전 농협창고에 완성된 대형벽화에 남은 물감으로 소망을 적기도 했다.

4일 오전 11시 2.5톤 화물트럭에 실려 판교에서 대추분교로 옮겨진 동상은 1시간 남짓 설치 작업을 거쳐 오후 3시 제막됐다. 이 자리에는 고인의 부인이자 작품을 기증한 조각가 전미영(39)씨, 고인과 함께 미술운동을 펼치던 동료작가들과 지인들, 그리고 대추리 도두2리 마을주민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문예인들 모임인 <들사람들> 대표이자 2월부터 12주 일정으로 대추리에서 진행 중인 문예행동 '들이운다' 연출자이기도 한 가수 정태춘씨는 "문예인들이 무언가 흔적과 연고를 남기고, 끝까지 주민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 훌륭한 조각 작품이 싸움 현장에 섬으로써 이곳에 더 끈끈한 애정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소감을 나타냈다.

작품을 기증한 전미영씨는 "할 말이 없습니다"며 "힘내시고 이기시고 열심히 싸웁시다"라는 짧은 인사말만 남겼다.

▲ 구본주의 '갑오농민전쟁' 황새울에 살아오다! 기증자 전미영씨는 이 작품이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문만식
▲ 동상을 기증받은 주민들은 동상 주변에 촛불을 켜고 "대추리를 지키자"는 소원을 빌었다.
ⓒ 문만식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범국민대책위 상임대표 자격으로 선 문정현 신부는 "이 동상이 어디서 실어온 게 아니라 땅에서 쑤욱 솟아오른 것 같다"면서 "그 모습이 대추리 도두2리 주민들의 모습이었다"고 기뻐했다. 그는 "이 동상은 제때에 제자리에 솟아올랐다"며 동상 제막을 환영했다.

정지영 감독 등 영화인들도 제막식에 참여했다. 배우 정진영씨는 "스크린쿼터나 미군기지 확장이나 결국은 같은 문제"라며 "같은 장소가 아니더라도 같은 마음으로 함께 싸운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성원하고 싸우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고인의 가까운 친구였던 가수 연영석(40)씨도 이 자리에 초대받아 축가를 불렀다.

참석자들은 제막식을 마친 뒤 준비된 막걸리를 동상 주위에 뿌리며 미군기지로부터 고향땅을 지키자는 고수레를 했다. 또 '대추리를 지키자'는 글이 새겨진 초에 불을 켜 동상 주위에 놓고 소원을 기원했다.

한편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 임원들과 주민들, 그리고 대추리에 이사온 이주자들은 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국방부와 용역업체 직원들이 몰려올 것에 대비하느라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었다. 6·7일에 285만평 대추리 도두리 논에 철조망을 치고 이를 위한 자재를 대추분교에 들여놓겠다는 국방부 계획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날 제막식이 진행되는 동안 미군기지에서는 U2 첩보기가 연달아 이착륙했다.

▲ 청동상 '갑오농민전쟁' 위로 미군기지에서 발진한 미군의 U2 첩보기가 날고 있다.
ⓒ 문만식
▲ 한편, 배우 정진영씨도 '갑오농민전쟁' 제막식에 참석했다. 뒤 배경은 주민들의 얼굴이 창마다 그려진 대추분교 건물.
ⓒ 문만식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인터뷰] 고 구본주씨의 부인 전미영씨

▲ 동상이 제막된 대추분교에 선 조각가 전미영씨
- 당신도 조각가라고 들었다.
"홍익대와 성신여대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지금은 문화중심도시조성추진기획단 행사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다. 대추리 이야기는 간간이 들었는데, 여기에 미술문예 쪽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붙으면서 목판화가 이윤엽씨를 통해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 고인과는 처음 어떻게 만났나?
"구본주씨와는 대학 2, 3학년 때부터 사귀었다. 본주씨가 집시법으로 수배를 받으면서 수원에서 피해 다녔다. 당시 최춘일, 황호경, 이윤엽, 그리고 부산일보에 '만인보'를 그린 손문상 같은 이들과 만나 노동미술연구소 활동을 했다.

그때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본주씨는 86학번이고 나는 87학번이다. 그리고 본주씨가 사고를 당한 건 37살 때다. 학교에서 미술 모임이 있었고 그를 통해 본주를 알게 됐다. 본주씨가 첫 전시에 '파업'이라는 작품을 냈는데 너무 멋졌다. 아, 대한민국에도 이런 작업을 하는 조각가가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팬으로서 그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 '갑오농민전쟁'은 어떤 작품인가?
"'갑오농민전쟁'은 본주씨의 대표작이다. 사회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변혁의 시기마다 주체적으로 조직화하는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다. 농민군상, 파업현장의 조직화된 노동자상 같은 작품을 학교 때부터 많이 했다.

당시 한국미술에 평면과 판화는 많았지만 조각은 거의 없었다. 94년도에 '동학농민혁명100주년전'이 있었다. 각 장르별로 대표작가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그때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와 '갑오농민전쟁' 두 작품을 냈다. '갑오농민전쟁'은 전봉준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원 전시작은 폴리코트였다. 구본주가 사고를 당한 뒤 첫 작업이 이것을 동으로 바꾼 것이었다."

- 왜 작품을 이곳에 기증했나?
"여기는 농사짓는 땅이고 농민이 주축인 곳이다. 그래서 '갑오농민전쟁'이 여기에 서는 것은 있을 자리에 있는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은 갑오농민전쟁 시기 농민분들의 지도자였던 김개남, 전봉준을 모델로 한 것이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주축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 점에서 '갑오농민전쟁'과 대추리는 연결돼 있다.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 <들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걸로 안다.
"열심히 하진 못하고 있지만 문화창작자들이 끼어들 여지가 있으면 뭐든지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뭐든 많이 알아야겠다는 게 기본 생각이다. 오늘 제막식 같은 이런 관계를 통해서 본질이 많이 알려지면 하나하나가 연결되는 거 아닌가. 여기 주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돈 많이 받아서 땅 사서 잘 살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싸우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매력적인 인간들이다. 이들과 같이 하고 싶다."

- 구본주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구본주도 그런 사람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가난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애정을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기도 하다."

- 작품 기증 의사를 밝혔을 때 주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대책위 쪽에서 이걸 갖다 놓는 걸 좋아하시더라. 함께 설치작업을 하는 이런 과정이 또 한 번의 감명이고 영광이다. 어디서 조각이 이런 대접을 받겠는가. 이런 과정이 내겐 힘이 된다. 장면 장면이 주는 것이 내일로 가는 힘이 된다. 모으고 키우고 치유하는 건 문화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가지려 하면 잃고 반대로 주면 커진다. 이 작품에 대해 그저 '좋다'는 말을 들으면 좋겠다. 보는 사람이 그냥 좋다면 좋겠는데 무서워 보일까 걱정도 된다. 특히 밤에 그렇다. 밤은 또 다른 시간대다. 조명을 설치해 부드럽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배경은 소박하고 잔잔하다. 그런데 상은 굉장히 강하다. 지킴이처럼 보이길 바란다."

"본주는 없지만 작품으로 여러분과 함께 할 것"
[인터뷰] 문화노동자 연영석씨

▲ 연영석씨가 제막식에 초대받아 축가를 부르고 있다. 뒤에서 지켜보는 이는 가수 정태춘씨.
- 어떻게 오게 됐나?
"전미영씨한테서 제막식이 썰렁하지 않게 노래를 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문예인들 모임인 <들사람들>에 이름은 올렸지만 여기 와볼 기회는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다."

- 고인과는 어떤 사이인가?
"나를 사람 만들어준 친구다. 나이는 같아도 대학에는 후배로 들어갔다. 내가 지금은 노래를 하지만 전에 조각을 배웠다. 내게 사회가 어떻다느니 세상이 어떻다느니 이야기해줬다.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그 인연으로 나도 학생운동을 하게 됐고 지금도 노동현장을 다니고 있다."

- '갑오농민전쟁'이 여기 서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근사한 박물관에 서는 것보다 여기 서 있는 게 보기가 더 좋다. 여기 서 있을 수 있다는 게 좋다. 본주는 비록 이 세상에 없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 최근 어떤 활동에 주력하고 있나?
"이주노동자와 장애인 쪽에 가서 노래 나누고 얘기한다. 며칠 전 수원에서 터키 노동자가 7층 옥상 화장실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다. 8일 2시에 수원 출입국관리소에서 열리는 집회가 간다."

- 스스로 '가수'가 아닌 '문화노동자'라 부르는데.
"노래든 그림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허식을 만들어 그것에 급수를 매기고들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그렇게 살지만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안 바뀐다. 그 노래가 좋으면 사람들이 더 많이 듣는 거다. 농사지으면서 공장 다니면서 노래 부를 수 있는 거다."

-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은가?
"얼마 전 3집 음반 작업 때 통장에 1천만 원이 들어왔다. 본주가 떠나기 전에 (실명인) 내 한쪽 눈을 수술시켜준다고 했었다. 부인이 내게 보내온 것이다. 그 뒤로도 1천만 원을 생활비로 보내왔다. 빚지는 건 싫다. 친구가 보낸 거니까 쓴 것이다. 작년에 옥탑방 하나 얻어 살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자들하고 똑같이 사는 걸 추구해서는 이기지도 못하고 싸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결국 누가 권력을 쥐느냐 하는 문제밖에 되지 않는다. 어떨 땐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싫다(웃음). 나도 힘드니까."

- 오늘 여기 선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웃음)어려운 질문이다. 국내 조각에는 흐름이 있다. 구상조각이 주류다. 요즘은 저런 조각을 하지 않는다. 본주는 손 자체에 힘이 있을 뿐더러 작품 자체 속에 노동이 배 있다. 워낙 육체노동이 강하다. 요즘은 쉽게 만들고 머리를 많이 쓰는 작업을 한다. 본주는 21세기에 보기 드물게 육체 조각을 하는 작가였다. 본주 전성기 때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 조각사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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