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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의 의자대왕은 규슈 백제왕으로서 왜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수나라와 외교하고, 내정을 개혁하여 12관위제를 두었다. 성덕태자의 일본군이 의자대왕을 얕보고 구주에 쳐들어오자 이를 물리치고 일본에 들어가서 일본에도 구주와 똑같은 새로운 12관위제를 시행하였다.

일본에 성덕태자의 업적으로 남아 있는 12관위제와 헌법17조는 성덕태자가 아니라 의자대왕의 업적이었다. 600부터 구주백제왕이었던 의자태자는 추고천황이 죽으니 629년부터 641년까지 일본의 서명천황에 즉위하였다가 641년에 백제대왕으로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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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추고천황기'에서 서기 600년, 대마도에서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를 잡아서 유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성덕태자가 신라와 전쟁을 개시하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가마다는 규슈의 경도군에 있단 가마다(神田)로 고려되니 신라가 아니라 규슈와의 전쟁이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어서 허위로 신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 성덕태자가 공략한 곳은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601년 2월 성덕태자의 이복형인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장수가 되어서 25000의 병사를 이끌고, 구주백제에 상륙하여서 축자(筑紫, 후쿠오카)와 지마군(島郡, 후쿠오카 서쪽 경계군 지마군志馬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4개월 뒤인 6월에 장수들이 쫓겨왔고, 래목황자는 다음해 2월에 시체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02년 6월에 구주백제가 왜국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서기>에서는 래목황자의 형인 당마황자(當摩皇子)를 장군으로 다시 오사카(難波)에서 출병하여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효고현(兵庫縣)에 있던 파마국(播磨國) 서쪽에서 당마황자의 부인이 죽었다고 장수들이 돌아온다. 올바로 말하면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 쳐들어왔고, 효고현의 전투에서 또다시 구주백제 의자대왕이 승리한 것이다.

추고천황은 나라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했었는데, 이때 백제군의 침입으로 오하리다궁(小治田宮)으로 옮겨야 했다. 풍포궁이 불탔는지, 혹은 구주백제에서 온 점령자들에게 뺏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날로 성덕태자는 공손하게 의자대왕의 교화(敎化)를 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600년에 구주백제에 만들어진 12품의 관위제도를 일본에서도 강제로 도입하여 602년에 시행하였다. 602년에 성덕태자의 왜국은 구주백제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의자대왕이 만든 12품의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을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로 그 순서를 성의없이 옮겨적었다. 즉 602년 추고천황 때에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12관위제는 본래 600년에 의자대왕이 구주백제에서 만든 것이다.

그리고 603년초에 헌법 17조가 공표되었다. 모두 좋은 말씀이었다. 의자대왕을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광오할 정도로 참으로 유식했던 것이다.

헌법 17조를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의자대왕의 공포일 뿐이다. 의자대왕은 그해 여름에 불상을 만들도록 하면서 성덕태자 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시부터 상궁(上宮)의 왕이었으니, 일본 왜왕인 추고천황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조카인 의자대왕의 아래가 되었다.

성덕태자는 600년 2월, 이가루가(斑鳩)에 궁을 지었다. 반구 법륭사터는 윤공천황의 원비조 궁터였다. 592년 추고천황 즉위 때에는 그가 상궁(上宮) 태자였으니 우에노미야노도요도미미(上宮豊聰耳) 태자였다.

그러나 602년 의자대왕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켜 철저히 패배한 이후에는 상궁태자가 아니라 마굿간 태자가 되니 마야도요도미미(廐戶豊聰耳)가 된다. 마야(廐戶)를 고대에는 마야(馬屋)라고도 기록하였다. 즉, 그의 처지가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식으로 화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당나라의 외교 답서를 백제에게 강탈당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오기인데다가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해서 만들어 놓은 기사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예속되어 외교권이 없으니 받을 국서가 애초에 없다.

형식적으로 강탈당한 왜국 사자는 죄를 논하지만, 강탈한 구주백제왕에게는 항의도 못한다. 또한 수나라 사자 배청은 구주에서 돌아간 것이 <수서>에 명백한데 <일본서기>는 대화에까지 왔던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추고천황은 모후인 황태부인 견람원의 능을 화려하게 새로 만든다. 그리고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를 만들었는데, 뒤에 소아씨(蘇我氏)의 난으로 불타버렸다. 소아씨는 의자대왕의 수족이 되어 전횡하였으므로 주요한 역사 기록이었을 것이다.

622년에 비운의 성덕태자(574~622)가 49세로 죽었다. 성덕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즉위하려고 하였는데, 구주백제왕인 의자대왕이 허락하지 않았고 아예 산배대형의 수족을 죽여서 경고하였다. 628년에는 추고천황도 93세로 죽었다. 그러나 능을 따로 만들 형편이 아니라서 596년에 먼저 죽은 죽전황자(竹田皇子)의 능에 합장하였다.

추고천황이 죽자 629년에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은 대화에서 서명천황(舒明天皇,593~641)으로 즉위하였다. 위덕대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598)의 적장자였고, 모후는 성명대왕의 아들인 민달천황의 딸인 누대희(糠代姬)였는데, 훗날 다카라왕(寶王)으로 추증되었다. 아좌태자의 구주백제 왕궁을 구주의 우좌시(宇佐市)로 밝혔는데, 의자대왕의 구주백제궁도 <수서>에 의하면 중진시(中津市)거나 우좌시(宇佐市)가 된다.

서명천황은 600년, 8살 때부터 해뜨는 쪽의 천자를 자처하고, 수나라 문제와 양제 두 황제를 기분 나쁘게 만든 국서로 유명한 왜왕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알려진 그의 별명이 해동증자(海東曾子)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영민했으면 그와같은 성인의 칭호를 받았을지 상상해볼 일이다.

서명천황은 구주에서 추고천황의 딸인 황극황녀(皇極皇女), 즉 다미왕인 보황녀(寶皇女, 594~663)를 통하여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명천황은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齊明天皇, 601~661)을 통하여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천지천황天智天皇, 614~671)와 진인황자(眞人皇子=천무천황天武天皇, 622~686)와 간인황녀(間人皇女, ~657), 그리고 선광왕(善光王)을 낳았다.

그런데,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은 백제에서 고향왕(高向王)의 아들을 낳았었으니, 이는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이며 아직 아들이 없던 의자대왕의 양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명천황에게 시집와서는 선광왕까지 2남 1녀를 낳은 것이 된다.

의자대왕이 떠날 때에 동궁이 16세라고 하였는데, 이는 429년 의자대왕이 구주에서 대화로 떠날 때에 중대형황자의 나이다. 즉, 중대형황자가 구주백제왕을 계승한 것이다. 서명천황은 또 소아도대신(蘇我島大臣)의 딸 법제랑원(法提郞媛, 588~636)을 통하여 고인대형황자(古人大兄皇子, ?~645)를 낳았다. 서명천황은 다시 본토백제에서 은고(恩古) 황후를 통하여 백제 태자 융(隆)을 낳았다.

서명천황은 630년 대화에 오카모도궁(岡本宮)을 지었다. 631년에 왜국의 인질이 되었다는 의자대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자이며, 구주백제에서 모후인 제명천황과 떨어져 대화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구주백제가 따로 반란하지 못하게 조치한 것이다.

631년 당나라 사자 고표인(高表仁)이 왔는데, 왜국 왕자와 서로 예법을 다투다가 당나라 사자가 그냥 쫓겨갔다. 이 당시도 당나라 사자는 구주(九州)까지 왔을 것이고, 왜국왕의 왕자가 구주 책임자로 있었으니, 바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로 고려된다.

서명천황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일본 대화의 백제천(百濟川)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다. 의자대왕은 640년에 백제궁을 지어 옮겨갔다.

본토백제에서는 639년에 무대왕이 익산(益山) 미륵사지로 천도를 시도하였다.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에서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로 천도하여 새로 사찰을 지었다. 그러나, 639년 겨울 11월에 크게 번개치면서 비가 왔는데, 제석정사(帝釋精舍), 법당(法堂), 부도(浮圖)들이 다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하였다.

지모밀지(地慕蜜地)는 금마저(金馬渚) 지반현(支半縣=唐나라 도독부시대때 금마의 칭호)의 다른 표기니 익산(益山)이다. 무대왕의 능이 제석사 터에 있는 쌍릉이다. 모밀지(慕蜜地)에서 <일본서기>의 모정왕(茅渟王)이 유래한다. 무광왕(武廣王), 무강왕(武康王)과 같고, 시호는 무대왕(武大王)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모정왕도 민달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무대왕이 법대왕의 아들이다. <일본서기>에서 민달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도 그의 형제들인 위덕대왕과 법대왕의 아들들이 섞여 있다. 민달천황도 흠명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도 실제는 그 형인 성명대왕의 아들이었다.

641년 백제 무대왕이 서거하자 백제왕위를 받기 위해서 서명천황이던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로 향했다. 일본 대화조정에는 의자대왕의 황후였던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의자대왕 부부가 각기 본토백제와 일본백제를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일본에 만들어진 의자대왕 서명천황릉은 오시카 단총고분(忍阪段ノ塚古墳)이라고 하는데 하방상원분(下方上圓墳)이다. 아래는 삼단의 방형 제단이고 위는 2단의 원분으로서 직경 42m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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