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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아웃룩'을 열었다. 바쁜 며칠 잊고 있었더니 와락 쏟아진다. 정크메일 폴더를 비우고 받은 편지함을 살피다가 알쏭달쏭한 연하장을 하나 발견했다. 직접 그려 스캔한 듯 보이는 배경 그림과 함께 동봉해온 A4 용지 넉 장 분량의 사연.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오마이뉴스>에서 선생님 글 읽고 긴가민가하다가 블로그 사진보고 알아봤어요. 살 많이 찌셨던데요? 선생님 전화번호 아직도 갖고 있지만, 갑자기 전화 드리기 좀 뭐해서 글로 대신합니다. 제 전화번호는 밑에 적을 게요. 혹시 괜찮으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선생님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선생님이 온라인을 통해 청소년 상담을 해 오셨기 때문이에요. 선생님 목소리 꼭 한 번 듣고 싶어요."

▲ The Gay 100 표지
ⓒ 이동환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 2000년도에 한 달 정도 맡았던 고3 논술반에서 가르쳤던 남학생 제자다. 좀 예쁘장하다 싶은 기억, 그 외에는 없다.

사연인즉슨, 내년 1월에 성전환수술도 받고 겸사겸사 일본에 간다는 것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성정체성으로 고민했으며 현재는 이태원의 모 클럽에서 댄서로 일하고 있단다. 대학에 들어갔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무수한 고통을 당했던 듯싶다.

한 선배로부터 '아우팅'(원하지 않는 커밍아웃)을 강요받고 수십 명의 선후배들 앞에서 상상하기조차 힘든 치욕을 당한 뒤, 결국 중퇴하고 어찌어찌 이태원까지 흘러들어가 가족과도 등지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의 글 가운데 "사는 일, 힘든 거, 다 견딜 수 있는데 이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외로움이 치밀 때마다 아직도 죽음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요"라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는 천형인가?

▲ 저자 Paul Russell
ⓒ (주)사회평론
나는 대학생이 된 뒤, 내가 청소년기에 좋아했던 유명인들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면서 무척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소크라테스, 알렉산더, 앙드레 지드, 차이코프스키, 아르튀르 랭보, 벤자민 브리튼, 오스카 와일드, 버지니아 울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무수한 사람들이 대부분 동성애자였다는 사실. 그 충격은 나로 하여금 도서관을 이 잡듯 뒤지게 만들었다.

지난 5월, 인권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된 <이반검열>이란 영화는 요즘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얼마나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003년에 발표된 한 연구보고서(보고자 장재홍)에 따르면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대해 고민해본 청소년이 11.0%(남성 4.1%, 여성 12.2%)에 이른다. 이처럼 성인뿐 아니라 청소년 사회에서도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들이 늘어나는데, 그들을 둘러싼 사회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특히, 현재 우리사회에서 청소년 동성애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심각한 정도다. 한 논문(발표자 강병철)에 따르면, 조사 대상 청소년 동성애자의 절반 이상(52.9%)이 욕설을 비롯한 언어폭력을 당한 적이 있고, 20% 정도는 신체적인 폭력을 당했다고 한다. 구타도 모자라 무기로 공격하는 폭력을 당한 경우도 10%가 넘었다. 아우팅도 심각해 32명(32.4%)이 강요받았고, 그 가운데 14명이 친구와 교사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받았단다.

곧 사춘기에 접어들 아들을 둔 아비로서 나는,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청소년들, 그리고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 가운데 왜 많은 이들이 동성애자였는가, 고민해본 사람들에게 감히 책 하나를 권한다. 지난 1996년에 번역된 폴 러셀의 < The Gay 100-소크라테스에서 마돈나까지>라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동성애를 이해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왜 그들이 동성애자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동성애자가 되었나

▲ 사진 위 왼쪽부터, 영화배우 록 허드슨, 작가 버지니아 울프, 철학가이자 작가 미셀 푸코. 사진 아래 왼쪽부터, 전설적인 발레리노 누레예프, 테니스 선수 나브라틸로바,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
ⓒ (주)사회평론
이 책은, 소크라테스부터 그룹 '퀸'의 리더였던 프레디 머큐리, 테니스 스타 나브라틸로바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유명인 가운데 100명을 추려 그들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들이 사회의 편견에 대해 어떻게 대항했나 하는 문제, 선천적 성향인가 아니면 후천적 경험에 따른 치우침인가 하는 문제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도록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오늘날과 같은 ‘이성적’이니 '동성적'이니 하는 식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동성애'라는 말은 1869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애'라는 말은 그 뒤 한동안까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라고 밝힌다. 이어 "이 책에 실린 사람들은 동성애자를 겨냥한 폭력적인 적대감에 맞서 온 여러 가지 방식들을 보여준다. 그러한 방식들을 통해서 동성애자들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사람들 가운데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저자는, 어쩔 수없이 미국과 유럽의 동성애 문화에 국한된 연구였음을 실토하면서, 동성애 인권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을 포함했다고 밝힌다. 그러다 보니 유명인으로서 동성애자였던 사람들이 빠질 수밖에 없었음도 토로한다. 어쨌거나 이 책은 기원전 6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삶을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조명한다.

혹시 오해가 있을까 싶어, 마흔다섯 해를 살아오며 내가 가진 가치관, 또는 성과 관련한 정체성에 대해 밝혀두고자 한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며 '가정'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본질이다. 아내와 아직 어린 아들, 그리고 어머니까지, 네 식구가 함께 사는 내 가정은 남은 인생 전부를 이미 걸어놓은 내 삶의 보루이며 힘든 세상살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경원시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또 삶의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하고 폭력적인 언사나 실제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세태를 걱정한다. 동성애 문제가 아니더라도 여러 방면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등식으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아니던가. 조선시대 당쟁의 양상과 오늘의 이분법적 사회 모습은 대체 무엇이 다른지.

동성애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가

옛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벌써 스물세 살이 돼버린 청년, 아니 트랜스젠더로 살고자 결심한 사람.

"전화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목소리는…, 그대로세요."
"정말 수술 받을 거니? 그리고 꼭 일본에 가야 해?"
"네. 이왕 이렇게 살게 된 거 좀 더 자유스러운 일본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그렇기야 하겠지만 일본이기 때문에 더 힘든 일도 많을 텐데…."

사실 그는, 성전환수술까지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단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엄밀하게 말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그러나 아예 여성의 몸을 갖지 않고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맞서 살 자신이 없어 수술을 선택했다고 한다. 수술을 받는다고 여성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 결정했단다. 부모님께 지난달에야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한테 반 죽도록 얻어맞고 영원히(?) 쫓겨났다고 한다.

"아버지를 원망하니?"
"아니요, 이제는. 그나저나 선생님, 저 일본 가기 전에 춤추는 거 한 번 보러 안 오실래요?"
"글쎄다."
"왜요? 제가 게이라서 이제는 싫으…, 세요?"
"네가 게이건 아니건 간에 내 제자였다는 사실이 소중할 뿐, 편견은 없다."
"이미 알아요, 저도. 후훗! 농담이에요. 화나신 거 아니죠?"

글을 쓰기 위해 먼지 쌓인 책시렁에서 이 책을 꺼내들자 뒤적거리며 유심히 몇 편 읽어보던 아내가 뜬금없이 묻는다.

"그 제자 때문에 충격 받았어요?"
"아니!"
"당신, 우리 아들이 이 다음에 당신 제자처럼 그렇다면 어떨 것 같아요?"
"당신은 어떨 것 같은데?"
"“난 아마…, 미쳐버릴 거예요. 둘도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그렇다면…, 도저히 못 살 것 같아요."

나는 아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충분히 이해야 하지만 자기 자식이 그렇다면 절대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과연 어떨까? 나는 동성애를 편견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동성애자들을 무조건 맹비난하며 손가락질 하는 시선을 오히려 경계한다. 그러나 내 아들이 나중에 그렇다면?

솔직히 당해보지 않고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폭압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이 어떤 삶을 선택하더라도 부모의 ‘소유물’이 아닌 동료 인간이라는 생각, 동료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없이 사회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십여 년 전, 온라인 상담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한 친구에게 “왜 동성애자가 됐니?”라는 우매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이 글을 마감하려는 순간, 그 친구 답변이 갑자기 귓전을 맴돈다.

“선생님은 왜 이성애자가 되셨어요?”

덧붙이는 글 | 펴낸 곳 : 1996년 (주)사회평론, 각 권 값 : 7500원


THE GAY 100 1

폴 러셀 지음, 사회평론(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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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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