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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학교 1학년생이던 고 강경대씨는 "학원자주 완전승리와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마친 후 학교 앞으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이던 중 진압에 나섰던 일명 백골단(사복체포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심장막 내출혈로 인해 숨졌다.

▲ 1991년 4월26일 당시 명지대학교 재학생이던 강경대씨가 경찰진압과정에서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숨지자 이를 규탄하며 한 학생이 강경대씨 영정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그가 죽은 다음날 연세대학교에서는 1만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찰의 살인진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수많은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학교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 1991년 4월26일 당시 명지대학교 재학생이던 강경대씨가 경찰진압과정에서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고 숨지자 이를 규탄하며 연세대학교 정문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
ⓒ 강경대열사 추모사업회
"강경대를 살려내라" "살인정권 타도하자"를 외치는 그들에게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거리진출을 저지했다. 스크럼을 짠 시민학생들은 경찰이 쏘는 최루탄과 물대포를 고스란히 맞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어깨동무를 한 채 한발짝 한발짝 전진하며 경찰저지선을 뚫고자 했다.

하지만, 그날 경찰은 시위진압방법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고 강경대씨가 숨지기 이전까지 경찰은 최루탄을 쏘고 백골단(사복체포조)을 투입하면서 강경진압을 펼쳤지만 어린 대학생이 경찰의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비난여론을 의식한 나머지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기만 할 뿐 적극적인 진압작전을 펼치지 않았다.

15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린 2005년 12월 1일 서울 광화문사거리.

'쌀협상 국회비준 무효 농민대회 살인진압 규탄 전국농민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하던 농민과 학생들은 광화문사거리에서 경찰과 대립했다. 일부 흥분한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출하려고 하면서 막아선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렸다.

하지만 이날 경찰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어떤 시위에서든 시위대와 몸싸움을 벌이면 무차별 휘두르던 진압봉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고 일체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채 오로지 방패로 시위대를 막기만 할 뿐이었다.

▲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온몸이 흠뻑 젖은 여성농민들이 경찰저지선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최윤석
경찰의 선임병과 현장 지휘관들은 계속 돌아다니면서 양측의 충돌을 막고자 노력했다. 시위대쪽에서도 폭력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 광화문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가 경찰의 저지로 더이상 행진을 할수없게 되자 대형 펼침막을 보이고 있다.
ⓒ 최윤석
하지만 몸싸움이 계속되면서 일부 경찰병력이 시위대에게 끌려 나가 방어선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경찰은 경고방송과 함께 살수차를 동원해 물대포를 쏘며 이들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 대형 펼침막을 펼쳐든 시위대가 경찰이 쏘아되는 물대포를 맞으며 청와대로 진출하려 하고 있다.
ⓒ 최윤석
이에 맞서 일부 시위대는 돌과 사진기자들의 사다리, 경찰에게서 빼앗은 방패, 병을 던졌다. 반면 다른 이들은 "노무현 정권 퇴진"이라는 현수막을 앞세운 채 스크럼을 짜고 그 자리에 앉아 버렸다.

▲ 스크럼을 짠 시위대가 거리에 앉아 경찰이 쏘는 물대포를 맞고 있다.
ⓒ 최윤석
그리고 경찰이 쏘는 차가운 물대포를 고스란히 맞으며 거리에 앉아 물러서지 않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스크럼을 짜고 물대포를 맞으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는 순간 15년 전 연세대학교 앞 모습이 떠올랐다.

희생자가 학생에서 농민으로, 장소가 신촌 연세대학교에서 광화문 사거리로 바뀐 것 빼고는 15년 전 그대로였다.

이 광경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꼭 이렇게 희생자가 나와야만 시위대는 비폭력을 외치고, 경찰은 과잉진압을 자제할 수 있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시절 비민주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며 거리로 나섰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신성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던 같은 또래의 젊은이인 진압경찰들을 거리에서 적 아닌 적으로 마주쳐야만 했다.

지난 11월 15일 여의도 농민대회 중 경찰과 농민들이 충돌하기 전 잠시 들른 화장실에서 당시 시위진압경찰이 선임병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을 잠시 엿들었다.

"오늘 우리 마을 아저씨들이 참석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 11월 15일 여의도 농민대회에서 격렬히 충돌한 경찰과 시위대. 이날 시위에서 경찰과 농민의 충돌로 양측에서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 최윤석
아버지는 아들에게, 삼촌은 조카에게, 또 아들은 아버지에게, 조카는 삼촌에게 그리고 친구가 친구에게 쇠파이프와 방패를 휘두르며 적 아닌 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이 기막힌 일은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여의도 시위에서 농민과 경찰의 격렬한 충돌로 양측에서 수 백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고 결국 참석했던 전용철씨가 사망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만약 12월 1일 광화문 시위처럼 시위대와 경찰이 서로 조금씩만 양보한다면 시위대와 경찰 간 불신이 없어진다면 폭력 충돌은 없을 것이고 그로 인한 희생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현재처럼 불신으로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는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1년 2년 그리고 10년 후에도 무고한 희생은 계속될 것이다.

늦은 시간까지 광화문 사거리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는 농민과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경계를 서고 있는 시위진압경찰들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정말 무겁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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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좋아 사진이 좋아... 오늘도 내일도 언제든지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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