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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오후 4시15분께 '음악캠프' 무대에서 펑크그룹 'RUX'가 '지금부터 끝까지'를 부르던 도중 함께 무대에 오른 멤버 오모(20)씨 등 2명이 갑자기 바지를 벗어 내리고 춤춘 뒤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받고 있다.
ⓒ 연합뉴스 백승렬

한국 대중문화와 그 상품들의 졸렬함, 혹은 저속함은 많은 아티스트들과 그들의 보석같은 작품들의 적절한 평가를 가로막아 왔다. 졸렬하고 저속하다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세간의 선입견은 그것이 단지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다수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만한 논리적 반박들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면 어째서 잘못된 선입견에 대한 주목할만한 논리적 반박들을 찾기 힘든 것인가? 그것은 그러한 선입견이 논리적으로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대중문화 상품의 대다수는 쓰레기였고,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쓰레기가 양산되고 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쓰레기들 속에는 분명 재활용이 가능한 제법 쓸만한 놈들이 더러 있고, 개중에는 눈부신 보석들도 있다.

그들은 같은 물에 있지만, 추구하는 바도, 하고 다니는 짓도, 이루는 성취도 다르다. 어쩌면 보석들을 탄생시키기 위한 거름으로 그 많은 쓰레기들이 있는 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쓰레기들이 자신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모르고(혹은 알면서 속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석이라고 강변하는 데 있다.

'MBC 생방송 중의 성기노출 사건'을 그저 텍스트로만 처음 접했을 때, '벗기기' 액션의 사회적 의미를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았던 한 연구자의 입장에서 약간은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분명 '벗고', '벗기는' 액션은 그것 자체가 충분히 하나의 사회적 발언이며, 그 전복적 효과 덕분에 상당히 강력하게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지상파 방송이라는 극도로 권위적이며 가식이 난무하는 규범적 공간 안에서 '벗는' 액션을 그것도 생방송이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감행했다고 가정한다면, 법적 제재와 논란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해도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쾌감과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며, 이는 두고두고 하나의 예술적 모험으로 평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조금 심하게 말하면 대중문화라는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이 생산해 낸 쓰레기 중 하나가 겉멋 들어 객기를 부리느라 악취를 풍긴 사건에 불과하다. 이런 판단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상파 생방송 중에 옷을 벗고 성기를 마구 흔들어 댔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자유롭게 놀았을 뿐이라고

그들은 처음엔 '그저 클럽에서 놀듯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자유롭게 놀았을 뿐'이라고 말했고, 심지어 생방송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변명했다. 따라서 그들이 옷을 벗고 물건을 덜렁댄 것은 아무 생각없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였고, '생방송이란 사실을 알았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보도된 기사들을 참조해 보면 자신들이 철없는 짓을 했다고 인정하며 사과까지 하는 인터뷰도 있는 바, 앞의 추론이 옳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들은 철학적인 사고와 예술적인 깨달음을 토대로, 거대 상업주의와 권위적 대중매체에 대한 도발을 '벗는' 액션을 통해 감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유롭게, 아무 생각없이, 자기들끼리만 즐겁게 논 것이다. 수많은 방청객과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성추행을 하면서!

▲ 30일 오후 MBC <음악캠프> 생방송중 펑크 록밴드 럭스의 백댄서 2명이 바지를 내린 채 춤을 추고 있다.
ⓒ MBC 화면 캡처

그들은 "방송에 나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나올 생각이 없다"면서 자신들의 활동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말 아무 생각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방송 평론을 하면서 음악 프로그램이나 쇼, 오락 프로그램의 개선 방향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얼마나 인디 밴드들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거대 상업주의의 기성품이나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인형들 대신, 살아있는 음악들이 방송에 나와야 한다고 얼마나 떠들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런 일종의 투쟁이 나 혼자의 활동만 해도 6년이다. 내가 6년간 입이 닳도록 떠들고 다녔으니, 나보다 더 뛰어난 학자들과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은 더 오랫동안, 더 논리적으로, 더 설득력있게 말하고 다녔으리라. 그래서 얻어낸 한 코너가 바로 인디밴드 소개 코너인 것이다. 그들은 그 소중한 코너에 나와 지들끼리 아무생각 없이 그저 놀았다. 그리고 그 코너는 이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프로그램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돈과 노력을 쏟는지, 그 돈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 노력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방송 평론을 하면서 나는 절절히 느꼈다. 일주일 겨우 한시간 그것도 녹화로 방송하는 옴부즈맨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작가들은 밤 새워 공부하고 글 쓰고 섭외하고, 피디들은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두 눈이 빠지도록 편집하고, 촬영감독, 조명감독, 음향감독들은 기계들을 매시간 점검하고 또 점검하며 스튜디오의 ON-Air 불이 들어오기만 하면 초긴장 상태의 스트레스 속에서 NG를 내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한다. 그렇게 프로그램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가 그 많은 돈과 고생을 들여서 그들의 역겨운 성기를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렇게 지들끼리 놀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의 피땀이, 그 많은 자산들이 낭비되어야 하겠는가? 누가 자신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그런 식으로 자기들끼리 놀았다면, 그들은 가만히 있었겠는가?

한국사회... 교양의 부재, 철학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교양의 부재, 철학의 부재다. 작년 전문연 아트마켓에 와서 공연작품을 사겠다던 한 지방의 문예회관 관련자는 자기는 실험극장도 모르고 신의 아그네스란 작품도 난생 처음 들었다고 말했단다. 이현세가 외설혐의로 재판에 넘겨질 무렵,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법조인들 중에서 이현세를 아는 사람이 10%, 그가 만화가라는 것까지 아는 사람은 2%에 불과했단다. 세계적 오페라하우스 만들겠다는 시장이 공연 시작 40분만에 수행원들을 동반해 우루루 자리를 뜨는 나라가 이 나라가 아닌가? 세칭 노블레스들이 이 정도니, 머리 염색하고 쌈마이 노래나 부르는 애들이 생각이 있을 리 만무하다.

<슬픔의 노래>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에서, 작가는 배우의 입을 통해 예술인들을 이렇게 규정한다. 강 건너의 빛을 보는 사람이라고. 그 빛은 신성을 의미한다. 인간이면서 신에 근접한 존재란 말이다. 배우란 말은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인간을 뛰어 넘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죽음 저편을 보고 온 바리공주 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대중문화예술가도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존 레넌은 아직도 그 칼칼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사적소유 없는 세상'을 꿈꿔보라고 노래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그의 깨달음은 노래로 그의 수많은 전설적인 전복적 액션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에게 힘을 준다.

그럼 '럭스'나 '카우치'는? 쓰레기일 뿐이다. 아직은.

덧붙이는 글 | 김성수 기자는 오락프로그램과 드라마를 중심으로 6년 이상 방송평론을 해왔습니다. 얼마 전까지 KBS 'TV비평 시청자 데스크'에서 '클로즈업 TV' 코너를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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