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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문에서 바라본 영릉 풍경
훈민문에서 바라본 영릉 풍경 ⓒ 양허용
홍살문을 들어서면 바로 참도(參道)가 나타난다. 얇은 돌을 반듯하게 깔아 놓은 참도는 왼편이 오른편보다 약간 높게 만들어져 있는데 높은 쪽은 신로(神路)이고 오른편의 낮은 길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인로(人路)다.

참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르렀다. 한자의 정(丁)자 형태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건물로 무덤의 주인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다. 전통 제례 의식에 따라 오른편으로 올라 왼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이 예의라고 한다. 정자각에는 몇 개의 부속 건물이 따르는데 오른편으로는 제기(祭器)를 보관하고 관리가 머물 수 있도록 만든 수복방이 있고 왼편으로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이 있다. 이 수라간은 다른 왕릉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영릉에만 있다고 한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사초지(莎草地)를 오를 수 있도록 나무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보통 다른 왕릉에서 사초지를 오를 수 없도록 막아 놓은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열 살짜리 첫째는 그 계단을 힘들게 오르는데 다섯 살짜리 둘째는 힘들지도 않은지 성큼성큼 거침없이 올라선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니 드디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묻혀 있는 능의 모습이 보인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관 사이를 회로 메우고 봉분을 쌓아 만든 합장릉이다. 능 앞에는 상석이 두 개 놓여 있는데 사실 왕릉에서 상석은 제물을 올려놓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능 아래쪽의 정자각에 제물을 차려 놓으면 죽은 혼령이 상석 위에 나와 앉아 제사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명칭도 혼유석(魂遊石)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능의 모습. 앞에 두 개의 혼유석이 보인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능의 모습. 앞에 두 개의 혼유석이 보인다. ⓒ 양허용
능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간단하게 난간석만 둘렀다. 그 돌난간을 둘러 12간지를 새겨 넣었고 전형적인 왕릉의 형식에 따라 능 주위에는 호랑이, 양, 말 등 동물과 문인석, 무인석 등을 배치하였다.

원래 세종대왕의 능은 지금의 서울시 내곡동에 있는 헌릉에 있었으나 풍수지리가 좋지 못하다는 주위 의견에 따라 예종 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능으로 인해 조선왕조의 수명이 100년 더 길어졌다고 하지만 그 말의 진위를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조선왕조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 것은 누군가 묘 자리를 잘못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쓸 데 없는 생각이 들었다.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지식도 없지만 과연 능 앞에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니 시원하게 열린 경치가 일품이다. 그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스럽게 뚫리는 것 같으니 명당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능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과연 명당 답게 아름답다.
능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과연 명당 답게 아름답다. ⓒ 양허용
능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니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개방해 둔 산책로가 보인다. 다가오는 장마 탓인지 날씨가 후덥지근하고 눅눅하였지만 산책로로 들어서니 상쾌한 숲 냄새가 코를 간질이며 단박에 더위를 씻어주는 듯하다.

다음 일정이 아니라면, 그리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막히는 고속도로만 아니라면 좀 더 여유 있게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서둘러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종의 영릉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는데,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발걸음을 옮겨 영릉의 원찰이었던 신륵사로 향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졌다.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9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자리에는 구룡루(九龍樓)라는 누각이 서 있다.

‘신륵사’라는 절 이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고 한다. 결국 신력(神力)으로 제압했다 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 하다는 뜻의 륵(勒)을 합쳐 신륵사라 하였다.

우리나라 유명 관광지면 어디나 그렇듯 음식점으로 가득 메워진 진입로를 지나니 저 멀리 썰렁한 콘크리트 냄새를 풍기는 일주문이 나타난다. 고풍스럽고 기품 있는 일주문을 기대했건만 현대식으로 변해버린 일주문에 실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대부분의 절이 산 속에 있는 것과는 달리 신륵사는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다. 일주문에서 본당에 이르기 위해서는 짧지만 남한강변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조포 나루터’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마포, 광나루, 이포와 함께 예전에는 한강의 4대 나루터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나면 바로 마포 나루에 닿는단다. 마침 황포돛배를 운행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은 황포돛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모두 기계로 움직인다고 하는데 여기의 돛배 역시 엔진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신륵사에 발걸음을 하면서 내심으로는 명성황후 생가에서 느꼈던 비애감을 지우고 마음의 안정을 얻어가고 싶었지만 신륵사는 정돈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공사 중인 관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강과 들이 내려다보이는 열린 장소에 지어진 때문인가, 시원스러운 맛은 있지만 산 속에 지어진 절처럼 마음을 잡아끄는 포근함은 느껴지질 않는다. 어쩌면 후덥지근한 날씨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신륵사의 극락보전
신륵사의 극락보전 ⓒ 양허용
극락보전 앞에 서서 가볍게 합장을 하고 아미타불께 인사를 올렸다. 불교 신도도 아니면서 절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왜일까. 아내와 아이가 가운데 문을 통해 법당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는데 누군가 옆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그렇게 절에 다녔으면서도 여태 법당 출입하는 법조차 깨닫지 못했으니 그 동안 건성으로 둘러본 것만 같아 부끄러워진다.

극락보전 앞뜰과 그 아래쪽으로는 각각 수령이 500년, 600년 된 향나무와 은행나무가 신륵사의 역사를 말해주듯 아직도 시들지 않은 푸른 빛을 간직한 채 서 있다. 저 나무에게 말을 걸어볼 수 있다면 그 동안의 역사를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신륵사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은 강월헌이다. 고려 말의 대승인 나옹선사가 열반에 든 곳으로 그 분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굽이치며 흐르는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정자로 안으로 들어서니 남한강의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다보이고 후덥지근한 더위도 그 위력을 멈추는 듯하다. 저 아래로 황포돛대를 단 배 한 척이 느리게 지나간다. 이런 곳에서 낮잠이라도 즐길 수 있다면 그야 말로 신선놀음 아니겠는가.

남한강의 절경을 끼고 앉은 강월헌. 황포돛배가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남한강의 절경을 끼고 앉은 강월헌. 황포돛배가 지나는 모습이 보인다. ⓒ 양허용


나옹선사의 호를 따서 지었다는 강월헌. 나옹선사는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다.
나옹선사의 호를 따서 지었다는 강월헌. 나옹선사는 이곳에서 열반에 드셨다. ⓒ 양허용

강월헌과 이어진 바위 위에는 아담한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닳고 깨지고 낡아 있다. 그 탑 뒤로 도도하게 흐르는 남한강의 물줄기가 보인다. 그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옹선사가 지었다는 가사 한 구절이 떠오른다.

靑山見我 無言以生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見我 無塵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解脫嗔怒 解脫貪慾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如山如水 生涯以去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탐욕도 성냄도 없이 그렇게 살다 갈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만은 미천한 탓인지 작은 일에도 붉으락푸르락 하니 진정 마음의 평화를 얻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일까?

강월헌 바로 위로 올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는 진흙을 구워 벽돌을 만들고 그것을 일일이 쌓아 만들었다는 다층전탑이 보인다. 하지만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중인 듯 철 구조물로 둘러 쌓여있다.

세월의 흔적을 껴안은 채 굽이치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삼층석탑
세월의 흔적을 껴안은 채 굽이치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삼층석탑 ⓒ 양허용

신륵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 강월헌에 앉아 잠시 더위를 식히는 사이 하늘의 움직임이 영 심상치 않다.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아무래도 오늘 여행은 이것으로 마쳐야 할 것 같다. 아직 둘러볼 곳은 많은데 시간도, 날씨도 우리 가족 편은 아닌 듯 보였다.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오늘 미처 못 본 곳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여주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는 뉴스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온다.

덧붙이는 글 | 여주군청과 신륵사 홈페이지, 그리고 인터넷에서 일부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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