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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여름 방학(1976년).

모든 신문은 일본에서 활약 중인 조치훈의 열풍을 보도하기에 법석이었다. 지금도 뇌리에 선명한 사진 한 장. '십단전'에서든가. 아무튼, 사까다 에이오 구단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도전기를 펼치고 있던 조치훈.

그 즈음, 우리 집 아랫방에는 경마에 미친 형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말이 형이지 삼십도 훨씬 넘긴 노총각이었다. 장가 간 동생 집에 홀어머니와 함께 얹혀사는 모양새가 어린 나이에도 마뜩찮아 경원시했는데, 보면 볼수록 사람이 '먹던 떡'이었다. 주인집 아들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경마에서 몇 푼 딴 날이면 꼭 '생과자'를 사다가 내 공부방에 들여놓고는 했다.

어느 날인가, 그 형 방을 들여다보니 바둑판을 앞에 놓고 있었다. 신문에서 오린 기보를 연구(?) 중이었고, 그 기보는 조치훈의 열전보였다. 나는 바둑을 그 형에게서 배웠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스물 다섯 점을 놓고 시작했는데 열흘도 안 되어 백을 빼앗아 버렸다.

형은 무척 놀라는 눈치였고, 자신이 자주 들락거린다는 전농동 로터리 기원에 나를 끌고 갔다. 내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던 나는 기원이라는 데 처음 가서야 두루, 서로의 바둑 실력을 겨루게 되었다. 그 형과 나는 12급 정도, 원장님은 소위 동네 방내기 3급(현재로는 아마 3단 이상)이었다. 원장님한테 아홉 점으로 시작한 바둑은 정확하게 80여 일도 안 되어 백을 빼앗기에 이르렀다.

나는 미쳐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바둑판이 펼쳐졌다. 그날 패배한 바둑이 그려졌다. 왜 그렇게 두었을까를 한탄하며 밤을 샜다. 한두 집으로 역전패한 바둑이 있을 때는 혼자 울며 불며, 머리를 벽에 찧기까지 했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학생 조회가 있는 날, 주번이라서 교실에 있을 때, 운동장을 내려다보면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쓴 친구들 모습이 영락없는 바둑돌로 보였다. 머릿속에 온통 바둑 생각뿐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꼭 기원에 들렀다.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 말씀 없으시던 아버지로부터 제동이 걸려왔다.

“봅세! 공부에 지장 있는 거 같으니끼니 날래 때르치라. 아바이는 두 말 안 한다이, 알겠음?”

이미 바둑에 미쳐 있던 내가 아버지 말씀을 들을 리 없었다. 어느 날 저녁, 기원으로 아버지가 들이닥치셨다. 말씀은 한 마디도 없으셨다. 다짜고짜 내 귀를 잡아당긴 아버지는 고통을 호소하는 외아들의 단말마는 들은 척도 안 하셨다. 집 마당에는 내가 용돈을 모아 들여놓은 바둑판이 있었다.

"아바인 이제 넌더리 났음메. 한 마디루 하겠다이. 이 아바이 탕갯줄 끊어놓구서리 바둑 하겠음? 아니므느 공부르 열심으루다 해서리 이 아바이 한 풀어 주겠음?"
"바둑……, 공부 할래요."

"뻐거적! 우직! 뻐거적!"

말이 필요 없었다. 그 엄청난 굉음은 아버지가 도끼를 들어 바둑판을 패는 소리였다. 나는 아버지 손에 언제 도끼가 들려졌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바둑 공부할 거예요!"

나는 발악을 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놈의 토악질에, 아버지는 도끼를 마당에 팽개치고는 나가버리셨다. 그날 아버지는 새벽이 다 돼서야 술에 잔뜩 취하셔서는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하는 옛날 유행가를 부르면서 너나들이 하시던 동네 파출소 순경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오셨다.

아버지를 모셔 들인 뒤 내 방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부엌에 기대서서 우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숨 죽여 우는 어머니, 그 눈물! 내 두 발은 그 자리에 붙박이고 말았다. 그날 밤, 나는 한잠도 못 이루고 고민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그 바둑, 그 실력이다.

세월은 추억의 향기와 함께 흐른다. 나 역시 아버지가 되었고, 아직 어린 아들놈과 가끔 다툰다. 나이 들어서야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사내들의 운명인가, 아니면 나 개인의 미욱함인가? 그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도끼로 한방에 바둑판을 쪼개버리던 아버지의 팔뚝 근육을 다시 뵙고 싶다.

<계속>

덧붙이는 글 | -<나의 추억 나의 바둑 기사>는 모두 5편으로 이어집니다.

-추억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픈 추억일지라도 그 한 자락은 향기롭기 마련입니다. <오마이뉴스> 섹션의 '사는 이야기'라는 작은 마당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인생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아직도 젊습니다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을 더 치열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저런 기억의 편린들을 추슬러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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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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