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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9일부터 1월 23일까지 녹색문화기금 프로그램으로 쿠바를 다녀온 그린네트워크 장원 대표가 쿠바방문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에는 쿠바의 환경, 유기농 실태, 사회복지 등을 비롯해 쿠바 거주 한인들의 생활상 등도 소개됩니다. 장 대표의 연재는 모두 7회 정도이며, 그 첫 회로 애키깽 후예들의 현주소를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애니깽의 후예들 쿠바에는 700명 정도의 애니깽 후예들이 살고 있다. 우리 일행이 방문한다고 하자 30여명이 나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 장원
애니깽. Henequen의 멕시코식 발음. 멕시코 원산의 다년생 초본으로 잎 가장자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열대식물. 우리말 이름은 잎 모양이 용의 혀 같다 해서 용설란. 온대지방에서는 관상용으로 키우지만 꽃이 잘 피지 않아 세기식물이라 불리기도 하며 꽃을 피우고 나면 곧 죽는다.

애니깽에서 추출되는 섬유는 굵고 질긴 선박용 밧줄의 재료가 된다. 멕시코로 이민 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바로 이 애니깽을 베는 노동을 했는데 무더위와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무척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멕시코 현지인들보다 더 밑둥부터 잘라내어 농장주에게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남미로 이민한 사람들의 애환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애니깽'이다.

삶을 일구기 위해 이역만리로 향한 조선인 1천명

1905년 1000여 한인들이 처음 멕시코로 이민을 간다. 그리고 1921년 그 중 일부는 쿠바로 재이민을 가게 된다. 정말 먼 나라 쿠바. 이번에 우리 일행도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무려 스물 여섯 시간 비행 끝에 도착했다. 산다는 게 뭔지, 제 나라와 그리고 모든 정든 것을 뒤로하고 지금도 가기 힘든 그 곳, 쿠바까지 가서 삶을 일구어야 했으니….

이제 쿠바에 남아 있는 한인 약 700명은 사실상 더는 한인이 아니다. 쿠바인이다. 이미 5세까지 나왔으니 혈통으로 보면 1/8만 한국인인 셈이다. 곧 6세가 나오면 1/16 한국인 물론 한국 혈통이 아닌 사람하고만 결혼했을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우리 일행은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서 약 두 시간 가까이 달려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마탄사스로 향했다. 몇 사람이나 모여 있을까? 서너 명? 많아야 열 명? 막상 약속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른 사람 가까이나 모여 있었다.

'오리지날' 한국 사람들을 만나서 너무 좋다고 다 반겨주었는데 생김새들은 너무 달랐다. 한국인의 얼굴 모습을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저히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 남미 이민 한인 '애니깽'의 5세 아이들. 이들은 이미 현지주민과 많이 닮아 한인의 면모를 상당히 잃어버렸다.
ⓒ 장원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준비해 간 케이크도 나누고, 약간의 성금도 전달하면서 여러 얘기들을 편안하게 했다. 물론 통역을 통해서다.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 물론 한 두 마디 정도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노래 '만남'과 '아리랑'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같이 한 번 불러 보았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노래란 묘한 것이어서 노래를 함께 부르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우연이 아니고 바람의 결과로 만난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때부터 무슨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 저 분들은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분들이야!

국가 예산으로 뭘 해줄 수 있는 정부 관계자도 아니면서 우리는 "뭐가 제일 필요하십니까?" 하고 묻고 말았다. 봇물 터지듯 그이들의 요구는 다양했다.

"스페인어-한국어 사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 요리도 배우고 싶다."
"한국 노래도 배우고 싶다."
"한국을 소개한 카세트나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싶다."
"사물놀이 기구와 우리 전통악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에 있다는 친지들을 만나고 싶다."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한국에 보내고 싶다."
"한글 학교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 달라."
"죽기 전에 한국국적 가질 수 있으면 편안하게 죽을 수 있겠다."


우리가 만난 날이 마침 1월 22일 한국의 구정이었다. 모두 아침에 떡국을 먹었다고 한다. 아직 김치도 먹고, 비빔밥도 먹고 쌈도 싸서 먹는다고 한다. 이 지구화 시대에 그야말로 이역 만리에서 이런 뿌리 찾기를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100년이나 지났고 피도 이제 1/8 밖에 안 섞였는데….

▲ 한인 거주지의 밤거리 풍경. 쿠바 거주 한인들은 이곳에서 중류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
ⓒ 장원
2005년 내년은 남미대륙 한인 이민 100년째 되는 해다. 쿠바의 한인들도 내년 3월 1일에 대대적인 행사를 가진단다. 재정적으로 좀 도움이 되어주면 좋겠다는데, 뭐 우리가 힘이 있어야지. 우리나라와 쿠바가 미수교국이고 또 미국의 눈치 보느라 좀 어렵기는 하겠지만 우리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다.

내년 3월 1일엔 한국문화원 개원하기로

사탕수수를 베며 노예처럼 살면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쌀 한 숟가락씩 모아 독립운동 기금으로 거금을 내놓았던 그들. 마땅히 우리 정부가 보답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쿠바의 한인 후예들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그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쿠바의 애니깽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못사는 하류 계층은 아니다. 그 날 만난 사람들도 의사, 건축가, 발레리나, 엔지니어, 교사, 농부 등으로 쿠바 사회에서 중간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물론 쿠바가 전체적으로 어렵기는 하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봉쇄로 일부 달러를 접할 수 있는 계층을 제외하고는 다들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 민간인들은 대체 뭘 할까. 그래, 민간 차원의 한국문화원을 쿠바에 한 번 만들어 보자. 한국의 대기업들도 다 진출해 있던데, 그 도움도 좀 받을 수 있으면 좋고,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모금도 하고. 내친 김에 아바나시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그럴 뜻이 있으면 건물도 무상으로 내어 주겠단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우리는 그 곳에서 그렇게 뜻을 모았다. 내년 3월 1일에 한국문화원을 개원하는 것으로.

애니깽,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는 세기의 식물. 드디어 내년에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그런데 변종으로 잎 가장자리에 황색 줄무늬가 있는 무늬 용설란이 있다는데 이 쿠바의 애니깽, 무늬만 용설란이 되면 어떻게 하나.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가 다 같이 노력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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