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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신년 벽두부터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기자들에게 한 성적 농담이 정치권의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포함해 거의 모든 언론들이 강 대표의 발언에 초점을 맞춰서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시쳇말로 강 대표만 '죽일 놈'이 됐습니다.

그러나 강 대표의 맞은편에 앉아 상황을 지켜본 기자는 이런 의심을 해봅니다.

언론보도만 믿고 강 대표를 비난하는 태도가 과연 합당할까? 누군가 이번 사건의 '숨은 그림'을 찾아 보여준다면 독자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오마이뉴스> 기자는 1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언론과 한나라당, 뒹굴면서 함께 선거 치르자"

기자는 어제(4일) 국회에서 일찌감치 서울 여의도의 B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물론, 빨리 가서 강 대표와 가까운 자리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습니다. 강 대표의 발언이 지금처럼 논란거리가 된 걸 생각하면 아주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출입기자들과 주요당직자들, 대변인단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고, 대략 70~80명이 음식점에 모였습니다. 강 대표는 잠시 후 좌중의 박수 속에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강 대표의 인사말은 많은 얘기를 담았지만, 제 귀에는 특히 다음 대목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금년은 어쨌든 우리 언론과 한나라당이 뒹굴면서 같이 선거를 치러야 되기 때문에 분위기를 미리 조성했습니다. 우리가 뒹구는 연습도 해야하기 때문에 오늘 자리를 모셨습니다…(중략)…언론인 여러분들은 (당의) 피를 돌게 하는 혈관이시니까 저희들이 잘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5∼6개월 동안 저도 밖에 돌아다니느라 어설펐고, 대변인실도 정비가 안돼서 여러분들에게 결례를 했거나 가려운 곳을 제대로 못 긁어준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잘 해보렵니다."

정치인들과 '뒹굴어본' 기억이 거의 없는 기자에겐 다소 민망한 표현이었지만, "한나라당은 원래 기자들을 '한 식구'처럼 잘 해주니까…"라고 받아넘겼습니다. 기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냉장고와 온실만큼의 '온도 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어쨌든 강 대표는 '오버'를 했지만 황우여 사무총장은 한술 더 떴습니다. 황 총장의 건배사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지난 6개월 열심히 달려왔는데 저희들의 앞뒤에서 함께 이끌어준 분들이 언론인들입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새해에도 건승하시고…. 제가 지난해 <문화일보> '강안남자'를 위해 투쟁한 것도 꼭 기억해주세요. 자, 건배!"

황 총장은 <문화> 기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황 총장이 '강안남자'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도 강 대표가 야릇한 농담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참석자들이 건배를 외친 뒤에는 각 테이블 별로 대화가 이뤄졌습니다. 강 대표 발언에 대해서 "여기자가 있는데"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그날 강 대표 주변에는 여성 당직자나 여기자는 전혀 없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소줏잔을 가볍게 들이킨 강 대표가 기자들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요새 조철봉('강안남자' 주인공)이는 왜 그렇게 안 해? 옛날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더니 요새는 한번도 안 하대."

"요새 한번도 안 했죠?"-"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 <문화일보> 연재 소설 '강안남자'.
ⓒ <문화일보> PDF
사실, 저는 순간 '조철봉이 누구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섹스'나 '성관계'라는 표현은 안 썼지만, 강 대표가 조철봉이라는 사람의 성생활을 무척 걱정하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한나라당의 모 여성의원은 나중에 "<오마이뉴스> 기자도 현장에 있었으면서 왜 강 대표를 말리지 않았냐"고 다그쳤습니다. 그 분에게 변명을 하자면, '강안남자'를 한번이라도 읽어봤어야 대표를 말리든가 말든가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나 강 대표의 말을 알아들은 일부 기자들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습니다. 모 기자가 <문화> 기자의 이름을 부르며 "문화일보, 어떻게 된 거야?"라고 강 대표를 거들었습니다. 그러자 강 대표도 "조철봉이 왜 요새 안 해?"라고 말을 이었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문화> 기자는 "청와대에서 하도 그러니까…"라고 멋적게 변명했습니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지금부터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강 대표 주위에 있던 기자들마다 기억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었지만, 적잖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했으니 당시 상황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기자 A "가끔 가다 한 번은 해야지."
강재섭 대표 "(맞장구치며) 가끔 가다 한 번은 해야지! 옛날에는 하루에 세 번 네 번씩 하더니…."

기자 B "조철봉이가 땀이 아니라 눈물을 흘린다는 거 아닙니까?"
강재섭 "조철봉이 기가 너무 죽었어."

기자 B "요새 한 번도 안 했죠?"
강재섭 "(목소리를 높이며) 한 번도 안 했어! 내가 오늘은 한 번 하나 싶어서 봤더니 안 하고 안 하고…. 철봉이가 아니면 무어냐 말이야? (잠시 생각하더니) 낙지야, 낙지!"

기자 C "(애써 웃으며) 대표님, 여기까지만... 낙지에서 끝내죠."
강재섭 "요새 말이 많아서 못 한다. (기억 불명확)"
기자 D "요새는 점심 먹으면서 하는 말도 문제가 된다는 거 아닙니까?"

자, 독자 여러분은 그 동안의 언론보도와 '현장의 재구성' 사이에서 어떤 차이를 느끼셨습니까?

강재섭 사태의 공범은 어디로 갔나

결론적으로, 강 대표가 성적 농담을 할 때 현장에는 그것을 부추기고 함께 즐긴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문화>에 잘 보이려는 황 총장의 '오버'가 없고, 기자들도 강 대표를 부추기지 않았다면 강 대표가 이렇게 지탄을 받는 상황을 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서영교 열린우리당 부대변인은 언론보도만으로 "기자가 '너무 심하다'고 제지하자 강 대표가 '한 번은 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해줘야지 너무 안 해'라고 말했다"고 강 대표를 단정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일부 기자들이 "가끔 가다 한번은 해야지" "요새 한 번도 안 했어요"라고 선동했기 때문에 강 대표가 더욱 신이 나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강 대표의 입장에서는 황 총장의 얘기를 이어받아서 기자들과 편하게 '농담 따먹기'를 한 것뿐인데, 함께 즐긴 기자들은 카메라와 활자 뒤로 숨어버리고 혼자서 비난을 뒤집어 쓰니 억울할 만도 합니다.

저도 이런 정황을 공개할 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한 동료기자가 "나쁜 짓은 함께 저질러놓고 강 대표만 바보로 만들 수 있냐"며 분통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날 현장에 강 대표와 '뒹굴며' 분위기를 야릇하게 몰고 간 기자들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강 대표의 입에서 '낙지'라는 말까지 나오자 '이제 그만'을 외쳐 사태를 수습하려던 기자가 있었고, 강 대표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은 뒤 이번 사건을 세상에 알린 기자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언론은 '정의와 진실의 수호자'라는 체면을 간신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람 살리고 죽이는 것, 일도 아니네요

@BRI@강 대표는 이날 인사말에서 "인명진 윤리위원장을 중심으로 윤리기능을 강화해서 깨끗하지 못한 정당, 신선하지 못한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100% 씻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 강 대표가 자리에 앉자마자 민망한 농담을 내뱉었으니 대중들의 비난을 사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강 대표의 야릇한 농담을 부추기고 함께 즐긴 기자들이 이번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공범'인 신문·방송기자들은 인터넷 매체들의 보도로 논란이 확산되자 강 대표를 문제삼는 기사를 스스럼없이 써댔습니다.

공교롭게도 노무현 대통령도 같은 날 언론을 '불량상품'에 비유하며 "아무 대안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상품"이라고 공격했습니다. "대통령이 말을 함부로 하고 언론 탓만 한다"고 비난했던 강 대표가 어제 언론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뒤 노 대통령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강 대표나 노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언론과 기자들이 '불량상품'일 수도 없구요.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진실과 언론보도의 괴리를 보면서 "언론이 담합하면 사람 하나 죽이고 살리는 건 일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 언론이 자기 손톱의 때를 씻어내지 않고 계속 손가락질만 해댄다면 "너희들도 다를 게 없어"라는 대중들의 돌팔매를 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듭니다.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반응도 확연히 갈렸습니다.

모 경선주자 캠프의 특보는 "우리 당 의원들은 기자들을 너무 구워삶으려고 한다, 일찌감치 이런 일이 터진 게 대선 승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며 '잘 했어'를 연발했습니다. 반면, 한 당직자는 "인터넷 매체들이 굳이 안 써도 될 기사를 써서 정초부터 분위기 흐려놓았다"고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나물에 그 밥', 나아질 수 있을까요

'그들과 함께 뒹구는 기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이 뒹구는 모습을 세상에 알리는 기자가 될 것인가?'

이번 사건은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 언론은 정치와 정치인을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해왔습니다. 지금의 정치 불신에는 언론도 단단히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언론과 정치가 한데 뒹구는 상황에서 정치만 더럽고 언론은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부끄러운 게 사실입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이런 기사가 나온다고 해서 우리 언론이 자신의 위선을 돌아볼 의지가 있는지조차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주지하다시피 우리 정치는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 현장을 비추는 언론도 '그 나물에 그 밥' 수준이라는 데 자괴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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