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센인 노인 10명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성심원(경남 산청군 한센인 공동생활시설)에 머무르는 노인들이 지난 10~11일 가족 상봉과 관광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것. 이들은 국립묘지, 여의도, 청와대, 남산, 명동성당 등을 둘러보고 10일 저녁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가족들과 만났다. 이번 행사는 9번째 서울 방문이다. 성심원에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 중 한센병을 앓았던 노인 200여명이 살고 있다. 다음은 이번 행사에 참여한 마르타(75)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할머니의 시각에서 쓴 가상의 서울 여행기다. 참여자들의 성명은 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세례명으로 대신한다. <편집자주>


커다랗고 빼곡하다. 남산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서울 말이다. 크기도 크지만 왜 이렇게 사람들이 서울에만 옹기종기 모여 사는지 모르겠다. 전국 곳곳에 성심원 동네처럼 너른 땅이 많은데, 사람들은 왜 좁은 서울에 살까.

다리가 아픈 탓에 남산 올라가는 것이 싫었는데, 그래도 일행을 따라온 보람이 있다. 케이블카를 타러 갈 때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따라오던 이들을 제치고 일찌감치 앞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모니카(68·여)는 무서운 마음이 들어 남편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지만 '이 정도야 뭐', 내친 김에 사진기자들을 위해 전망대에서 성심원 식구들과 포즈도 취해줬다.

기분이 찢어지게 좋은 것이야 동행한 10명(남녀 각각 5인)의 늙은이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찌나 10인 10색인지, 엄마 같은 임재순(성심원 소속 사회복지사) 팀장의 큰 목소리가 쉴 틈이 없다.

점심 식사를 위해 들른 중국집에서도 모이세(58·남)는 굳이 비싼 삼선짬뽕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모니카는 기어이 술 한 잔 하자며 보챘다. 비록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짬뽕을 스파게티처럼 포크로 먹어야 하지만, 남기는 사람 하나 없다. 우리는 씩씩했다.

얼굴 알려지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서울 관광

기자들은 '서울이 변했느냐'고 계속 묻지만,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다. 지난 1991년 성심원에 들어가기 전과 비교해 변한 것이라면 큰 건물 앞 나무들마다 번쩍거리는 조명이 달려있고, 알 수 없는 꼬부랑글씨의 다방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 장애인 전용 버스가 생겼고, 옛날엔 크다고 생각했던 명동성당이 작아졌다.

그리고 기자들이 많아졌다. 어제(10일)부터 어찌나 따라다니는지 성가셔 죽겠다. 혹시나 서울 사는 막내 동생(66·남)이 카메라에 찍힐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동생은 취재진이 없는 오늘(11일) 아침에 다녀갔다. 루시아(62·여)는 명동성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을 보자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며 싫단다.

루시아는 어제도 기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딸 내외가 찾아왔는데, 한 번 안아라, 뭐해라 곤란하게 만들었다. 다 늙은 우리들이야 얼굴이 알려져도 상관없지만, 혹시나 가족들 사회생활에 방해가 될까, 그것이 걱정이다. 평생 가족들에게 폐만 끼치고 살지 않았나.

임 팀장이 기자들에게 "얼굴이 나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루시아는 사돈네가 볼까봐 어제 저녁 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익살이' 모니카가 해결책을 가르쳐준다. "닮은 사람이었다고 해."

▲ 경남 산청군 한센인 공동생활시설인 성심원의 주선으로 11일 '서울 나들이'에 나선 한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점심식사를 마친 뒤 남산 서울타워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센인으로 산다는 것

가장 발걸음이 빨라진 곳은 남산 전망대와 명동성당 기념품 가게. 야광 묵주, 십자가 메달, 팔찌까지 성심원에서는 눈에 안 들어오던 것들이 엄청 많다. 임 팀장이 '쏜다'고 해서 8000원짜리 흰색 면사포를 하나 샀다. 10000원 이상으로는 안 된다는 으름장에 팔찌는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세레나(69·여)는 쌈짓돈을 꺼내 팔찌를 하나 샀지만,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나. 매달 성심원에서 나오는 용돈 4만5천원은 아끼고 아끼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을 위해 2주 전 파마하는 데 썼다. 남은 것은 오다가 동생 주려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곶감 한 상자 사는 데 썼다.

지금이야 서울이 '나들이의 도시'지만, 내게 서울은 '생존의 도시'였다. 13살 터울의 막내 동생을 자식처럼 키우느라 손가락이 휘도록 일해야 했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4살 때 한센병을 앓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21살 되던 해 가족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 병이야 참으면 그만이지만, 부모님과 네 형제들(일찍 작고한 언니 한 명과 남동생 두 명, 여동생 한 명)을 두고 나올 때 가장 힘들었다.

그 뒤로 1~2년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남의 집 부엌일, 농사일 등을 해서 번 돈으로 집에 들르면 철모르는 동생들은 누나가 사온 사과를 들고 물었다. "엄마, 이거 먹으면 우리도 병 옮아?" 피붙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이니, 세상 사람들의 편견은 말하기 싫을 정도로 나에게 모질었다.

6년 만에 집에 들렀더니 동생들은 고아가 돼 있었다. 부모님은 화병으로 1년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돌아가셨다.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막내 동생은 작은 집에 맡겨져 있었다. 어린 것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구박받고 살았던지, 누나가 찾아갔는데 벽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동생을 데리고 나와 아는 사람을 통해 서울로 보냈다. 열심히 뒷바라지해 동생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보냈다. 지금은 서울에서 한복집을 하는 올케와 살고 있다. 동생은 서울에서 같이 살자고 보채지만, 한센병 후유증으로 뼈 골절이 잦은데다 이미 네 번이나 수술해야 할 정도로 왼쪽 다리의 끊어진 신경이 말썽을 부려 병원행이 잦다. 동생 내외에게 짐만 될 뿐이다.

▲ '서울 나들이'에 나선 한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서울타워로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 꼭대기를 향하고 있다. 생전 처음 남산에 올라보는 한 할머니가 서울시내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나이를 먹다보니 이래저래 짐이 되는 것투성이다. 다리도 말을 안 듣고, 혈압약에다 관절약까지 먹어야 한다. 눈물샘이 고장 나 찬바람만 맞아도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하지만 불편함만 있겠나. 이젠 하나님을 만나 삶의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이 자신의 병을 원망한 적이 없느냐고 물을 때 "사는 것이 그렇고 그렇지"라는 노래 가사 같은 답이 자동으로 나온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살기엔, 우린 정말 먹고 사느라 바빴다. 가난을 피해, 편견을 피해 부지런히 살아야 했다.

동행한 늙은이들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병을 받아들인다. 목발을 짚은 루치아(80·여)는 "원망은 무슨, 운명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루시아는 한술 더 떠 "세속에 물들어서 죄짓고 사는 것보다 이렇게 사는 게 더 잘 한 일"이라며 초탈의 경지에 이른 이다운 답변을 내놓는다.

열심히 산 덕분인지 가족들은 일가를 이뤄 잘 살고,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병이 유전돼 고생하는 자식도 없다. 그러고 보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한평생 나를 괴롭혔던 이 몹쓸 병도 약 한 번으로 해결되고, 이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남산에도 올라와본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이틀 동안 성가시게 했던 취재진이 그만 가보겠다고 하니 얌전한 세레나가 "부탁 말씀 하나 하겠다"며 입을 연다.

"제발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게 해 달라. 우리는 절대 전염되는 병이나, 남에게 해가 되는 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니다. 제발 그것 좀 세상 사람들한테 알려 달라."

▲ 경남 산청군 한센인 공동생활시설인 성심원의 주선으로 11일 '서울 나들이'에 나선 한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서울타워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를 구경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