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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31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1가 매경미디어센터 내 사무실에서 긴급조치 판결문 1412건을 분석한 긴급조치위반 판결분석 보고서가 수록된 '2006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배포했다. 이날 송기인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위원회의 방침을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33년 전 사건이다. 1974년 12월 중순 전북 임실초등학교 교사 김용철(75)씨는 전라북도 경찰청 정보과 안전가옥으로 끌려갔다. 구둣발로 가슴팍을 차이면서 "네 죄를 네가 불라"는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모진 고문을 당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김씨의 머릿속에선 평생 지워지지 않는 잔영이다. 김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2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74년 인혁당 사건이 터졌어요. 시노트 신부나 문정현 신부 같은 인권운동가들이 인혁당 사건에 대해 공개 재판하라고 할 때였는데, 저도 그 말에 동조해서 한 마디 한 게 문제가 됐어요. 반공법에 대한 선별처리 부당하다,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이는 평양에 갔다 와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데 민주당 서민호는 왜 문제가 되느냐…. 그 말한 게 죄가 됐어요."

인혁당 문제 지적했다가 고문당한 교사... "억울한 사법피해자 만들어서야"

@BRI@김씨의 목젖이 떨리는 느낌이 수화기 건너편으로 넘어왔다. 무시무시한 전북도경 정보과 안전가옥에서 당한 고문의 실제를 여기자에게 전달하는 김씨는 놀라지 말고 들으라고 우선 당부했다.

"야이, XX놈아, 네 XX에 전기를 대야 불거냐, 빨리 불어! 그런 끔찍한 말을 들으면서 고문당했습니다. 저를 유치장에 가둬놓고 너 사표 낼래, 감옥 갈래하며 난리를 쳤습니다. 끝내 저는 사유서를 쓰면 풀어준다기에 어떻게 쓰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형사가 불러준 대로 쓰면 된다고 해서 그걸 쓰고 나왔습니다. 그 형사가 불러준 내용은 가정상의 이유로, 건강상의 이유로, 사업상의 이유로 교사직을 사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씨는 몹시 억울했다. 굴욕적이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교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김씨는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교육청에 '억울하다'는 내용의 탄원을 담아 민원서류를 제출했다가 또 붙들려갔다.

"내 양심의 자유에 따라 한 발언이 뭐 그리 문제가 되느냐, 우리 헌법에 모든 국민에겐 언론출판의 자유가 보장되는데 그런 말 한 마디 잘못한 게 그렇게 큰 문제냐고 했다가 다시 얽매이게 됐어요. 처음에는 사유서 쓰고 풀려났지만 두 번째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죠."

1975년 9월, 2년형을 받은 김씨는 1977년 10월 15일에야 석방됐다. 석방기일이 늦춰진 이유는 교도소 안에서 '사상범들과 어울려 단식투쟁을 했다'는 것 때문이다. 일종의 괘씸죄가 적용됐다. 2년형을 선고받은 재판 과정에서도 김씨는 억울한 일을 겪어야 했다. 판사가 피고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 31일 오후 송기인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이 보고서 한 부를 손에 들고 기자회견장으로 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피고석에 앉아 판사의 말을 들어보면, 도무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홀로 중얼거렸어요. 내가 무슨 살인범도 아닌데, 포승에 묶여 쇠고랑을 차고 앉아 재판을 받았습니다. 항소심에서는 재판장이 전주사범학교 선배여서 한마디 말하게 해줬지만, 1심에서는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어요. 전주사범 선배는 빨리 풀어주려는 명분을 찾기 위해서였겠지만, 저로서는 아주 황당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정신병을 앓았다는데….' 저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죠. 그 말 한마디가 법정에서 내가 한 말의 전부였습니다."

김씨는 최근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 판사 실명공개'에 대해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원칙적으로 보면 역사적 범법행위 아닙니까. 제가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당연히 판사의 법복을 벗겨야 한다고 생각하죠. 우리가 당한 것처럼 모조리 감옥에 처넣으라고 말하고 싶죠. 그렇지만 그럴 수 있습니까? 솔직히 저를 고문했던 고문경찰들에 대해선 씨를 말려도 분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판사들은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뭘."

김씨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경찰에 잡혀 들어갔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명한 정치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면서 "술 한 잔 먹고 담벼락에 소변보면서 정부 비판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억울한 사법피해자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냐"며 "그 옛날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교과서 비판했다 50개월 감옥생활... "이해되는 면도 있지만 뻔뻔하다는 느낌"

윤담룡(62)씨는 1975년 6월 전남 광주의 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당시 윤씨가 수업 도중에 박정희 군사독재의 부당성을 언급하면서 국어교과서가 지나치게 정부 홍보책자처럼 돼 있다고 발언한 게 문제가 됐다. 당시 윤씨의 나이는 서른 살. 부정부패나 군부독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청년이었다.

윤씨는 "학원 수업 도중 한 발언이 문제가 돼서 75년 당시 징역 8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면서 "광주교도소에서 50개월(4년2개월)의 실형을 살았다"고 회고했다.

윤씨는 '판사 실명공개' 문제에 대해 "그때 사법부는 행정부의 시녀에 불과했다"며 "당시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판사들은, 본의든 아니든 행정부의 시녀 노릇을 해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특정판사를 거론하기보다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활동을 계기로 사법부가 과거사를 반성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이번 일로 사법부 개혁과 혁신이 이뤄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윤씨는 언론도 지나치게 한건주의로 '판사 실명'만 폭로하고 마는 식으로 보도하지 말고, 다시는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책적 대안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기사를 써야 한다고 촉구했다.

윤씨는 신문을 통해 당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판결했던 판사들의 목소리를 접하니 "지나치게 뻔뻔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괴로움을 토로하는 판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으로서 이심전심 이해되는 면도 있다"며 "모든 판사를 싸잡아 비판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유인물 배포해 실형 산 여대생

1975년 대학가에 '김지하 양심선언문'을 배포한 여대생 3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건도 있었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서울대와 이화여대, 연세대 등 3개 대학 캠퍼스 안에 이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사건에 관련됐던 한 관계자는 "새벽에 학교에 가서 화장실에 몰래 놓고 나온 것이 문제가 됐다"며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지만, 박정희 정권 시절 우리는 참 경직된 사회에 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 관계자는 "일반 학생들이 학교 안에 유인물을 뿌린 것에 대해서도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경직된 사회였는데 하물며 판사들에게는 어떠했겠느냐"면서 "유신시대와 5공화국 때는 내재화된 검열은 물론 노골적인 압력까지 행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이 관계자는 "행정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이 사법부에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사법부도 당시 정치권이나 권력층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판결을 했다고 본다"고 밝혔다.

'판사 실명공개' 논란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법부가 과거를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며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언론이 오히려 법조계의 반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고 비판했다.

법조계가 먼저 진실을 고백하고 반성할 수 있도록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아니라,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이 '이상한 감싸기'로 과거 잘못을 옹호하면서 사회 분위기를 반동적으로 이끄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도 전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역사발전 방향에 관심을 두고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피해자이건, 관계자이건 간에 모두 잘못된 우리 현대사를 뼈아프게 반성·사죄·성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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